Chapter 560 - 7. 질투는 나의 힘(60)
대마녀는 기나긴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일순 현실 감각이 소실되어, 눅눅한 흙의 냄새를 맡고 나서야 대마녀는 제 몸뚱어리가 땅에 엎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의문은 길지 않았다.
혼절하기 전, 단 둘이 혈투를 벌이던 상대가 뇌리를 스친 탓이었다.
흡혈귀.
절대로 세상에 풀어놓아서는 안 될 재앙.
그 존재를 떠올린 대마녀의 몸이 튕겨 오르듯 일으켜졌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동공이 절로 떨릴 지경이었다.
대마녀는 그만큼이나 필사적이었다.
“둘째야! 어, 언니… 아니, 흡혈귀는 어디로 갔……!”
다만 그 결의에 찬 목소리는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주위에서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입에 담은 낱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둘째’라니?
자식은커녕 제자도 두지 않은 지가 한참이었다. 대마녀가 그렇게 불러야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가.
대마녀는 불현듯 가슴을 채우는 쓸쓸한 공허감에 입을 다물었다. 해일처럼 범람하던 낯선 기억들이 잔향처럼 남아 여인의 머리를 몽롱히 물들였다.
또 다시 꿈과 현실이 중첩된다.
재차 엄습하는 두통에, 대마녀는 무심코 비틀거리며 신음을 흘려야 했다.
어떠한 이상 징후 하나가 포착되기 전까지.
아니, 포착해 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쪽배를 탄 어부 앞에 나타난 용오름과 같았으니까.
인지하고 싶지 않아도, 온몸이 그 존재를 외치고 있었다. 흠칫 몸을 굳힌 대마녀의 시선이 서서히 어느 지점을 향했다.
태풍.
제대로 된 규모조차 측정이 되지 않았다.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존재가 내뿜는 위압감이 이러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그중에 마스터가 포함되어 있을 것.
따라서 대마녀는 곧장 걸음을 내딛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검공이 홀로 흥분해서 날뛰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외에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흡혈귀가 본체를 이끌고 나타났다.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문득 과거의 참상을 떠올린 대마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곧 불안과 초조에 젖은 걸음걸이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잠시.
대마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믿기 힘든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뭐, 야…….”
검과 검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단련된 검사의 기세는 예리한 칼날과 같다. 숙련된 칼잡이가 정신을 집중했을 때, 그 검과 육신을 명료히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몸이 검을 위해 움직이는 경지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륙 최고의 검객은 말한 적이 있었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정한 검객은 혼조차 하나의 검으로 벼려 낸다. 그리고 이 관문에 이르러, 달인의 혼은 온 세상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크고 강렬해진다.
그리하여 검혼(劍魂).
검의 극의에 다다라 검을 버리는 단계였다. 온 세상이 그의 칼자루고, 칼날이었으니.
혹자는 이를 비유나 과장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마녀는 아니었다.
이미 마도의 극의를 이룬 몸이었다. ‘마스터’에 도달한 존재가 어떠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대마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두 자루의 검.
이는 곧 검공을 제외하고도, 한 자루의 검이 더 존재한다는 뜻이었기에.
기괴한 감각이었다.
검공의 존재가 온 세상을 칼날로 만든다면, 그 맞은편에 선 사내는 온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차츰차츰 일그러지는 시공 사이로 은빛의 은하수가 핏물처럼 배어 나왔다.
뚜렷한 형체를 갖추지 못한 별빛은 무정형의 괴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경계의 저편에서, 이 대지를 향해 손을 뻗는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이처럼 일그러진 심상이 존재할 수가 있나?
심상이란 마음의 풍경이었다. 무도와 마도를 불문하고 높은 경지를 이룬 달인들은, 대개 정돈된 명경지수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그래야만 심상이 현실을 압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몸부림치는 빛의 안개를 보라.
마치 가둘 수 없는 짐승을 쇠사슬에 묶어 놓은 모양새였다. 자칫 실수하면, 온 대륙을 짓밟아 버릴 폭력의 화신이 저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대마녀는 무심코 그렇게 판단했다. 어느덧 식은땀이 그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힘을 볼수록 그러한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오랜 숙적을 맞이하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그때였다.
