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1 - 7. 질투는 나의 힘(71)
누구에게나 건드려서는 안 될 상처가 있다.
얌전하고 유순한 인물조차도 그렇다. 살다 보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기 마련이며, 이러한 흉터 앞에서 대개의 인간들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이성적으로 대할 수가 없는 사안이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우습기도 했다. 왜 하필 나는 이따위 약점을 지니게 되었을까.
처음으로 지인을 잃을 뻔한 경험이라서?
혹은, 그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엠마의 아버지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거나.
어느 쪽이든 원인을 따져 봐야 무의미했다. 결과는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나는 엠마가 피를 흘리는 것이 싫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서 핏물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무, 슨… 속도가!”
경악에 잠긴 얼굴이 신음과 함께 내 오감 위로 새겨졌다. 방금 전, 나를 도발했던 여인이었던가.
어느덧 팔 한 짝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낙하 각을 그리며 몸통과 사지의 연결을 끊어내는 은빛의 폭포까지.
나는 둔중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홀로 숨을 들이켰다.
마치 얼음물을 들이킨 것만 같다. 뇌의 주름 사이사이를 누비며 냉기를 전달하는 숨결이 내 본능을 바짝 일깨우고 있었다.
우선은 하나.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검이 전조조차 없이 횡으로 꺾여 나갔다. 가슴을 반토막 내는 날카로운 궤적.
여인은 다급히 팔을 곧추 세워 날붙이의 진로를 틀어 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발악에 불과했다.
여인의 팔을 감싸고 오르는 핏빛의 안개.
단단한 고체처럼 화한 그것은, 얼핏 보기에도 우수한 강도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이는 한 줌의 의심조차 비치지 않는 여인의 낯빛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상상 이상의 속도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이가 지을 표정으로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오만이었다.
여인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핏빛 안개는 내 검을 막아 세우지 못했다. 도리어 통째로 잘려 나가,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 최후를 직감하지 못했다.
의기양양한 낯짝을 한 머리가 비스듬히 기울더니, 가슴을 관통하며 지나간 궤적을 따라 미끄럼질을 했을 뿐.
이를 본 흡혈귀의 혈족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니!”
철퍽, 하고 피 웅덩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
물감처럼 튀긴 핏물이 난해한 예술 작품을 닮아 있었다.
정작 이 작품을 감상한 이들은 하나같이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을 내게 보내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어디선가 달구어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감히……!”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맺어지는 일은 없었다.
팍, 하고.
대답 대신 내던진 손도끼가 광선처럼 괴물의 두개골을 터트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이루어진 죽음에 좌중은 일순 숨을 죽이고 말았다.
무수한 눈동자가 내게 묻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당연히 내가 그 해답을 알려줄 리는 없었다. 말없이 손을 치켜들어, 되돌아 오는 손도끼를 받아 들었을 뿐.
흡혈귀의 혈족들도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명확히 나를 노리고 이곳에 찾아왔으며, 따라서 나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수집한 뒤였을 테니까.
내 추측이 입증될 때까지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 오러… 오러에 닿으면 안 돼!”
그 울부짖음에 따라 적들의 시선이 단숨에 내 검과 손도끼를 향했다.
은은히 흐르고 있는 은빛의 오러는 마치 별빛이나 불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밀도가 높아질수록 결정화하는 대개의 오러와 명백히 다른 형상.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기술은 많지 않았다.
특히, 내가 쓰고 있다면 더더욱.
송곳처럼 나를 찌르던 눈빛에 담긴 적의가 더더욱 매서워졌다.
“비전절기 해(解), 그 좀도둑 마녀의 비전을……!”
“맞서는 대신 회피해!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올바른 판단이었다.
비전절기 해(解)는 오직 오러에 닿은 마력만을 흩어버린다. 애시당초 회피를 해 버린다면 이에 당할 리는 없었다.
단, 내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을 때에 한정해서.
흡혈귀의 혈족들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순식간에 둘이나 되는 자매를 잃고 당황한 탓에, 내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는 실수를.
하아, 하아, 하아.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과 함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희미했던 호흡이 점차 명확해지고, 두개골을 타고 고막을 웅웅거릴 지경이 되었을 때.
온 세상에 잿빛이 내려앉았다.
만물은 색조를 빼앗긴 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지한 시간 속에서, 흡혈귀의 혈족들은 제각각의 무기를 꺼내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멈춘 세상에서 내게 허락된 시간은 단 몇 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지나치다시피 많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에게는.
그리고 세상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아악!”
팍, 팍, 팍!
연달아 골통이 터져 나가며 피분수를 뿜었다. 팔과 다리가 허공을 비산하고, 빛과 같은 잔상들이 기나긴 궤적을 남기며 곳곳을 누빈다.
말 그대로 순식간.
순서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동시에 피보라가 몰아쳤다. 설령 이를 예지하고 있었더라도 죽음을 피해 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멈춘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자 수십이나 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이처럼 일방적으로 밀릴 줄은 몰랐다는 기색이었다.
몇몇은 흠칫 굳어 버린 시선으로 뒤를 힐끔힐끔 바라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도주로를 탐색하는 모양이었는데, 내가 이를 두고 볼 리가.
전장에서 한 눈을 판 대가는 언제나 같았다.
팍, 하고 다시 한 번 피와 살점이 비산했다. 나는 이제 손도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오직 숨을 죽이고, 다시 한 번 자세를 살짝 낮췄을 뿐.
