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9 - 7. 질투는 나의 힘(69)
“아니, 이 씹새끼가?”
정곡을 찔린 탓일까.
엘시 선배는 곧장 자세를 낮추며 내게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일 꼬리가 있었다면 경계의 의미로 빳빳이 치켜들기라도 했을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여인의 분노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시 선배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힘을 탁 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짤막한 반문이었으나, 이보다 더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 질문은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 반론을 입에 담으려 들었다.
“제가 뭘……!”
“너도 차였구나? 이 몸뚱어리가 아직 내 차지인 걸 보면.”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결국 한동안 우물거리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였다.
나는 엘시 선배의 설득에 실패했다. 그것이 내 무의식이 불러낸 환상인지, 혹은 진짜로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도피한 내 약혼자의 인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쫓겨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내 내 표정은 장마철의 하늘처럼 우중충해지고 말았다. 이는 엘시 선배도 예외는 아니라서, 우리 둘이 선 자리는 실연한 남녀 특유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상처뿐인 싸움이었다.
더욱이 무거운 공기를 연출하는 인물은 하나가 더 있었다.
“하,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슈, 흐윽!”
그 자그마한 신음 소리에, 나와 엘시 선배의 시선이 동시에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명백히 긴장한 낯빛으로 혼잣말을 되뇌이고 있던 시엔이 서 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빛이 그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끝내는 제 혀를 살짝 깨물기까지.
한때의 세리아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시엔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지, 제 눈가를 두어 번 소매로 닦아냈다.
이를 본 엘시 선배의 감상은 간단했다.
하, 하는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
“저거, 실전에서 써먹을 수는 있는 거야? 황녀라고 오냐오냐 자란 티가 너무 나는데.”
“예전에 한 번, 실전을 겪어 본 적이 있긴 한데…….”
“그때도 저랬어?”
나는 대답 대신 묵비권을 행사했다.
황녀의 유일한 실전 경험, 그것은 북부에서 벌어졌던 엘프와의 격전이었으니까.
그때 황녀는 헛구역질을 하느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황녀를 대체할 만한 인재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엘시 선배의 눈은 더욱 가늘어졌다. 그 이겨내지 못한 나는, 결국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수가 없잖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었다.
흡혈귀는 아카데미 곳곳에 결계의 핵을 설치해 두었다. 이전에 흡혈귀와 마주쳤을 때와 같이, 이 결계를 파훼하지 못하면 승산은 없었다.
그 ‘검공’조차 흡혈귀와 백중지세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셋 이상의 인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마녀는 흡혈귀를 견제해야 했고, 결국 남은 인재는 단 셋뿐.
나와 엘시 선배, 그리고 ‘용의 눈’을 지닌 황녀뿐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남자친구에게 차여 심성이 배배 꼬여 버린 엘시 선배조차 한 마디 반박이 없었다. 단지 엘시 선배는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으며 한탄을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좆됐다, 진짜…….”
의외로 엘시 선배의 절망은 길지 않았다.
딱, 하고 울려 퍼지는 경쾌한 타격음.
“아악!”
곧이어 엘시 선배는 제 정수리를 움켜 쥐며 짤막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고깔 모자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으니, 지당한 반응이었다.
다만 인상 깊은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엘시 선배의 머리를 강타한 흉기였다.
곰방대.
매캐한 약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러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만한 인물은 아카데미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 ‘대마녀’.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을 한 절대자가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쯧쯧,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좀 더 언어를 정제하지 못하겠느냐?”
그 지엄한 꾸중에 누구라고 반항할 수 있을까.
담이 크다 못해 부은 인물만이 시도라도 해볼 만 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엘시 선배는 드물게도 그 조건을 충족하는 이 중 하나였다.
“하, 할망구가 무슨 상관……!”
물론 그조차도 한계는 있었지만 말이다.
대마녀의 시선이 그새 매서워지자, 이내 엘시 선배는 우물거리며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몇 년이나 대마녀의 제자로 있었던 몸이었으니, 스승에게 목소리를 높이기는 힘들겠지.
그렇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한 대마녀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자자, 너무 우는 소리 하지들 말거라. 어차피 우리가 막지 못하면 수만 명이 죽고 다칠 텐데, 시도라도 해보는 게 어디냐?”
“그것 참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내 한숨 섞인 목소리에도, 대마녀는 ‘그렇지?’하고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릴 따름이었다.
뒤이어 대마녀의 뜻 모를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왜, 그렇게 가망이 없어 보이더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제 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나는 그 한 마디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고 있었나. 하기야, 대마녀가 작정하고 내 동향을 파악하려 든다면 막을 수단은 전무했다.
대마녀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났느냐?”
어차피 속일 수도 없는 상대였다.
일순 망설이던 내 입에서 진실이 줄줄이 토해졌다.
“북부에 남은 델핀 선배와, 공방에서 엠마를 조금…….”
