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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67)화 (567/649)

Chapter 567 - 7. 질투는 나의 힘(67)

“용의 피를 이은 자가, 황실의 오랜 비원을 이룬다… 아이리스는 이 진위 여부도 불분명한 예언에 미쳐 있는 거야. ‘황실의 비원’? 그딴 미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하다니…….”

“빌테온 전하께서는 황실의 비원을 이룰 생각이 딱히 없어 보이십니다.”

“노골적으로 말해도 되겠나?”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빌테온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리스의 꿈은 시대착오적이야. 마스터를 양산해서, 변수를 최대한 줄이겠다고? 명분에 불과할 뿐이지. 수천, 수만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죽여서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그렇게 읊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은은한 분노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잔잔하던 낯빛을 날 선 조소가 찌른다.

“그따위 피투성이 영광의 시대는 끝났어. 인류끼리 다투고 있을 단계는 이미 지났단 말이야… 아직 ‘마수’라는 공통의 적이 남아있는데, 또 다시 대륙을 피로 물들여 무얼 이루겠다는 건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쯧, 하고 혀를 찬 빌테온은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이윽고 술잔이 차자, 즉시 들이키는 호쾌한 음주 방식.

여러모로 호방한 사내였다.

“하물며 그 도구로 제 여동생을 삼아? 시엔은 아직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 할 나이야. 그러니 나는, 경이 시엔을 잘 보필해 주었으면 하네.:”

말을 끝맺은 사내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슬슬 자리를 파하자는 신호였다. 어차피 나야 할 일이 많았으니, 반가운 제안이긴 했다.

그럼에도 내가 묘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

이는 빌테온과의 만남이 의외로 유익했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을 터였다. 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인물이었는데,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니 느끼는 바가 많았다.

어째서 아이리스 황녀가 유독 빌테온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빌테온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아이리스 황녀와 정반대의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어떤 지적 존재가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도록 갈라놓기라도 한 듯이.

다만 내게는 아직 털어내지 못한 의문이 하나 존재했다.

“그럼, 시엔 전하께선 대마녀의 제자가 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나는 지금껏 시엔을 대마녀의 제자로 만들 생각만 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의 비전을 배울 기회가 아닌가.

나로서는 최대한 시엔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니.

이러한 관점은 처음 들어본 터라, 좀 더 빌테온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빌테온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그는 조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페르쿠스, 그거 아나? 용의 피를 타고난 자는,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작별 인사.

뒤돈 사내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잔향처럼 사내의 흔적을 남겼다.

“용이 되거나, 인간이 되거나.”

이윽고 나를 향하는 푸른 눈동자.

맑고 맑았다. 혹시 내가 깨끗한 호수를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시엔이 인간이 되었으면 하네… 용은 행복할 수 없거든.”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색채를 잃은 정원 위에는 나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이제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술병처럼, 덩그러니 놓인 내 눈동자 또한 텅 비어 있으리라.

그렇게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빌테온이 남긴 술병을 낚아 채, 내 몫으로 남아 있던 술잔에 콸콸 부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따르자 반쯤 차오르는 잔.

나는 그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너무나도.

**

세월은 자연재해와 같았다.

아무리 바라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비극은 반드시 당도한다. 폭풍을 앞둔 아카데미는 벌써부터 우중충한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다.

황제는 급히 길을 떠난다.

아직 혼란을 염려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카데미는 근시일 내에 학생들도 대피시킬 예정이었다. 아직 몇 가지 난관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

흡혈귀의 저주는 나에 대한 감정을 증폭시킨다.

애정이든, 질투든, 무엇이든 좋았다. 그것은 흡혈귀의 술식을 강화시킬 순수한 재료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처럼 좋은 먹잇감을 흡혈귀가 순순히 놓아줄 턱이 없었다.

집착.

아마도 흡혈귀가 마련한 대책은, 그것이었으리라.

“결국,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카데미를 떠나기를 거부했다는 소리군. 애정은 그렇다 쳐도, 질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집착으로 연결되는 거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던진 의문이었다.

그 발화자는 바로 대마녀, 대륙에 단 셋밖에 없다는 마스터 중 하나였다.

“낸들 아나? 다만 첩보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저주에 걸린 학생들이 묘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는군. 영웅담의 실체를 파헤치겠다나.”

그리고 헛웃음과 함께 그 의문에 답하는 이는 검공.

대마녀와 마찬가지로 삼인의 마스터 중 하나였다.

