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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61)화 (561/649)

Chapter 561 - 7. 질투는 나의 힘(61)

‘눈물은 여인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다.’

지금 나는 그 오랜 격언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무의식의 한 켠, 이 빛 한 점 없는 기이한 공간에서.

물기 어린 눈동자, 흐느끼는 숨결, 그리고 가는 떨림을 일으키는 어깨가 차례로 오감을 두드렸다. 나를 마주한 소녀는, 구슬픈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음이 욱신 아파 왔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나에 대한 기억은 없다지만, 상대는 내 약혼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흔들리는 마음에, 나는 무심코 새어 나오는 위로의 말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엘시 선배의 고민은 위로해 주는 정도로 끝날 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나 또한 이미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나도 답을 정한 참이었다.

엘시 선배라고 나보다 먼저 정답에 도달했을 리는 없었다.

나와 달리, 엘시 선배는 이 싸움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실감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모든 것이 죽고 무너진다.

붕괴한 문명과 피 흘리는 소중한 사람들, 그 공포는 미래를 직접 목도한 이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나처럼.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 약한 게 죄야……?”

분노마저 서린 목소리로, 소녀는 그렇게 물었다.

어느덧 그 푸른 눈동자에 짙은 적의가 서려 있었다. 다만 나를 향한 감정은 아니리라.

이윽고 엘시 선배는 파묻어왔던 말들을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태껏 개처럼 굴러 왔잖아! 잠도 못 자고 엎어져 공부만 했어… 온몸의 혈관이 찢겨나갈 때까지 수련만 했다고! 그뿐인 줄 알아? 온갖 신화 속의 괴물과 목숨을 걸고 사투까지 벌였지!”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엘시 선배의 목소리는 더욱더 높아졌다.

악물어진 잇새, 실핏줄이 돋은 눈동자는 맺힌 이슬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제, 이제… 됐잖아! 내가 아니라도, 싸울 사람은 많아… 이제 더는 싸우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나는 약해빠졌으니까…….”

“맞아요. 약해빠졌으니까.”

엘시 선배의 말을 받으며, 나는 이전의 말을 반복했다.

“약해빠졌으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겁니다. 땅 위를 구르고, 만신창이가 돼서 숨이 끊어질 뻔하고… 갖은 모욕에, 아픔에, 소중한 사람까지 잃었죠. 아닙니까?”

내뱉어지는 언어는 하나같이 엘시 선배의 상처를 겨누고 있었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어 왔던 엘시 선배였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싸움 끝에 소중한 가족을 잃지 않았던가.

동경해 왔던 삼촌이자 대마법사, 레이놀드 라이넬라를.

당연히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엘시 선배가 울컥 분노를 토해내는 건 지당한 수순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엘시 선배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난데없는 고백에 엘시 선배는 달싹이던 입술을 닫았다. 일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나를 향했다.

“저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내심은 무서웠죠. 그래서 매일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왜 나여야만 하는가.”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일단 내 말을 들어 보기로 한 듯했다.

물론 여전히 그 눈빛에는 강한 의문이 서려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엘시 선배의 심정을 잘 알 텐데도, 어째서 이토록 냉혹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단지 운이 나빴을지도 모르죠.”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네, 운이 나빴어요. 그 외의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점은, 아무리 자문해 봐야 달라지는 사실은 없단 거죠.”

그러면서 나는 땅에 떨어진 칠흑의 막대를 주웠다.

엘시 선배가 엎어질 때 떨어트린 물건이었다. 또한 레이놀드 라이넬라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기도 했다.

이 자그마한 막대에 담긴 의미가 너무 막대한 탓일까.

엘시 선배는 침묵을 지킬 뿐, 내가 건네는 막대를 받아들지 않았다. 물기 어린 시선이 말없이 나를 향했다.

“계속 울고만 있을 겁니까?”

“나, 나는…….”

“도망치기만 해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어요. 우리는, 세상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장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뒷걸음질을 쳐봐야, 등 뒤에는 절벽밖에 남아있지 않은 형국이었다.