“무얼 꾸미고 있지?”
재차 침묵.
내가 애써 시선을 피하자, 대마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뭐… 사정이 있겠지. 여태껏 기적을 몇 번이나 일으켰다지?”
나는 끝내 믿음직한 대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툭, 하고 다시금 내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가는 자그마한 손바닥.
“……믿으마.”
이제 와서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을 리는 없었다.
다만 나는 대마녀의 그 한 마디가, 어쩐지 묵직한 진심을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겉치레나 어쩔 수 없어서 내뱉은 말이 아니라, 좀 더 깊은 뜻을 지닌.
물론 착각일지도 몰랐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으니.
결국 내가 짜낼 수 있었던 말은, 흔해빠진 변명뿐이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마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내가 무얼 하든 믿고 맡기겠다는 뜻일지도.
다음으로 대마녀가 말을 건 이는, 일행의 막내이자 최대의 약점이었다.
“황녀 시엔.”
“네, 넷! 그, 대, 대마녀 님……?”
홀로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던 소녀의 몸이 화들짝 정자세를 취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신속한 반사 작용이었다.
고작 말을 걸었을 뿐인데도 이 모양이었다. 이 소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는, 속내를 들여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렇게 다시 나와 엘시 선배의 눈빛이 암울해질 찰나.
대마녀는 뜻밖의 말을 건넸다.
“용의 피를 잇고 있다지?”
“그, 그러니까… 그, 그게… 지, 지금은 봉인이 돼서 그렇게까지 강한 힘은 아닌데요…….”
황녀는 특유의 소심증이 도졌는지, 더듬거리듯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끝을 흐릴 무렵에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래봐야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없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대마녀는 시엔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애초에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수백 년 동안 진리를 찾아 헤매던 여인이 나지막한 숨소리를 토해냈다.
“용은 모든 마도의 조상이다.”
마도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비단 마도사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였다. 창세신화와 신마대전, 그리고 용에 관한 설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특히 용은 제국의 건국 설화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황실의 일원으로서 황녀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대마녀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중요한 조언을 건네는 것처럼.
“용은 인간과 달라. 인간은 고작해야 하나의 원소를 다룰 수 있지만,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고 전해지지.”
대마녀가 느닷없이 오래 된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이 무엇일까.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시엔은 무언가 눈치 챘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했다. 여태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대로 잔뜩 부풀어 오른 목소리.
“그, 그럼 혹시 저도……?”
“아니, 안 되겠지. 너는 용이 아니지 않더냐.”
물론 한낱 미몽에 불과한 공상이었다.
대마녀의 단호한 대답에 황녀의 어깨가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낙담하는 모양새가 며칠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식물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마녀는 옅은 웃음을 토해냈다. 마치 놀림감을 앞둔 악동처럼.
다만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한 차례 담배 연기를 내뿜은 여인의 입술이 재차 달싹이기 시작했다.
“너무 낙담 말거라. 그만큼 용의 피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또, 혹시 모르지. 내 제자가 되면 원소 둘이나 셋쯤은 다루게 될지도.”
‘용의 피’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이라.
그러고 보니 미래에서 온 사내도 내게 이러한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용혈 문자의 숨겨진 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시엔도 대마녀의 언급에 귀가 솔깃하기는 마찬가지로 보였다. 다만, 나와 주목하는 부분이 달랐을 뿐.
자그마한 주먹을 움켜 쥔 소녀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제, 제자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으니, 정 궁금하면 저놈한테 물어보거라.”
그 시큰둥한 언질 하나면 충분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소녀가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하기야, 대마녀의 제자가 될 기회는 흔치 않으니.
마법사로서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정작 나는 황녀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빌테온과 나누었던 대화가 자꾸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용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너무나 강해서, 누구에게도 그 곁을 허락할 수 없으니까.
그러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인물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할 터였다.
과연 황녀는 그중 하나가 되고 싶을까?
그렇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 자. 다들 주목.”
짝, 하고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진원지는 대마녀였다. 후우, 하고 내뿜은 담배 연기가 시야를 일순 새하얗게 물들였다.
“우리 작전은 간단하다. 각자 흩어져서, 결계의 핵을 찾아 파괴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흡혈귀를 친다.”
단순하고, 담백하며, 이보다 명료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진작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기에 이제 와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나만이 홀로 손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을 따름이었다.
“세리아나 셀린은 어떻게 합니까? 혹은, 흡혈귀의 권속이 된 학생은?”
“어떻게 하면 좋겠나?”
우묵한 눈빛.
깊이 침잠한 시선은 그 자체로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대마녀의 연녹빛 동공을 마주한 내 몸이 한순간이나마 흠칫 굳었을 만큼.
의도가 무엇일까.
그러나 기왕 내뱉은 말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나는, 이윽고 숨김 없는 본심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