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6 - 7. 질투는 나의 힘(66)
제1황자 빌테온.
어린 시절부터 호탕한 성미로 유명한 사내였다. 더불어 그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소문도 드높았다.
축복받은 혈통을 이은 용의 자손들은 대개 외모가 미려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뛰어난 외모를 지닌 이들이 셋 있다고 전해지니, 그중 하나가 바로 제1황자 빌테온이었다.
참고로 나머지 둘은 제2황녀 아이리스와 제5황녀 시엔이었다. 두 사람의 미모를 떠올려 보았을 때, ‘빌테온’의 인물이 얼마나 훤칠할지는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아마 살면서 울린 여자만으로 수레 몇 대는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막 실감하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하겠나?”
아카데미 외곽에 마련된 정원이었다.
계절마다 흐드러지도록 피는 꽃으로 가득 차는 장소였다. 꽃 냄새에 이끌리는 나비처럼, 삼삼오오 짝을 이룬 여인들과 연인들이 찾아오는 명소이기도 했다.
그만큼 인적이 끊기는 날이 없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한산했다.
빌테온이 딱히 권력을 써서 쫓아냈다기보다는, 재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은 결과였다. 최근 흡혈귀에 대한 소문으로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정원 곳곳에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이처럼 흉물스러운 공간을 짬을 내어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
소수의 기인(奇人)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설마 그 예외적인 사례 중 하나가 제국의 유력 황위 계승자일 줄이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빌테온 전하. 최근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워낙 많은지라… 대낮부터 술을 즐길 여유는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과연 제국의 신성 중 하나라 할 만하군. 내가 술을 권하면, 대부분은 못 이기는 척 한 잔 들던데 말이야.”
칭찬인지, 조롱인지.
나는 도저히 빌테온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정치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기도 했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제 본심을 숨긴다.
그래야만 아랫사람들이 행동거지를 조심하기 때문이었다. 본심을 말하든, 숨기든 간에 권력이 두려운 이들이라면 그들의 속내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여러모로 피곤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천상 무인이었다. 혀보다 검을 휘두르는 편을 더욱 선호한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눈치 없는 인간이 권력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숨김없는 진심을 드러내기.
어쭙잖은 잔기술보다야, 몇 배는 훌륭한 작전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하. 저로서는 왜 하필 이 시점에 저를 찾아오셨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당장 폐하께서도 제도로 귀환하시는 비상사태 아닙니까? 아이리스 황녀 전하와의 경쟁은 이제 어찌되어도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닌지…….”
“내 여동생이 경을 무척 따른다고 들었네.”
‘여동생’이라.
‘제1황자’라는 칭호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빌테온은 황제의 장남이었다. 당연히 여동생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몇 명이든 존재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나를 따르는 인물은 오직 한 명뿐이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레 반문했다.
“……시엔 전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엔. 내 귀여운 여동생… 안타깝게도 나도 무척 바쁜 몸이라서 말일세. 기회가 닿은 김에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네. 그래도 안 되겠나?”
그 담백한 설명에, 내 입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그 심정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만일 리아가 어느 남자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하면, 나 또한 오빠로서 다양한 의미의 면담을 진행할 용의가 있었다.
주로 내가 자신 있는 분야에서.
검이라든가, 손도끼라든가.
대화할 수단은 차고도 넘쳤다.
이쯤 되니 나도 마냥 대담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빌테온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술잔까지 맞부딪힐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잔을 내밀 기미를 보이지 않자, 빌테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제 손에 들린 잔을 망설임 없이 꺾어 술을 들이키기까지.
크으, 하는 탄성과 함께 사내의 소매가 제 입가를 훔치고 지나갔다.
어느덧 떠오른 미소는 어딘가 울적해 보이기도 했다.
까닭 모를 고소(苦笑)였다. 술의 잔향 탓일지, 어떨지.
그마저도 한순간에 불과했다. 이내 빌테온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도 그대가 얼마나 막중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용무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실의 비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망설임 없이 내뱉어진 본론이었다.
