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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65)화 (565/649)

Chapter 565 - 7. 질투는 나의 힘(65)

‘델피렘’.

그 이름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정작 그 실체를 목도한 적이 없던 나조차도, 그의 존재를 듣자마자 두서 없이 마구잡이로 지껄여댔을 정도였다.

일종의 공황 상태에라도 빠진 듯이.

“그럼, 결국 나 보고 델피렘과 협력하라는 소리인가? 제정신이야? 그리고 델피렘은 도대체 뭘 하고 있지? 칠죄성 중 둘이 서로 다투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쉿, 쉿.”

순식간에 쏟아져 내린 말의 폭우는, 소녀의 제지 끝에 겨우 멎었다.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소녀는 속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모를 꾸미는 경국지색의 요녀처럼, 검은 성녀의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그렇게 망령되게 부를 이름이 아니야, 그분은… 신에게 버림받은 자들의 대변자이자, 곧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실 분이거든.”

“웃기지 마.”

나는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그렇게 말했다.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있었다.

고아원장 길포드와, 살점 씨앗이 되어 비명을 내지르던 아이들.

미트람의 꼭두각시가 되어 소중한 이들을 죽여야 했던 실험체들이나, 여동생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네드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레오릭? 엘프? 유렌과 고아들?

물론 빠짐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핏자국을 떠올릴 때마다 혈관의 아릿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알맞지 않은 피를 수혈 받기라도 했다는 양.

그것이 내가 지은 죄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들을 괴물로 만든 델피렘은, 이보다도 더 끔찍한 죄를 짊어지고 있을 터였다.

“신에게 버림받은 자들을 대변해? 너희가 하는 짓은, 정작 그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괴물로 만들 뿐이잖아. 그렇게 소중한 관계를 박살 내고 인륜을 저버리면서 어떻게 그리 뻔뻔한 소리를 하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도 세상이야.”

“핑계 대지 마……!”

“어차피 모든 것이 핑계겠지. 정당한 방법으로 세상을 바꿔? 그 정당하다는 기준은 누가 만들지? 까마득히 높은 분들의 비위를 맞춰 가며 알음알음 세상을 바꾸자고? 언제? 우리 모두가 땅에 묻힌 다음에?”

조목조목 반박을 이어가는 소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이질적이었다. 단 한 번도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은, 광신자의 태도였으니까.

“다들 그러지. 당연하다는 듯 우리가 희생하라고 말하잖아. 조금만 참아라, 너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세상이 달라질 테니…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너그럽게 참고 인내해도,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 대륙에 제 몫을 조금이라도 양보했다간 굶어죽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래서 그들의 존엄을 훼손하고 도구처럼 다루겠다는 거냐?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 잘난 아집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니까.”

그에 울컥해서 무어라 목소리를 높이려던 나는, 이내 나를 묵묵히 응시하는 소녀의 시선을 맞딱트려야 했다.

끝내 구원 받지 못한 나의 핏줄.

내 심장이 일순 덜컥이며 멈추었다.

“신도, 세상도, 오빠도 우리를 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밖에 없어. 설령 그게 인륜을 짓밟는 잔혹한 행위더라도 말이야.”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그조차도 결국 핑계에 불과하다. 제 자신의 목숨을 담보받기 위해 또 다른 약자의 살을 뜯어먹을 뿐이라면, 그것이 작금의 세상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어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반론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소녀는 어느덧 몸을 일으켜, 사뿐사뿐 걸어 나를 지나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쓸쓸한 뒷모습에 비난을 던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대화도 이제 종막.

끝을 알리듯 맑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쩐지 살짝 울적한 느낌이 나는 음색이었다.

“질투의 위치는 따로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또, 조심해… ‘경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거든. 술자조차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것이 마지막.

소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으려 하길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 하나를 짜냈다.

“셀린은?”

우뚝, 하고 소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아 그 낯빛마저 살필 겨를은 없었다. 다만 나는 더욱 간절해진 어조로 재차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세리아는 어디로 갔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뭐든……!”

바로 그때였다.

훅, 하고 소녀의 숨결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어느덧 소녀는 내 지척까지 되돌아와 있었다. 핥듯이 내 얼굴을 살피면서.

이윽고 보드라운 손바닥이 슬쩍 내 뺨을 쓸어내리는 간지러운 감촉.

“그렇게 신경 쓰여?”

“……당연하지.”

