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4 - 7. 질투는 나의 힘(64)
늘 그렇듯 소녀는 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치 이 자리가 마땅한 제 몫이라 주장하고 싶은 듯이.
턱도 없는 소리였다. 며칠 밤을 함께 보내기는 하나, 우리 둘은 평생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인류의 떠오르는 샛별과, 무수한 생명을 취한 인류의 숙적.
두 사람의 대립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태어나기는 남매의 연으로 태어났지만, 끝내는 운명이 서로를 갈라놓았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기구한 인연으로 엮인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
내가 일부러 소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그러한 탓도 분명 있었다. 단지 원망이나 증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 심경이었다.
별개로 내 성대를 통과한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나?”
“말했잖아, 오빠. 내가 오빠를 떠날 일은 없다고… 오빠가 나를 떠나지 않는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일부러 소녀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마침 그녀와 나눠야 할 대화가 있던 참이기도 했다. 이윽고 내 손이 자연스레 상의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마치 소녀가 존재하지 않는 양, 언제나와 같은 수순이었다. 숙소에 돌아오면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와중에도 검과 도끼가 내 곁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상대는 암흑교단의 칠죄성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를 눈치 채지 못할 소녀가 아니었다. ‘탐욕’은 이내 부우, 하고 작위적인 소리를 내며 볼을 부풀렸다. 못내 서운하다는 눈치였다.
“자꾸 그러기야? 섭섭하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가 될 운명…….”
“왜 습격했지?”
목적어가 생략된 의문이었다.
그 짤막한 반문에 소녀의 말문이 막혔다. 나를 향하는 금빛 눈동자는 그 속을 읽기 힘들 만큼 맑고 깨끗했다.
의문인가, 혹은 감탄인가.
나는 셔츠를 벗고 보다 편한 옷을 걸치면서. 뜻 모를 눈빛을 한 소녀에게 재차 물어야 했다.
“흡혈귀 말이야. 다소 난관이 있긴 했지만, 우리 측에는 마스터가 둘이나 있었어… 일부러 결계를 무너트리는 강수를 둘 필요는 없었단 말이지. 그러지 않아도 흡혈귀는 잘만 제거했을 테니까.”
“흐응,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 외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날 흡혈귀의 소재는 베일에 감싸져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뜻밖의 만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심지어 흡혈귀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는 공간 왜곡 결계에 둘러싸여 있기까지 했다. 우연이라도 사건과 무관한 인물이 그곳에 접근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유력한 용의자는 오직 하나.
이전부터 흡혈귀의 소재를 알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어느 여인 하나뿐이었다.
흡혈귀의 결계를 외부에서 붕괴시키고, 결계 내부의 인원들을 전원 몰살시킬 만한 내막이 충분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내 지적에도 소녀의 낯빛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아니,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 올리기까지.
스산한 미소와 함께 금빛 동공이 떠올랐다. 어둑한 조명이 기꺼이 도화지 역할을 떠맡았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 말을 해주길 원하지? 배신자와 말로 대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침묵.
나와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우뚝 마주쳤다. 제대로 마력을 끌어올리지는 않았으나,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아주 자그마한 불씨만 있다면.
이대로 검을 뽑고 소녀와 생사결을 벌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앞에서는 힘을 합치자고 했으면서, 뒤에서는 나와 흡혈귀의 공멸을 노리고 있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으니까.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그렇게 내 손이 슬그머니 허리춤을 향하려던 찰나.
“푸흐, 아하하하하핫! 그, 그만…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맞아, 내가 저지른 짓이야.”
소녀는 폭소를 터트리면서, 제 눈꼬리에 맺힌 이슬을 찔끔 닦아냈다.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소녀를 겨누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너, 너무 재미있어서… 킥킥, 그럼 날 믿고 있긴 했단 말이네?”
“최소한의 신뢰관계도 어긋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던 거야.”
“푸흐흐, 그래? 아닐 텐데… 아, 멋있어. 어떻게 화난 얼굴도 이리 멋질까? 우리 오빠는 진짜 최고라니까…….”
나와 소녀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인상을 찌푸려도, 소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이따금씩 참기 힘들다는 듯 제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그러지 않아도 심란했던 내 인내심도 슬슬 한계였다.
