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2 - 7. 질투는 나의 힘(72)
심문은 길지 않았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못했고, 따라서 내 손도끼는 무자비할 만큼 핏빛 춤을 추어야 했다. 여인의 사지가 모조리 으깨질 때까지는 단 몇 분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불행히도 여인의 각오가 진짜라는 것.
흡혈귀의 혈족들은 끈끈한 가족애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문을 가할 때마다 여인은 비명을 내지르고, 끝내는 애원하기까지 했으나 그 입에서 유의미한 정보가 토해지는 일은 없었다.
귀찮게도.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도 한계는 존재한다. 지속적인 출혈과 도를 넘는 통증으로 피폐해진 심신은, 이제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움찔거리며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 더는 내가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등을 돌리기 직전.
“크흐, 크흐흐… 저, 절대로… 끄윽, 절대로 이길 수 없을걸…….”
희미한 음량의 저주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한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끝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구겨지던 여인의 낯가죽은 제대로 된 미소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단지 파르르 경련하며 호선 비스무리한 것을 머금었을 뿐.
그럼에도 여인은 어떻게든 나를 비웃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너, 너 말이야… 그 며칠새 무슨 짓을 했구나. 나는 알아… 끄흐. 나도, 한때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무슨 선택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네 꼴을 보니 그 끝이 짐작이 가는걸……?”
그 말을 들은 내 눈이 슬쩍 측면을 향했다.
흥건한 핏빛 웅덩이 사이로 내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 안에서도 유독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색조가 하나.
피로에 젖은 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끄흐, 크흐, 크흐흐흣! 그래, 대가… 대가 없는 힘은 없지… 편법에는 반드시 값이 필요해… 너도 곧 치르게 되겠구나.”
“의외로 오지랖이 넓군.”
“어찌 보면, 너도 나와 동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흡혈귀의 혈족은 쿨럭이며 핏물을 한 줌 토해냈다.
그 눈동자에 머물고 있던 빛이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는 눈은, 아마도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일 테지.
그녀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끝없이 이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기지 못해… 너는 진짜배기 혈족의 힘을 몰라… ‘어머니’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너를 이곳에 붙잡아 둔 이상, 우리의 목표는 이미 달성……!”
콱, 하고.
날아든 손도끼가 여인의 이마에 움푹 틀어박혔다. 그러지 않아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으니, 여인의 절명은 필연이었다.
손도끼는 다시 휘리릭 돌아 내 손으로 되돌아왔다. 피로에 절어 있던 내 정신이 맑아진 것은 그 직후였다.
그러고 보니, 엠마는?
벼락이라도 치는 듯한 충격. 화들짝 놀란 내 몸이 벼락같이 쏘아졌다.
목적지는 당연히 쓰러진 엠마였다.
내가 응급처치를 했던가? 하도 흥분을 했던지라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헐레벌떡 엎어진 엠마의 몸을 뒤집은 순간.
나는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엠마의 상태는 예상보다 좋아 보였고, 무엇보다 복부에 난 상처가 꽤 아문 뒤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응급처치를 했던 걸까?
이대로라면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중상이니만큼 일상생활에 복귀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후유증은 값비싼 제물을 동원해서라도 치료하면 그만이고.
지금의 나는 몇 만 골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물이었으니까.
내 팔은 이내 엠마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이제 엠마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준 다음, 대마녀와 합류해서 결계의 핵을 찾아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쿡, 하고 문득 뇌리를 찌르는 회상이 하나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너무나 강렬한 통증이었던지라 나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비틀거려야 했다.
적갈빛 머리카락, 등 뒤에 새겨진 문양은 진리와 불로불사의 상징. 불현듯 떠오른 장면 속에서 나는 어째서인지 강렬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의문은 길지 않았다.
[언제까지 멍하니 서 있을 셈이야?]
느닷없이 고막을 때리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흥얼거리는 듯한 그 음색은 청명하고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끈적하고 고혹적인 면이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 미간이 좁아졌다.