그는 드디어 소녀의 의체를 벗어던진 뒤였다. 오랜만에 본체를 되찾은 검공은, 소녀일 때와 달리 중후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정작 그 알맹이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대마녀는 검공의 허탈한 어조에도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흥, 하기야… 감정의 증폭 자체가 일종의 최면이나 다름없는 술법이야. 그 과정에 자그마한 암시 하나 심어두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덕분에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군.”

“아카데미의 교원들은 학생들을 지켜야 해.”

묵직한 단언.

별 일 아니라는 듯한 대마녀와 달리, 검공은 무척이나 진지한 기색이었다.

대마녀를 비추는 푸른 눈동자가 점차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못난 조카를 지켜야 하고…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거의 없어졌다는 말이야. 이래도 승산이 있나, 할망구?”

대답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대마녀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들이키고, 내쉬다가.

이윽고 얄따란 웃음을 토해내며 반문했다.

“……없다면?”

“후일을 도모해야겠지.”

“이토록 공 들인 계획인데, 설마 내가 도망친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으려고?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아카데미의 젊은이들은 싸그리 암흑교단의 제물이 되는 거야.”

“아카데미에 남은 놈들은 강제로라도 내보내면 돼..”

“그러니까, 흡혈귀가 그 정도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을 거냐고 묻잖냐.”

그제야 검공은 할 말이 궁해졌는지 끄응, 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안색을 지우지는 못한 채로.

“피난을 떠날 인원이 많아질수록 빈틈은 더욱 커지지. 흡혈귀쯤 되는 술자라면, 당연히 그 정도 대비책을 해두었을 거야.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하지만, 가망 없는 싸움보다는 낫잖소!”

어느새 검공의 말투는 다시 공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마도 예전부터 대마녀를 상대할 때 써 오던 말투겠지. 오랜 버릇을 단숨에 저버리기는 힘들 터였다.

“상대는 주술의 힘을 빌린 괴물이오! 그런데 제 실력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마스터 하나에, 하이 익스퍼트 하나라? 일단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둘 다 목숨을 건지고 봐야……!”

“검공 어르신.”

그 사무치는 애원을 끊어 낸 쪽은, 대마녀가 아닌 나였다.

침묵을 깬 내 목소리는 단단하고 묵직했다.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으리란 사실을 증명하듯이.

“셀린과 세리아의 행방도 모르는 마당입니다. 제가 이 전투에서 도망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

내게는 도망칠 곳이 남아 있지 못했다.

당장 셀린은 납치된 뒤 행방이 묘연해진 뒤였고, 세리아 또한 시엔의 피를 빨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내게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설령 죽더라도 뒷걸음질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검공 또한 내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나를 말리고 싶은데,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대마녀는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 어차피 떠날 놈이 말이 많구나. 그러는 너야말로 우리를 버리고 가는 입장이 아니더냐?”

“아니, 그건… 사정이 있으니까……!”

검공은 대마녀의 지적에 격렬한 저항을 보였다. 그 또한 떠나고 싶지 않았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바로 그 점이 대마녀의 장난기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지만.

“쯧쯧, 아쉽구나. 아쉬워… 못해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만 더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최소한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곳을 찾아서, 결계의 거점을 파괴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정도만.”

결국 검공은 이어지는 대마녀의 한탄에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지점.

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각이 필수적이었다. 흡혈귀는 수백 년 동안 살아 온 우수한 술자였고, 정교한 술식은 낌새를 눈치 채기가 무척 힘들었다.

나조차도 자칫하면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로.

그만한 인재는 대륙 첩보부에서도 드물었다. 최소한 검공이 대체 인력을 당장 구해 오지는 못할 정도는.

이변은 바로 그때 일어났다.

“그, 저…….”

자그마한 목소리.

망설임에 가득 찬 두 음절이 우리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진원지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이 공간의 주인이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난데없이 난상토론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사실 황녀가 집중치료를 받고 있던 병실이었다. 병문안을 온 우리 세 사람이 어쩌다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을 뿐.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시엔은 한참이나 높은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침묵을 깬 것이다.

우리의 이목이 집중되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소녀는 집중되는 시선에 긴장한 듯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살짝 움츠러든 몸이 안쓰러웠으나, 시엔은 장하게도 결의를 다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정도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제 눈, 특별하거든요!”

다만 그 내용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터라.

우리 셋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하나같이 얼이 빠진 눈빛이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혹은 바로 앞에서.

습격은 바로 다음날 시작되었다.

**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깊숙한 지하.

셀린은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열었다.

"안녕."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은, 언제나 하나뿐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싱긋 미소 지은 여인이 눈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

숨이 막히도록 매력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이.

셀린은 이 자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악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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