그러자 소녀는 싱긋, 하고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그렇게 구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언제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끝내 미련을 지우지 못하는 내게, 소녀는 장난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 흡혈귀의 핏줄은 잘 모르겠지만, 셀린 언니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 모든 일이 끝나면, 그 행방을 알게 될 테니.”

“너희를 어떻게 믿고?”

“우리를 믿으면 안 되지.”

소녀는 그러면서 진짜 마지막이라는 듯, 내 가슴을 쿡 찌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셀린 언니를 믿어 봐, 어디 한 번.”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소녀는 나타났을 때와 같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자취조차 남지 않은 빈 자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가, 말없이 걸어 찬장 문을 벌컥 열었다.

싸구려 위스키.

오늘따라 질 나쁜 독주가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

'탐욕'은 내게 협력을 약속했다. '질투'의 위치를 알려주는 선에서 그만두려는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다면?

이미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관계가 망가진 뒤였다. 심지어 '탐욕'은 이 대립이 델피렘의 묵인 속에 이루어지고 있단 사실까지 밝힌 바 있었다.

그녀는 선을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유용한 장기말로 활약하리라.

결전은 머지 않은 시기에 다가올 터였다.

하지만 예로부터 좋은 소식은 늘 나쁜 소식과 함께라고 하던가.

내게 희소식과 함께 비보가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일단 희소식이 하나.

황녀가 드디어 눈을 떴다. 사실 다량의 실혈로 인한 혼절이었으니, 피만 다시 돌아온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이유가 없긴 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으로 신전을 찾아간 나는 묵직한 침묵을 마주해야 했다.

황제, 검공, 대마녀는 하나같이 입은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침대 위의 시엔은 죄인이라도 된 양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참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막은 곧 시엔의 진술에 의해 밝혀졌다.

세리아가 시엔의 피를 빨았다. 마치 '흡혈귀'처럼, 혼절할 때까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아니, 도대체 왜?!"

이유야 뻔하긴 했다.

세리아는 흡혈귀의 피를 잇고 있다. 그러니 괴물의 본성을 숨기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의문인 점은 왜 하필 지금이냐는 점이다.

도대체 왜?

여태까지 얌전하던 세리아였다. 심지어 흡혈귀의 혈족을 만났을 때도 폭주할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양한 반론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쳤으나.

"죄, 죄송해요. 이안 경……."

울먹이며 고개를 숙이는 황녀를 보고,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그래, 황녀는 피해자였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내 책임이 제일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세리아의 출신을 숨겼다. 일행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리아 본인한테마저도.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솔직히 말해 세리아가 상처를 받을 것이 두려웠고, 그 탓에 일행 사이에 의심의 기색이 번지는 것도 두려웠다.

셀린을 제외하면 진심으로 세리아를 믿고 아끼는 동료는 델핀 선배 정도가 유일했으니까.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어쩌면 의지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내심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머저리 같은 놈.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나는 그저 사죄의 말을 읊는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 잘못입니다. 사실 이 사태는 예측이 가능했는데……."

"아, 아니에요!"

그러나 황녀의 반응은 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고 있었다.

시엔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머리라도 조아릴 기세였다.

“무, 무슨 말씀을… 제가 잘못했어요, 이안 경. 부디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제, 제가 잘못…….”

부들부들 떨며 혼자 읊조리는 소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목격자가 부친과 큰할아버지라면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그렇게 나는 검공과 진솔한 대화를 마친 후에야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도리어 머리를 식힐 기회를 얻었던 덕이었다. 정작 이 상황을 돌파할 수단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세리아는 새로운 변수가 되었다. 당장 어디로 떠났는지 알 수도 없는 마당에, 나는 세리아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바로 그때 찾아온 인물이 있었다.

알펜하우저의 태양이라 불리는 여인, 알펜하우저의 명망 높은 쌍둥이 중 하나인 시에네 알펜하우저.

"오랜만이네요, 손도끼 바보바보 경. 오늘은 특별히 지난 번의 무례를 용서하고, 좀 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끄엑."

그리고 빡, 하고.

시원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가격해 기절시킨 사내가 또 하나.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마치 대자연이 심혈을 기울여 닦은 물줄기와 같았고, 열정으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보석과도 같았다.

그리고 여리여리한 얼굴과 달리 내실 있게 단련된 근육질의 몸까지.

얼핏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사내는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안 경, 나와 대화를 좀 해볼까?"

제국의 제1황자 빌테온.

흡혈귀와 최후 결전을 나누기 전, 마지막 조각이 될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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