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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73)화 (573/649)

Chapter 573 - 7. 질투는 나의 힘(73)

사실, 처음부터 시엔이 홀로 적과 대치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행 중에서 명실상부 최약체라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황녀였다. 대마녀나 엘시 또한 시엔이 전투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할 리는 없었다.

단지 ‘용의 눈’을 빌려 결계의 핵을 탐색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지.

하지만 세상은 바라는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물길이 바위에 부닥쳐 갈라지듯, 때로는 예상할 수 없는 변수를 맞닥뜨리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길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덮쳐 온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거나.

마침 결계의 핵이 위치하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도중이었다. 일전에도 핵을 발견한 적이 있던 남쪽 숲으로 향하던 그때, 은빛의 질풍이 내달렸다.

소음도, 전조도 없는 기습이었다. 차라리 형체 없는 바람이 질주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은밀한 습격.

이를 처음으로 눈치 챈 인물은, 당연히 대마녀였다.

“엎드려!”

난데없는 명령이었다.

숙련되지 않은 병사라면 일순 머뭇거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이곳에 함께하고 있는 이들은 실전을 겪어 본 몸.

심지어 가장 어리숙한 황녀조차 북부에서 사선을 넘은 경험이 있던 참이었다. 두 소녀가 생존 본능에 따라 납작 엎드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즉시.

그와 동시에 허공에 기하학적인 도형이 그려졌고, 반투명한 막을 강타하는 무언가가 묵직한 소음을 일으켰다.

쾅!

충돌은 빠르고 강렬했다.

터져 나온 충격파가 마구잡이로 주위를 휩쓸며 돌풍을 일으켰다. 납작 엎드린 황녀는 쏟아져 내리는 흙먼지에 비명을 내지를 뻔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가루처럼 흩날리는 빛의 파편.

놀랍게도, 정체불명의 충돌체가 대마녀의 마법에 유효한 타격을 입혔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본체의 힘을 쓰지 못하고, 영창을 할 시간도 없었다지만 마스터는 마스터.

그 마법에 실금이라도 낼 수 있는 존재는 지극히 드물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막 일행을 덮친 참이고.

허공에서 몇 차례 빙그르르 회전하던 여인의 발이 사뿐히 땅을 즈려밟았다.

마치 질량이 없기라도 한 듯 고요한 착지.

그렇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여인의 낯빛은, 의외로 창백했다. 중병에 걸린 병자를 연상시킬 만큼.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언니.”

연령대는 고작해야 20대 초중반일까.

황녀는 그 얼굴을 힐끔 보자마자 미간을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초면임이 분명한데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이 느낌.

누군가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반면 대마녀와 엘시의 반응은 단순했다. 대마녀는 면식이 있는지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푹 내뱉었고, 엘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를 토해냈을 뿐이었다.

“아니, 당신이 뭔데 감히 우리 스승님을……!”

“넌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만.”

그마저도 대마녀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그쳐 버리고 말았지만.

무언가 속사정이 있음을 직감한 엘시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제 고깔모자를 고쳐 썼다. 다급히 엎어지느라 모자가 살짝 삐뚤어진 참이었으니.

대마녀의 손에는 어느덧 새로운 마법진이 맺혀 있었다.

우선 인사를 나누기는 하겠지만, 대화를 오래 할 생각은 결단코 없다는 신호이리라.

“가출을 했다고 들었는데, 돌아온 거냐?”

“사랑의 열병을 앓은 적이 있었죠. 그 탓에 한때는 큰언니의 품을 떠나야 했지만…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하나같이 처음 듣는 가정사였다.

다만 황녀가 새로 등장한 여인의 정체를 골몰하던 와중에 깨달은 사실은 하나 있었다. 바로 상대의 힘이 여타의 혈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

그 존재감만으로도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불볕 같은 더위가 이어지던 나날이었다. 달구어진 흙길의 열기와 더불어, 강자만이 풍길 수 있는 특유의 압박감이 황녀의 폐부를 짓눌렀다.

하지만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자 도리어 떠오르는 형상도 존재했다.

시야가 과호흡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찰나, 황녀는 문득 떠오르는 인물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너무나 닮았다.

그녀가 익히 알고 지내던 선배, ‘세리아 유르디나’와.

그러든 말든 대마녀와 여인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여인의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와 함께.

“우리를 그 무더운 대수림에 가둔 원수의 목이, 물어뜯기기 직전인데.”

“오늘은 정말 끝을 보아야겠구나…….”

