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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68)화 (568/649)

Chapter 568 - 7. 질투는 나의 힘(68)

그날, 셀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밀실에 갇혀 있었다.

애벌레의 삶과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일상.

땅 밑에 박혀 있다는 점조차 똑같았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잃어 버린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셀린은 단 한 번도 볼멘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지루한 일상에 안심까지 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벌레 같은 인간이, 벌레 같은 삶을 지속한다. 어찌 이 지당한 명제에 불만을 가지겠는가.

셀린의 마음은 그토록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햇빛마저 드문 감옥 안, 감각은 점차 흐릿해지고 최근에는 이안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이처럼 비루한 신세의 소녀에게 말을 걸 만한 존재는, 오직 하나뿐.

“쓸쓸해 보이네.”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고저 없이 평탄한 어조에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을 뿐이라는 듯, 담백한 어미는 여운조차 없이 깔끔했다.

늘 듣던 속삭임인가.

그렇게 판단하고 귀를 틀어막으려던 셀린이 멈칫했을 만큼.

깜짝 놀란 황갈색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낯선 소리에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이는 모습까지, 지하에 사는 생물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타인의 내방이 한없이 낯설었다.

이안도 떠난 지 오래됐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이러한 사고가 정지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안녕, 셀린 하스터.”

어둠 속에서 핏빛 눈동자가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홍옥을 빼다 박아도 이처럼 영롱한 빛을 품지는 못할 터였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감탄을 유도할 만했다.

무엇보다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

맑고, 싸늘하다. 여인의 목소리는 그처럼 상반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진홍빛 눈동자는 너무 투명해서 도리어 그 바닥이 비치지 않았다. 짧은 인사와 함께 셀린을 향한 시선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호의? 적의?

혹은 단순한 호기심인가.

셀린은 당장이라도 홀려 버릴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매력적이라서, 그래서 더욱 눈앞의 여인이 무서웠다.

끝이다.

이 여자한테 빠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결단코 헤어 나올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셀린의 척추를 관통했다.

마치 달군 쇠꼬챙이처럼 강렬하게.

그래서 셀린은 의문을 짜내고 말았다.

“누, 누구야.”

더듬거리는 음색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당혹감과 공포가 어우러진 눈빛이 핏빛 동공 위로 맺혔다.

질문을 마주한 여인은 인내심이 깊었다. 대답 대신, 그녀는 셀린이 마음을 추스르고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니까.

“어떻게 들어왔지? 너도 환상이야?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그 망할 여자처럼…….”

“환상이라.”

중대한 문제를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이, 여인은 제 입술에 검지를 얹었다.

그 자그마한 손짓조차 지독히도 매력적이었다. 여인은 몇 번 인가 제 입술을 두드리다가, 이내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꼬리를 휘면서.

“환상이라면 환상이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너희들이 믿는다는 천신처럼.”

‘신’이라니.

건방지다 못해 광오(狂傲)한 표현에 셀린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피식거리는 웃음은 새어 나오지 못했다.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어이가 없어서?

아니었다.

내심 셀린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신앙심 따위, 그다지 깊지도 않았으니까.

여인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낯빛으로 말했다.

“환상이라 생각하면 없고, 실존한다고 믿는다면 존재하지… 그래서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거야.”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여인은 셀린의 의문에 답해 주는 척하면서, 정작 제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다. 이러한 선문답이나 하고 있을 만큼 셀린은 여유가 넘치지 못했다.

단지 적의가 가득 담긴 의문을 던졌을 뿐.

“그래서 결국 네가 누군데?”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돼.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러면서 여인은 제 가냘픈 손길을 움직였다. 셀린의 팔다리와 연결된 쇠사슬을 향해서.

이안의 요청에 따라 쇠사슬의 길이는 넉넉할 만큼 길었다. 최소한 셀린이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느낄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셀린이 한나절의 대부분을 웅크려 지내는 탓도 있긴 했지만.

하지만 쇠사슬의 강도는 진짜였다.

셀린은 이미 암흑교단에 의해 조종당한 적이 있는 몸이었다.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위험 요소를 방치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셀린을 감옥 안에 묶어두고 있는 구속구의 내구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듣기로는 마력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했던가.

그래서 셀린은 헛웃음을 삼키며 한 마디를 내뱉으려 했다.

“그만 둬, 어차피 완력으로 부술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그때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셀린의 손목이 자유를 되찾은 것은.