내 손이 검 손잡이를 붙들자, 그제야 소녀는 내 의문을 해소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계약을 위반하지 않았어. 나는 상인이라고. 계약을 위반할 리가 없잖아. 오빠, 바보야?”
“하지만, 넌 내 목숨을 노렸……!”
“내가 어떻게 오빠를 죽여?”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소녀는 순수한 의문으로 물든 낯빛으로 내게 물었다.
사뿐사뿐 내딛는 걸음걸이가 고혹적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나를 바라보는 그 황금빛 동공에서 다양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애정, 증오, 탐욕, 집착, 그리고 성욕.
그 강렬한 열기에 낯짝이 화끈해질 지경이었다. 일순 밀도 높은 감정에 압도당한 나는 소녀가 코앞까지 당도할 때까지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뒷짐을 지고, 살짝 상반신을 숙이면서.
소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는 듯이.
“말해 봐, 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를 죽여? 내 인생의 반쪽이자 내 도둑 맞은 삶을 완성시켜 줄 마지막 조각을? 오빠는 제 몸뚱어리를 반으로 가를 생각을 하거나 해?”
맹렬히 휘몰아치는 욕망의 응어리는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저 선연한 눈빛을 마주한 이들이라면 모두가 동일한 평가를 내리겠지.
소녀는 진심이었다.
차라리 광증에 가까운 집착이 끈적하게 내 몸에 엉겨 붙었다.
할 말이 궁해진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숨결이 섞인 지 몇 초나 됐을까.
끝내 내가 짜낸 의문이란 뻔하기 그지없는 반론이었다.
“……그럼 왜?”
“오빠가 아니야. 나는 나머지 둘을 노렸던 거지.”
물론 소녀는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슬쩍 상체를 곧추세우고 검지를 치켜드는 모습에서 묘한 만족감이 엿보였다. 실제로 그 입가에 매달린 흡족한 미소가 이를 증명하고 있기도 했다.
“마스터는 우리 암흑교단 최대의 숙적들이거든. 그런데 눈엣가시인 질투와 함께 둘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다? 최고잖아?”
“그 과정에서 나도 죽을 수 있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를 구할 수단쯤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다시금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는 소녀.
묵직한 둔부가 솜털 이불에 진폭을 일으켰다. 나는 우묵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서서히 검 손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어디 말이나 들어보겠다는 신호였다.
소녀는 기꺼이 내 요구에 응해 주기로 한 듯했다.
“오빠도 ‘경계’를 본 적이 있지?”
“그래, 당연히.”
그렇지 않으면 하이 익스퍼트에 도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이러한 함의를 담은 대답에 소녀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경계’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아. 그 너머를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거든. 온 대륙을 통틀어도 델피렘 님 정도가 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희 교주 자랑을 듣고 싶진 않은데.”
“에이 참, 인내심 없기는… 중요한 점은, ‘경계’가 세상의 이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세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 외의 공간이라고 할까? 그래서 세상의 이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릴수록, 경계와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커지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나는 문득 대마녀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던 설명을 떠올렸다.
이 세상은 오행의 상호작용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흡혈귀의 결계는, 이 오행의 균형을 일부러 붕괴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내 추론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소녀가 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맞아, 흡혈귀의 결계는 일시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거야. 오빠가 갇힌 공간도 마찬가지지. 그러지 않으면, 마스터와 일대일도 붙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게 날 구출하는 것과 무슨 상관…….”
“결계가 붕괴하더라도, 오빠는 경계 속의 미아가 될 뿐이란 소리야. 그렇게 되면 대부분은 영원히 경계 속을 헤매다가 그 너머에 동화되고 말겠지… 하지만 내가 말했지?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누구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소녀는 말하지 않았던가.
바로 직전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를.
내가 흠칫 몸을 굳히자 소녀는 더욱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금빛 눈동자가 유독 요사스러웠다.
“델피렘께서 주목하고 계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오래 전의 꿈을 떠올렸다.
내가 처음 들여다 보았던 사내의 기억 중 하나를.
‘델피렘이 오고 있다.’
그날 들었던 이름이, 비로소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