이 목소리의 주인쯤이야, 누구인지는 뻔했으니.
“……무슨 짓을 한 거지?”
[난, 암흑교단의 칠죄성이야. 목소리를 전하는 것쯤이야 어디에서도 가능해.]
내 혈육이자, 암흑교단의 최고 간부 중 하나.
‘탐욕’은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내게 속삭였다.
[어서 움직이는 편이 좋을걸, 오빠? 그 계집애 따위는 아무데나 둬도 상관없을 텐데.]
“네가 엠마의 뭘 안다고…..!”
[기사를 찾는 공주님은 하나가 아니거든.]
키득거리며 흘린 정보에 나는 금세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흡혈귀의 혈족은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곳에 묶어두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내 사고가 이어지기도 전에 탐욕의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곳으로 달려가는 편이 좋을 거야. 원래라면 대가를 받아야겠지만… 에이, 기분이다! 사랑하는 오빠를 위한 서비스야? 나중에 여동생을 위한 특별한 보답을 준비해 두라고. 위치는, 남쪽 숲의…….]
바로 그때였다.
쿵, 하고.
어디선가 울려 퍼진 진동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내 눈이 그 충격파의 진원지를 향했다.
남쪽 숲.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 새들의 날갯짓이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생물 특유의 움직임이었다.
전투가 오직 한 곳에서 벌어지리란 법은 없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저 멀리에서도.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품에 넣은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최후의 일전이었다.
**
남쪽 숲의 심처.
그곳에는 불쌍할 만큼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밤하늘을 닮은 암청빛 머리카락과 연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녀는,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떻게든 의지를 다져 보려는 모습이었다.
정작 그 눈꼬리에 맺힌 이슬마저 지울 수는 없었지만.
소녀의 앞에는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흡혈귀의 혈족이 지니는 대표적인 색조가 그림 같이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그 빛 바랜 눈동자 정도일까.
보석처럼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음울하고 칙칙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우울하다 못해, 음험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색조.
두 사람은 익히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무려 서로의 등을 맡기던 전우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맹수와 초식동물과 같은 구도였지만 말이다.
포식자를 앞둔 소동물, 그러니까 황녀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가녀린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유, 유르디나 선배…….”
“이안 선배가 없네요.”
그렇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감정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
웃음도, 울음도 없이 은발의 소녀는 읊조림을 이어갔다.
“어머니도 없고, 대마녀도 없어… 좋네요.”
본래라면 황녀가 이처럼 공포를 느껴야 할 까닭은 없었다.
황녀 또한 아카데미의 당당한 수석 중 하나였다. 세리아가 검의 천재라 불린다고는 하나, 이토록 황녀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텐데.
황녀는 슬그머니 실눈을 떠 세리아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자 환영처럼 시야를 뒤덮는 형상이 하나 있었다.
악귀.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맹렬한 악의와 탐욕을 담아 황녀를 덮치려 드는 그림자가, 세리아의 등 뒤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용의 눈’이 타는 듯한 통증을 보내고 있었다. 명백한 위험 신호였다.
이길 수 없다.
이러한 판단이 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벅, 하고 낙엽을 즈려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걸음을 내딛은 세리아의 눈동자에 흐릿한 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으득, 하고 악물어진 잇새를 보이며 세리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하얀 치아 사이로 유독 존재감을 뽐내는 날카로운 송곳니.
시엔은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피를 주세요.”
그 단호한 요구사항에, 시엔은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로 협상을 시도했다.
“도, 돈으로는 안 될까요?”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뻔했지만.
희번뜩 안광을 빛내면서, 제 반신에 흐르는 피를 처음으로 일깨운 괴물이 울부짖었다.
“피를 줘어어어어!”
그리고 일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고 수십 그루의 나무가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가까스로 참격을 피한 황녀는 땅바닥을 구르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경…….'
보고 싶어요.
오늘따라 짝사랑이 사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