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3 - 7. 질투는 나의 힘(63)
아니라고.
시엔은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 따위가 도대체 무얼 아냐고. 원하지도 않은 힘을 타고나, 제 어미마저 목을 조르고 떠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온 세상이 소녀를 미워하고 부정하던 나날들.
그래서일까.
어느 날부터인가, 시엔조차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었다.
온갖 추악한 감정들을 보여 주는 제 눈이 싫었다. 욕망으로만 움직이는 세상이 싫었고, 그 안에 몸을 담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지배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비웃고, 내리 깎으며 냉소적인 체를 했던 이유는 사실 그랬다. 이 얼마나 하찮고 우스운 아집이란 말인가.
그러던 찰나에 만난 인물이 바로 이안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대가 없는 호의를 보여 주었다. 더불어 평생 부정해 왔던 제 눈을 긍정해 주기까지 했다.
숨김 없이 제 마음을 드러내면서.
살면서 보았던 광경 중에서 단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엔은 그제야 스스로를 사랑할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야.
그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은 몸이었다. 당연히 이안의 인간관계 따위에 간섭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시엔은 심중에 피어 오르는 말을 토해내지 못했다.
수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지적 하나.
‘미움 받기 싫어서’.
시엔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세리아의 시선이 흘깃 어딘가를 향했다.
“푸흐, 크흐흐… 질투, 질투시여!”
어느덧 다가온 진흙이 세리아의 시선을 받고 꿈틀거렸다. 덩어리에 가까운 형체라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아마도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뜻대로 하셔야 합니다. 뜻대로…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될 테니.”
내가 무얼 원한다는 걸까.
세리아가 무심코 그러한 의문을 떠올렸을 때였다.
코끝을 스치는 아찔한 향기.
향기롭다든가, 달콤하다든가 하는 흔해빠진 표현으로는 이 고혹적인 냄새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굶주린 짐승처럼 세리아의 시선이 저절로 향기의 근원을 쫓았다.
생채기였다.
흡혈귀의 권속을 심문할 당시,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잔해에 긁혀 만들어진 자잘한 상처들.
비록 출혈은 멈췄지만, 미세한 혈향마저 온전히 감추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연분홍빛의 실금에 이끌린 세리아의 동공이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홀로 울려 퍼졌다. 세리아는 그 박동을 느끼며, 일전에 마주쳤던 어머니의 조언을 떠올렸다.
‘본능을 따라라.’
어느덧 세리아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고 있었다.
시엔이 주먹을 움켜쥐고 용기를 낸 것도 그때였다.
“하, 하지만……!”
불행히도 그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푹, 하고.
송곳니가 부드럽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고 신속한 과정이라, 목을 물린 시엔조차 일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이러한 의문조차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내 맹렬한 현기증과 함께, 목덜미를 할짝이는 혀끝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으흐, 흐응… 흐윽?!”
시엔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거미의 독니에 물린 먹잇감처럼, 움찔움찔 몸을 떨긴 했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마비라도 된 듯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여인이 목을 할짝일 때마다 섬찟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흘러, 야릇한 신음만을 토해냈을 뿐.
소녀의 시야가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시엔이 마지막으로 기억한 광경은, 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선배의 낯선 모습이었다.
진홍빛 눈동자.
반전된 동공의 색을 마지막으로, 황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제 피가 무엇을 깨웠는지조차 모른 채로.
**
신전의 집중치료실.
아카데미를 다니다 보면 종종 신세를 지는 곳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신세를 지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이곳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편이었다.
주로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내가 입원했을 때였고, 나머지 하나는 내 동료가 입원해 병문안을 왔을 때였다.
오늘의 방문 목적은 후자에 속했다.
동료의 부상은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병실은 늘 침중한 분위기에 잠기고는 했지만, 오늘은 좀 더 묵직한 공기가 방 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이 자리에 선 인물의 면면이 그만큼이나 무시무시했으니까.
제국의 황제와 검공, 그리고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까지.
대륙의 패권국을 움직이는 수뇌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만일 이곳이 회의장이었다면, 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들이 지금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병실이었다.
