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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74)화 (574/649)

Chapter 574 - 7. 질투는 나의 힘(74)

바람을 가르는 흔해빠진 소음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용의 눈’이 보내는 경고에 따라 시엔이 몸을 웅크린 순간, 그 위로 핏빛의 선이 그려졌다.

소리보다도 빠른 쾌속의 검.

이윽고 찢겨 나간 대기가 뒤늦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질풍에 휩쓸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사태의 위급함을 대변했다.

아슬아슬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혹은 황녀의 키가 조금이라도 컸다면 저 핏빛의 실선은 절취선이 되었을 터였다. 그것도 황녀의 두개골 안에 든 내용물을 세상에 내보일 절취선.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지나치게 강했다. 아무리 흡혈귀의 피를 잇고 있다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만한 성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무언가 이상했다.

죽음의 위기를 앞둔 황녀의 두뇌가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존 본능은 비상한 두뇌를 더욱 특별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라, 생각해.

이대로 가면 결말은 뻔했다. 무조건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묘수를 짜내는 수밖에 없었다.

온갖 단어들이 뇌리 속을 거침없이 흐른다.

피, 흡혈귀, 힘, 폭주…… 그리고 ‘나’.

짤막한 낱말 하나가 신의 계시처럼 황녀의 척추를 관통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황녀에게는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참격이 날아올 때까지 남은 찰나의 시간.

황녀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잠깐!”

물론 이성을 잃은 괴물이 황녀의 제지를 들을 리는 만무했다.

세리아가 망설임 없이 다시 검을 휘두르기 직전, 시엔은 온힘을 다해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 필요하다면서요!”

움찔.

그 외침에 세리아의 몸짓이 처음으로 멎었다.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시엔을 응시했다.

우선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는 뜻이리라.

황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조곤조곤 제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만약을 대비한 영창을 잊지 않은 채로.

“제 피를 원한다면, 최소한 제 몸뚱어리가 온전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선배께서 휘두르는 검의 위력을 한 번 보세요!”

세리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긋이 시엔을 응시하는 그 눈동자는, 동공의 초점이 풀려 있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시엔은 멈추지 않았다.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 생각했으니까.

“나무 수십 그루가 동강 날 정도인데, 제가 그 검에 직격당하면 어떻게 될까요? 산산조각이 날 테고, 당연히 선배는 제 피를 얻을 수도…….”

“전하께서는, 저를 닮으셨네요.”

난데없는 소리였다.

아무리 영특한 황녀라 하더라도 이러한 전개를 예상하고 있었을 리는 없었다. 시엔은 잠시 당황한 듯 숨을 삼키면서, 준비하고 있던 영창에 박차를 가했다.

변수가 늘어날수록 평화로운 해결의 가능성은 멀어진다.

그렇게 되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폭력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을 배워 온 시엔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음 영창.

아카데미 고학년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고난이도 기술이었다. 하지만 1학년 수석이자, 용의 핏줄을 잇고 있는 시엔은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이러한 시엔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세리아는 서서히 검을 내리면서, 탄식과도 같은 감상을 이어갔다.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얻은 해답이 그 정도인가요? 협상을 해보자고, 빌어 보자고… 아아, 제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 처음에는 도망치다가, 그 다음에는 울며 간청했고, 끝내는 이 꼴.”

흐, 하고 세리아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검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후회와 한탄으로 범벅이 된 눈동자가 쓸쓸한 인물화를 그렸다.

“……정말로, 전하께서는 저를 닮았어요.”

“그래서 동정심이 드나요?”

애써 무해한 미소를 연출하며, 시엔은 그렇게 되물었다.

물론 등 뒤로 모은 두 손에서는 몇 개나 되는 기하학적인 도형이 서로 맞물리는 중이었다. 당장 황녀가 짜낼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이었다.

연기야 익숙하니까.

시엔은 결코 미소를 무너트리지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이성을 반쯤 잃은 괴물, 황녀를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정심이라, 글쎄요… 그보다는, 뭐라고 할까.”

그렇게 고민하듯 세리아의 고개가 툭 떨구어진 그 순간.