“……그만.”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숨 막힐 듯 피어 오르던 마력의 폭풍이 자취를 감추었다.
얼떨떨할 만큼 극적인 태도 변화였다. 사내의 변덕을 맞이한 소녀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시선.
그럼에도 사내는 제 뜻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그만합시다. 제 정체야 차치하고, 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내의 의문에 검공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사내를 지긋이 응시하다가, 이내 코웃음을 치며 기세를 거두었을 따름이었다.
부루퉁한 반문이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하, 웃긴 놈일세… 네 말마따나, 정체도 모르는 놈의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이냐?”
“그랬다면 진작 본심을 내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말이 마음에 든 것일까.
검공은 훗, 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흥,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내가 진심을 냈으면 이미 확……!”
그러면서 손끝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소녀.
사내를 이를 보고도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걸음을 내딛어 암묵적인 신호를 보냈을 따름이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
저벅저벅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검공은 속 모를 눈빛을 한 채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고, 대마녀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을 달싹이고 있던 차였다.
일순 사내와 검공이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일대를 질풍이 휩쓴 것은 그 직후였다.
어찌나 여파나 강렬했는지 대마녀는 소매로 제 시야를 보호해야만 했다. 옅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 소매를 치웠을 때는, 두 검객의 검이 맞물린 채 불똥을 토해내고 있었다.
“……역시 제법이야, 괴물 양반.”
“좋은 스승한테 배웠거든요. 그리고, 또…….”
팍, 하고.
제 목젖을 노리던 칼날을 쳐내면서, 사내는 무심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진심을 내지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끝으로 사내는 다시금 걸음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흘깃 곁눈질하며, 검공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어이가 없다는 눈치였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검공이 혀를 쯧쯧 차든 말든, 사내의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대로 이곳을 떠나 금세 사라지기라도 할 태세였다.
그 탓이었다.
대마녀가 저도 모르게 사내의 옷깃을 붙잡고 만 것은.
흠칫, 몸을 굳힌 사내의 눈동자가 대마녀를 향했다.
그 금빛 눈동자에 옅은 감정의 잔향이 번지고 있었다. 정작 대마녀는 사내를 붙잡은 이유조차 알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지만 말이다.
사내 또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를 몇 초.
슬슬 이상한 낌새를 챈 검공이 무어라 말을 걸기 직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북부의 찬바람을 떠올리게 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모든 감정을 걸러 낸 음색은 도리어 맑고 또렷했다. 그 냉대에 대마녀는 일순 울컥, 하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잔불조차 남지 않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대마녀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불태운 인간의 눈동자였다. 오로지 피로감만이 전해지는 그 눈빛에서는,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기색마저도 느껴졌다.
어째서 그 사실이 이토록 울적하게 다가오는지.
대마녀조차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아, 그…….”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이제야말로 붙잡을 수단이 전무했다.
사내는 이제 떠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
지당한 수순이었다.
당장 사내의 정체마저 미지의 영역에 남아 있는 마당이 아닌가. 목도한 바에 따르면 ‘마스터’에 다다른 실력자 같은데, 이러한 강자가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저 사내가 이례적인 존재라는 것.
그러니 더는 마주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영.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못한 것 같은데.
대마녀는 스스로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어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이를 본 검공이 흐음, 하고 묘한 눈빛을 하며 팔짱을 꼈을 무렵이었다.
바스락, 하고.
어디선가 나뭇잎을 즈려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좌중의 시선이 그 진원지로 향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서 있었다.
뇌쇄적인 진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은, 스스로 낸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이윽고 여인의 시선이 서서히 좌중과 마주쳤다.
결계는 없고, 이곳에는 마스터만 셋.
흡혈귀의 판단은 적절했다.
“꺄,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 줄행랑.
이러한 퇴장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행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물론,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저 년 잡아라!”
검공이 목청을 높임과 동시에, 곧장 세 명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