얼떨떨해진 소녀의 시선이 제 손목을 향했다. 그 수법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어느덧 소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금속 덩어리는 반토막이 나 땅을 구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제국 첩보부가 사용하는 구속구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물건이라 들었다. 심지어 마스터조차 이를 벗겨 내려면 몇 초 정도는 고생해야 할 거라고.

멍하니 과거를 더듬고 있던 소녀의 귓가에, 고혹적인 목소리가 와 닿는다.

“……기적을 믿어?”

그 한 마디가 신호탄이었다.

셀린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전율을 느꼈다. 고작해야 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는 아니었다.

실체를 가지고 있구나.

그 사실이 셀린의 심장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을 만큼 초조한 심정이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맸다. 흠칫 굳은 몸뚱어리가 몰라나기 직전, 셀린의 입술이 달싹이며 희미한 신음을 짜냈다.

“당신, 도대체 무슨…….”

“네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어, 셀린 하스터.”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여인은 그렇게 말했다. 뒷짐을 지고 선 여인의 눈꼬리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얼핏 보기에는 자상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운명으로부터 버림 받았지…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던 사내에게도 버림 받겠구나.”

“……닥쳐.”

울컥, 하고 차오르는 적의가 가득 배어 나오는 한 마디였다.

다만 그 속에 숨어 든 한 줌의 망설임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셀린을 내려다보며, 여인은 곧 창밖으로 시야를 옮겼다.

빛조차 제대로 새어 들어오지 않는 감옥, 그 안에 홀로 남은 소녀.

이 비극적인 광경을 앞두고 여인이 무슨 감상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셀린은 온힘을 다해 부정의 말을 짜낼 따름이었으니까.

“네가 뭘 알아? 이안 오빠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날 버릴 리가 없……!”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오랜 친구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듯.

여인은 평탄한 어조로 그렇게 되물었다. 셀린의 말문이 막히는 것은 지당한 결과였다.

살풋 미소를 지은 입술이 달싹인다.

“너를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무어라 반박을 내뱉기도 전이었다.

다시 무릎을 꿇은 여인은 정성스레 셀린과 눈을 마주치면서, 마치 섬세한 세공품을 대하듯 부드럽게 셀린의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신이 사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거든.”

그것이 끝.

셀린의 시야가 일순 맹렬히 흔들리며, 이내 번잡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파묻어 두었던 기억들이었다.

알펜하우저의 달턴, 쓰러진 아버지, 그리고 금광.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에 들려오는 속삭임이 하나 있었다.

“좋은 꿈 꾸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셀린은 끝없는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는 꿈을.

그럼에도 셀린은 버티고 버텼다. 이를 악물고, 눈에 핏발을 세워 가면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더는 이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이안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날부터 셀린을 괴롭히던 악몽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헐떡이며 눈을 뜨면, 여인의 시선이 머나먼 곳을 향하고 있을 때가 늘기도 했다.

그 까닭을, 셀린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바람에서 피 냄새가 나고 있었으니까.

모든 이야기가 끝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뭇 강물이 바다로 모이듯이.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그날 아침은 무언가 소란스러웠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랬고, 지저귀는 새 소리가 그랬다. 이러한 감상을 공유하자 내 옆의 소녀는 기나긴 하품을 내쉬었다.

이윽고 시큰둥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눈을 비비적거리는 꼴이, 꽤나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바보냐? 멀쩡하던 세상이 왜 갑자기 소란스러워져. 소란스러운 건, 어디까지나 네 마음뿐이겠지.”

의외로 현학적인 답변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나는 곧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연륜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단 말인가.

내 옆에 선 소녀의 이름은 ‘엘시 라이넬라’였다.

다만, 내가 알던 ‘엘시 선배’가 아니라 몇 년 뒤인지도 모를 미래에서 온 존재일 뿐.

사실 이제 ‘미래’도 아니었다. 이미 시간선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더는 소녀가 지내던 ‘미래’가 다가올 리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보다 몇 년의 세월을 더 보낸 여인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조언을 건네 주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자그마한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네요. 그래서 잠을 주무시지 못한 거군요.”

“……뭐?”

엘시 선배는 무슨 뜻이냐는 뜻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소녀의 눈동자는 충혈되어 더욱 사나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굴할 내가 아니었다.

“그토록 만나던 재회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첫사랑한테 차이고,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실지…….”

이윽고 엘시 선배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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