대마녀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검지를 치켜들었다. 은발의 여인을 겨눈 손가락은 가녀렸지만, 그 끝에 맺힌 마력의 밀도는 결코 연악하다고 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피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처럼 선연한 감각이 황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지만, 정작 이를 마주한 여인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머, 언니께서 몸소 상대해 주시려고요?”

“우리 애들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러면서 흘깃 엘시에게 닿는 대마녀의 눈짓.

그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할 엘시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몸을 일으켜 황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몇 걸음에 불과한 거리였다.

얼떨떨한 낯을 하고 있는 황녀의 귓가에, 소녀의 속삭임이 와 닿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 우리는 결계의 핵을 찾는다.”

“하, 하지만 저분… 유르디나 선배를 너무 닮았…….”

“지금 그게 중요해?”

황녀에게는 그 짜증스러운 반문에 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우물쭈물하면서,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을 뿐.

엘시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아카데미, 더 나아가 대륙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르는 전투를 앞둔 마당이었다.

사소한 문제 따위는 무시해야 옳았다.

마음에 걸리는 사실을 하나하나 짚어가기에는, 흐르기 시작한 사건의 급류가 너무나도 거셌으므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쾅, 하고.

폭음과 함께 핏빛의 광선이 대마녀의 마법진을 으깨 부순다.

연원조차 알 수 없는 일격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충돌의 여파만으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던 황녀의 몸이 또 다시 엎어졌을 정도였으니까.

“꺄아아아악!”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황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왜 은발의 여인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핏빛의 광선이 나타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뒤섞여 터져 나오는 외침만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흡혈귀?! 스승님, 당장 쫓아요!”

“하지만, 그럼 저 아이는…….”

“제가 맡… 아니, 이 미친년이 진짜?!”

아우성, 폭음, 그리고 흙먼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그림자들.

대마녀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어딘가로 황급히 내달린다. 고깔 모자를 쓴 그림자는 느닷없이 달려든 여인의 그림자와 얽히듯 날아가고 있었다.

종래에 남은 것은 오직 황녀뿐이었다.

삽시간에 홀로 남은 황녀는 오들오들 떨었다. 북부에서 실전을 경험했다지만,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그녀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전개에도 평정을 유지하기에는 힘들었다.

심지어 이곳에는 ‘이안 경’도 없지 않은가.

흙먼지를 잔뜩 맞은 시엔은 부르르 몸을 떨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어차피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괜히 이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다 싶었다. 이래서야, 도움은커녕 민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엔의 고민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저벅저벅.

고요한 발소리가 천둥처럼 시엔의 심장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돌린 시야 구석에서는, 낯익은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이고 있었다.

소녀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황녀에게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발자국을 남기는 저 여인의 이름을, 황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리아 유르디나.

이제는 적이 된 동료였다.

이것이 바로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녀는 수풀이 무성한 숲속을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쾅, 콰광!

“꺄, 꺄아아아악!”

폭음과 함께 흙무더기가 비산한다.

거목만큼이나 높이 치솟은 자줏빛 오러가 채찍처럼 지반을 두드린다. 그러자 땅이 터져 나가고 나무들이 뿌리째 뒤집히며, 불행한 소녀의 비명소리는 더더욱 높아졌다.

우지끈 쓰러지는 나무들이 섬유질 파편과 함께 흙먼지를 흩날렸다.

단 일격.

그러지 않아도 검술 솜씨만큼은 흠 잡을 데 없던 세리아였다. 흡혈귀의 피를 일깨워 흉성마저 갖춘 지금, 비록 기술의 정교함은 덜해졌다지만 몇 배나 되는 출력이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검으로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겠는가.

차라리 실력 있는 마법사 여럿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는 소리가 더욱 믿을 만했다. 그만큼이나 쉴 새 없이 숲을 폭격하는 수 미터의오러는 압도적이었고, 저항의 의지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황녀는 마법사였다.

믿을 만한 전위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검사와 일대일 승부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영창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데 반격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발에 땀이 나도록 도망을 다니는 수밖에.

오히려 여태껏 요리조리 검격을 피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었다. 만일 세리아가 폭주한 탓에 이전과 같은 노련미를 잃지 않았다면, 시엔은 이미 고깃덩어리가 되어 땅 위에 널브러졌으리라.

그 와중에도 세리아는 시엔에게 말 걸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도망치시는 건가요, 황녀 전하!”

“제발 그 검부터 내려놓고 말해요!”

“피, 피, 피… 피를 조금만 나눠주면 되는데에에에!”

그리고 일섬(一閃).

세상이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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