시엔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적은 모든 경계를 풀고 있었고, 시선조차 이곳을 향하지 않고 있었다.

방심한 틈을 찌르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그러자 시엔의 배후로 떠오르는 수십 개나 되는 기하학적인 도형들.

세리아가 이를 눈치 채기도 전에, 복잡다난한 마법진들이 일시에 공명하며 한 줄기의 질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발동까지 필요한 시간은 지극히도 짧았다.

그 직후.

“섬광, 불타라! 온 세상을 꿰뚫는 진리의 별로서… 천리일도(千里一跳)!”

죽, 하고.

빛의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했다. 도약과 활공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치를 채 보면 어느덧 새는 저만치 앞서 은발의 소녀를 덮치고 있었다. 마치 접힌 공간이 펼쳐지며 홀로 퉁겨 나간 듯한 착각. 혹은, 멈춘 시간 속에서 홀로 튕겨 나와 내달린 듯한 착시.

그때까지도 세리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를 확인한 시엔의 낯빛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됐다.

아무리 마법사가 일대일에서 검사보다 불리하다지만, 영창을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법의 화력은 압도적이다. 특히 이만큼이나 공들여 준비한 영창이라면, 두 수는 앞서 있는 검사조차 무사하기 힘들었다.

이를 방증하듯 세리아는 저항조차 포기한 듯 그저 서 있고만 있지 않은가.

시엔은 재빨리 후퇴할 채비를 마쳤다. 이대로 최대한 도주해서, 이안에게 뒤를 맡길 심산이었다.

그래, 그래야만 했는데.

콱, 하는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않았다면.

뒤돌아 도망치려던 황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제 눈에 비치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검이 빛의 새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치 마력이 유리나 대리석이라도 된다는 양, 칼날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실금이 일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무서운 점은 그 사이로 흘러내린 마력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름 아닌 세리아를 향해.

“아아, 그래… 짜증이 나요.”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신호였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의 새는 단숨에 반짝이는 가루로 화했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가루를 가르고 내쏘아지는 자줏빛의 궤적.

저항할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엔의 덜덜 떨리는 시선이 서서히 그 궤적의 끝을 향했다.

어느덧 칼날에 관통되어 있는 허벅지.

검극으로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시엔은 한동안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울 따름이었다.

뭐지?

도대체 방금 무엇이.

뒤늦은 통증이 불길처럼 척수를 덥히며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으, 그… 꺄아아아아아아악!”

짧은 인생을 통틀어 몇 번 겪어보지 못한 격통이었다. 시엔은 곧장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제 상처 부위를 더듬으려는 팔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그마저도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었다. 팍, 하고 또 하나의 섬광이 왼쪽 어깨를 관통한다.

자그마한 돌멩이였다. 세리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찬 자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흉기가 되어 시엔의 사지 중 하나를 꿰뚫기에 충분했다.

연달아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은 시엔의 입에서 더욱 처량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으그, 극… 크으, 꺄으,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도를 초월한 통증은 비명을 토해내는 성대마저 좁힌다.

시엔은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고, 그렇게 조용해진 사위로 리듬을 타듯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저벅, 저벅, 저벅.

걸음걸이는 무심한 물음을 동반했다.

“왜 전하가 매번 도망쳐야 했는지 아나요? 그리고 고개 숙여 부탁을 해야 했는지는?”

“으윽, 크으… 흐으으……!”

시엔의 뇌리는 이미 고통으로 새하얘진 지 오래였다. 세리아의 말소리 따위, 들어찰 자리는 남아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약해빠졌으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팍, 하고.

세리아가 걷어 찬 돌멩이가 시엔의 남은 어깨를 관통했다. 황녀는 이제 이를 악문 채로,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겨우겨우 통증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억눌린 신음.

“으그, 그으… 끄으으으으으으으윽!”

“멍청하고, 나약해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거예요… 자, 보세요. 지금 전하께서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투둑, 툭.

실핏줄이 불거진 시엔의 눈이 적의와 공포를 담아 세리아를 향했다. 어느덧 은발의 소녀는 황녀와 지척, 세리아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 텅 빈 눈을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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