일종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단숨에 반절 이상의 전력을 잃어 버린 혈족들은, 내 행동에 과민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발악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터트린다든가.
“틈을 주면 안 돼! 오러 특성이 발현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 알려진 것보다 짧……!”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새하얀 질주.
어느덧 날붙이는 울부짖는 여인을 관통하고 있었고, 일필휘지로 내뻗어진 검의 궤적은 이윽고 핏빛으로 물들었다.
철푸덕, 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
자매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여인의 몸뚱어리가 내뱉은 단말마였다. 눈 깜짝할 새 여인을 지나친 나는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무리해서 오러의 힘을 끌어낸 대가였다.
내가 정지한 시간에 머물기 위해서는 몇 초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단촉해 가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글쎄.
지금 내 뇌리를 물들이고 있는 것은 강렬한 적의뿐이었다. 눈앞의 적들을 모조리 도륙해야만 한다는, 그래서 내장을 쏟으며 쓰러진 엠마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자꾸만 움츠러드는 근육을 일깨웠다.
일순 무릎이 꺾일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참아냈다. 핏빛의 송곳과 채찍, 창이 동시에 날아들고 손톱을 세운 채 내게 달려드는 여인들도 보였다.
최선의 수는 ‘해(解)’를 통해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빈틈을 노려 다시금 시간을 멈추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내 몸은 이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내 검에는 눈이 멀 만큼 찬란한 은빛의 결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비전절기, 결(結).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빛의 칼날이, 단련된 검사의 온힘을 받아 휘둘러졌다.
캉!
불꽃과 함께 핏빛의 무구들이 하늘을 향한다. 비록 검으로 쳐내지 못한 몇몇 공세들이 살갗을 찢으며 지나가기는 했지만, 내가 얻은 이득은 그 이상이었다.
당장 내 앞에 선 여인의 낯가죽이 형편없이 구겨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미친……!”
그러다 팍, 하고 여인의 뒤통수에 틀어박히는 날붙이가 하나.
방금 전에 내던진 손도끼였다. 나는 더는 돌려세울 수 없는 검을 그대로 놓아 버리고, 절명한 여인의 두개골에서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내게 달려들던 흡혈귀의 혈족들은 아직 자세를 되찾지 못한 채였다. 텅 빈 품 안을 노리는 것은, 숙련된 전사에게 너무나 간단한 일.
푹, 팍, 퍽!
손도끼로 찍고, 베고, 때로는 턱주가리를 날리면서 나는 단숨에 포위를 돌파했다.
그렇게 팔다리에 상처를 입어 가며 길길이 날뛰기를 몇 분.
어느새 내 앞에는 무수한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흡혈귀의 혈족은 주저앉은 채로, 허겁지겁 엉덩이를 뒤로 끌고 있었다.
“어, 어머니께 알려야… 끄아아아아악!”
물론 도주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내가 투척한 검에 허벅지가 꿰뚫린 여인의 입에서 비명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화들짝 놀란 몸뚱어리가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말뚝처럼 틀어박힌 검이 희생양이 놓아줄 리는 없었다.
내 발걸음이 저벅저벅 이어진다. 팔과 다리에 찰과상과 관통상을 비롯한 부상이 여럿, 다만 중상은 아니라서 아직 몸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나는 핏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는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동자에서는,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경악, 공포, 의혹, 그리고 절망.
여인은 마지막 남은 용기를 짜내어 내게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희가 내게 했던 짓.”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저앉듯 털썩 무릎을 굽혔다. 그럼에도 여인과 나의 눈높이 차는 현격해서, 여전히 여인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아야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려고 했던 짓…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고, 죽이려 했잖아?”
나지막하게 내뱉은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스산하다시피 가라앉은 음색, 한 줌의 온기마저 소실된 피투성이의 낯짝.
이러한 몰골의 나를 마주한 여인은 경기라도 일으킬 듯이 굴기 시작했다.
“그, 그딴 걸 묻는 게 아니잖아! 도대체, 어떻게… 무슨 짓을 해서 단기간에 그렇게 성장한 거냐고!”
그리고 침묵.
나는 한동안 여인에게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여인은 주저앉은 자리에서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짜내고 있었으니까.
“정보와 너무 다르잖아…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시간을 정지시킬 때까지는 준비가 필요하고, 결과 해의 완성도도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네가 우리 모두를 속인 거야……!”
“결계의 핵.”
짤막한 반문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덜어낸 목소리는 도리어 더 묵직한 감이 있어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여인의 발작을 진정시키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내 입에서 재차 의문이 뱉어졌다.
“어디에 있지? 그리고 몇 곳이나 있는 거야?”
“내, 내가 말해줄 것 같… 꺄아아아악!”
콰직, 하고 손도끼가 가녀린 손가락을 으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설임조차 없는 손짓.
이처럼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도, 내 목소리는 지극히 평탄하기만 했다.
“피차 시간 낭비할 이유가 있을까? 어서 말하고 편해지는 편이, 네게도 좋을 텐데.”
“마, 말 안 한다니까…….”
울먹이며 내뱉은 반론에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야말로 일순간.
이윽고 내 손도끼가 다시 한 번 살과 뼈를 으깨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여인의 비명 소리와 함께.
“끄으, 으… 끄아아아아아악!”
“그건 보면 알겠지.”
아직 시간은, 조금이지만 남아 있었으니까.
비명과 핏물이 이어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