그래도 도망칠 수 있지 않느냐고?

불가능했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생명의 수는 무수히 많았으니까.

때로는 그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모조리 져버리는 선택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전제 하에 거침없는 설득이 이어졌다.

“함께 돌아갑시다.”

“나는, 나는 그러니까…….”

“당하고만 살 수는 없잖아요, 엘시 선배.”

그 말이 결정타였다.

움찔, 하고 한 차례 몸을 굳힌 엘시 선배의 숨결이 눈에 띄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물기가 사라져 가는 눈동자와, 묘하게 결연한 빛을 띠는 낯빛까지.

그래, 내가 알던 ‘엘시 라이넬라’라면 마땅히 이래야 했다.

얕보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성질 더러운 여인.

그것이 바로 엘시 라이넬라 아니었던가.

이윽고 엘시 선배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싫어.”

다만 그 내용이 예상과는 정반대라서.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몇 번.

엘시 선배는 내게 반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엘시 선배, 말했잖아요…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다니까요? 우리 어깨 위에는 수많은 생명이……!”

“어쩌라고?”

짤막하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물음이었다.

나는 그 당당하기까지 한 태도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제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내 상대는 그 ‘엘시 라이넬라’였다.

“남들이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인데? 그까짓 하찮은 정의감 때문에 내가 아프고 다쳐야 한다고? 웃기지 마… 싫어, 절대로 싫어! 세상 따위 망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뭔데?!”

아카데미 인성 최강, 이기적인 심성과 예민한 성미로 똘똘 뭉친 여인.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다시 찾아오지 마라?”

내게 교정 당하기 전의 엘시 선배는 늘 이랬다. 아니, 사실은 본성이 이런데 내 앞에서만 애써 감추고 있는지도.

당황한 내가 무어라 반박을 입에 담기도 전이었다.

팍, 하고 내 심장을 두들기는 감촉이 느껴졌다.

전격 마법이었다. 어쩐지 너무 얌전히 있더라니, 그 와중에 나를 쓰러트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듯했다.

워낙 당황했던 터라 이를 막아 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의식의 세계라서 그런지, 마력을 움직이는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

새하얘지는 시야 사이로 엘시 선배의 잔상이 맺혔다.

그 적의에 찬 눈빛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안 되는데,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나는 이내 의식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다.

신전의 침대 위에서.

그리고 헐떡이며 벌떡 몸을 일으킨 나를 맞이한 대마녀는, 뚱한 얼굴을 한 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렸다.

“……우리가 한 방 먹었다.”

결과는 검공의 전력 이탈.

명백한 비보였다.

**

세리아가 눈을 뜬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정체불명의 두통에 시달리던 그녀였다. 혼절까지 하고 나니 더욱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흐릿한 신음이 잇새로 절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기억 나지 않았다. 다만 앗, 하는 찰나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뿐.

설마 반응도 못할 만큼 쾌속의 일격에 당한 걸까.

하지만 그만한 강자가 도대체 어디에서?

풀릴 리 없는 의문은 두통을 더욱 가중시키기만 했다. 세리아가 이마를 짚으며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키자, 어디선가 맑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일어나셨어요?”

세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암청빛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소녀가 하나 앉아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10대 소녀를 연상시켰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의 손에는 낯익은 봉제인형이 하나 들려 있었다. 세리아가 짝사랑하는 사내를 본뜬 인형으로, 세심한 손길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혹시 저 작품은 얼마나 할까.

무심코 속으로 금화를 세며, 세리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이곳은……?”

“신전이에요. 이안 경은 따로 용건이 생겨 떠나셨고, 저는 선배의 간호를 부탁받아서 남았어요.”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 가는 시엔의 눈은 봉제인형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는 소녀의 손길이 퍽 정성스러웠다.

정작 세리아의 몸 상태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바였다. 황녀는 기본적으로 이안을 제외한 타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으니까.

세리아는 한숨조차 내쉬지 않고 두 번째 질문을 입에 담았다.

“용건이라니요?”

이번에도 시엔은 명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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