가타부타 복잡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방증하듯이, 제국의 정점이라 불리는 노인은 기나긴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황제의 푸른 눈동자에 애틋한 빛이 서렸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니…….”
“우리가 어리석었다. 흡혈귀를 쫓는 데 정신이 팔려서, 설마 후방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나는 황제와 검공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이해할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흡혈귀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며 도주했다. 미래에서 온 나와 검공, 대마녀까지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암흑교단의 일곱 별 중 하나, 대륙 전체를 공포로 떨게 한 전설 속의 마인.
심지어 그 여인을 견제하기 위해 ‘탐욕’은 내게 접근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만만한 상대였다면, 탐욕이 그러한 수단까지 택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또 다시 발생한 실종 사건이었다.
황녀는 창백한 낯을 한 채 쓰러져 있었고, 세리아는 어느덧 자취를 감춘 뒤였다. 치료를 맡은 사제의 증언에 따르면 시엔은 직전에 대량의 피를 잃은 듯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곧 알 수 있으리라.
시엔이 의식을 되찾는다면 말이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제국 중진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꼬마야, 아카데미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너라도 어서 몸을 피하는 편이 어떠냐? 우리야 살 만큼 살았다지만, 네 어깨 위에는 일국의 운명이 얹어져 있지 않더냐.”
“나도 동감이다.”
대마녀가 제안하고, 검공이 받는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황제로서는 반론의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제국의 황제나 되는 인물이, 미끼 삼아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게 말이 되지 않았지. 너라도 어서 떠나거라.”
“그럼 백부께서는?”
“글쎄.”
아직도 소녀의 의체를 뒤집어 쓴 검공의 낯빛은 차가웠다. 온기라고는 한 톨조차 섞이지 않은 음색으로, 검공은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토해냈다.
“아카데미도 소중하지만, 옥체에 비할 바는 아니지. 내가 정신이 팔린 틈에 조카 손녀까지 노린 놈들이야. 너를 노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이상, 나도 너를 호위하는 수밖에…….”
확언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다.
검공의 결정에는 논리적인 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말끝을 흐린 까닭은, 그 결정이 불러 올 여파 탓이리라.
검공이 떠난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전력의 이탈을 의미했다. 대마녀는 제 힘을 쓰지 못하고, 미래에서 온 ‘나’는 함부로 불러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마 한동안은 내 몸으로 활동하기 힘들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전력은 명백한 열세로 전환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를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짊어져야 할 책임의 규모가 달랐던 탓이었다.
이러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 떠나야지.”
“할망구…….”
대마녀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검공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라고 해서 사랑스러운 조카손녀를 이 꼴로 만든 흉수를 벌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는 없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의무가 있을 뿐.
대마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픽,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쩌겠느냐? 너도, 나도… 심지어는 성국의 천신쟁이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거늘. 내 족쇄를 풀겠다고 네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그래도 흡혈귀가 상상 이상으로 맹탕이라 다행이오.”
위로인지, 혹은 스스로에게 대는 핑계인지.
검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둘로서도 어찌저찌 싸울 만한 정도 아니겠소? 내 제국의 정예를 붙여 둘 테니……”
“소용없다.”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대마녀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흩어지는 연기를 응시하는 그 눈빛이 몽롱이 풀려 있었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듯이.
“고작 그 정도였다면, 내가 이처럼 골머리를 썩지 않았겠지. 어중이떠중이들을 붙여줘 봐야 희생만 늘 뿐이야.”
“하지만…….”
“괜찮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게 내 의무니까.”
결국 검공은 미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렇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황제는, 병실을 나서며 내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렸다.
“……떠나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지.”
이 언질을 마지막으로 병실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다만 대마녀가 이따금씩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을 따름이었다.
나는 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전력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날 밤, 기숙사에 온 나를 반긴 이는 검은 머리카락의 미인이었다.
“이제야, ‘거래’할 마음이 들었어?”
창밖에서 쏟아지는 달빛보다 찬란한 금빛 동공을 빛내면서.
침대에 걸터앉은 여인은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