나는 허를 찔렸다는 듯 한동안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야 아이리스 황녀에게 진상을 들은 적은 있지만, 빌테온이 이를 신경 쓰는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보았던 적이 있던가.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는 유독 빌테온을 향한 경계심을 드러내곤 했다. 여태까지는 주군의 경쟁자를 향한 경계심 정도로 해석해 왔으나, 막상 빌테온을 마주하니 어떠한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면?
권력의 아귀다툼에서 적의는 칼날과 같았다. 아무리 정적을 겨누고 있더라도, 치밀하게 숨겨야 불의의 순간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모르고 있을 이들이 아니었다. 알펜하우저의 쌍둥이와, 아이리스 황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빌테온에게 거부감을 드러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담은 시선에도 빌테온은 흐, 하고 옅은 웃음을 삼킬 따름이었다.
“반응을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로군. 아이리스, 그 아이가 말해 주던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기밀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황자 전하 앞이라도…….”
“후후, 재미있군. 설마 내가 황실의 비원에 대해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당연히 빌테온도 알고 있겠지만, 기밀은 기밀인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괜히 앞장 서서 떠들 필요는 없으리라.
이처럼 완고한 내 태도에 빌테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좋아, 원칙을 지키는 걸 탓할 수는 없지… 그럼 질문을 바꾸겠네. 자네는 시엔을 어떻게 생각하지?”
“상냥하고 사려 깊은 후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엔의 ‘눈’에 대해서는?”
벌써 두 번째.
나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내심 빌테온의 평가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제1황자는 의외로 거침 없는 성격이었다.
직설적인 물음이 도리어 대답을 궁하게 만들었다. 내가 또 다시 머뭇거리자, 빌테온은 빈 술잔을 채우며 느닷없는 옛 이야기를 꺼냈다.
“내게는 형제자매가 많지만, 유독 시엔이 내 마음에 걸리더군. 왠 줄 아나?”
“예쁘니까?”
무심코 내뱉은 반문이었다.
말하고 나서 아차,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무엇보다 내 농담을 들은 빌테온의 반응이 나쁘지 않기도 했다.
푸흐흐,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버니라면 마땅히 이래야 했다. 일단 여동생을 칭찬해서 나쁜 소리를 들을 걱정은 없으리라.
“경이 보기에도 그런가? 나는 내 여동생이라 마냥 예뻐 보이는 줄 알았는데, 자네도 그렇다니 다행이네… 다만 그 말은 반만 맞았어.”
술잔을 슬쩍 흔들면서, 유리잔을 응시하는 빌테온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겪은 세월의 농도가 다른 탓이리라.
“시엔은 몸집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거든. 제국의 제5황녀이자, 용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딸…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지만, 글쎄. 나는 시엔이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더군.”
“’무리’라 하심은……?”
“아직 덜 자랐단 말이지.”
톡, 톡.
빌테온은 그렇게 말하면서 제 두개골을 엄지로 두어 차례 두드렸다.
“시엔의 성장은 어린 시절에 멈춰 있어. 그때 인생의 쓴맛을 너무 많이 봤다고 해야 할까? 불신을 갑옷처럼 두르고, 세상을 비웃어서 제 마음을 보호하려는 거야.”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면은 겁쟁이던 시절 그대로인 채고.”
그리고 또 다시 자취를 감추는 술 한 잔.
안주도 없는데 잘도 들이킨다 싶을 정도였다.
“아이리스는 시엔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 나름대로 시엔이 자길 닮았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가 과해. 시엔은 아직 대마녀의 제자가 될 그릇이 아니야. 황실의 비원을 이루어 줄 인재는 더더욱 아니고.”
“’용의 눈’ 때문입니까?”
오랜만에 내뱉은 의문이었다.
그러자 빌테온의 시선이 슬쩍 내게 향했다. 보충 설명을 요구한다는 뜻이겠지.
“아이리스 전하께서 기대를 품는 까닭, 그게 혹시 ‘용의 눈’과 관련이 있을까 싶어서요.”
“낡은 전설이지.”
짤막한 단언.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듯, 빌테온은 무심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