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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75)화 (575/649)

Chapter 575 - 7. 질투는 나의 힘(75)

“비참하게 땅을 구르고 있잖아요. 마치 벌레처럼… 사실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당신은, 나를 닮았으니까. 사랑을 할 때도 그랬죠?”

흐으, 흐으.

시엔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쩍 세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다.

이 여자는 미쳐 있다. 황녀라는 신분 따위, 아무런 방패도 되지 않을 터였다. 작금의 세리아는 당장이라도 황녀의 목을 비틀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측 불가능.

지능이 뛰어난 인물일수록, 이러한 인물을 병적으로 기피한다. 계산이 불가능한 존재는 애초에 계획에서 논외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시엔은 기가 죽어 버렸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시선을 피했을 뿐.

겁쟁이의 귓가로 소녀의 속삭임이 진득히 흘러 내린다.

“매일 질투만 하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차마 그걸 겉으로 드러내기 무서워서,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거절 당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었더니, 어라? 내 사랑은 저 멀리 가 버리고.”

“……지, 질투는.”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해 보려는 본능일까.

혹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지도 몰랐다. 시엔은 무심코 그렇게 입술을 달싹이며, 치밀어 오르는 신음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으흐, 끄으… 질투는, 아니에요. 저 따위가 어찌……”

“아하, 그 말.”

그렇게 세리아는 텅 빈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벼락 같이 시엔의 허벅지에 박힌 검을 뽑아내는 손길.

시엔에게 이를 대비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껏 수축돼 있던 근육이 찢겨 나가는 감각이 다시금 황녀의 뇌리를 강타한다.

“아으,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소름이 돋도록, 저와 비슷해요. 전하께서는 평생 방구석에 처박혀 눈물만 흘리면 되겠네요.”

그러면서 세리아는 칼날에 묻은 피를 할짝였다. 고양이가 제 손을 핥듯이, 조금씩 꼼꼼하게.

그것이 끝.

어느새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황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처분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판관의 눈빛이었다.

죽여야 하나?

혹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황녀는 상대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엔은 더욱 울컥하고 말았다.

어차피 몰릴 대로 몰린 몸이었다. 생존을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그렇다고 목숨을 구걸하기에는 황족으로 살아 온 인생이 발목을 잡았다.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을 내려다 봐?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선사한 상대를 향한 적의와 원한이 일그러진 분노가 되어 뇌리를 달구었다. 소녀가 노호성을 터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순전히 그 비이성적인 감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그 반문에 세리아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로부터 고민의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평소의 황녀였다면, 이 시점에서 목숨을 부지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발언의 수위를 재고했을 터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평소’의 이야기.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시엔이 고려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나는, 죄인이라고요… 당신 따위가 내 마음을 알아?! 후회하고, 후회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그 기분을?! 만일 그이가 나를 주제넘었다 생각하면?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발악이라고 해야 할지, 울부짖음이라고 해야 할지.

거짓이라고는 한 점조차 없이 내지른 말이었다. 이마저도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던지, 세리아는 또 한 번 짙은 침음을 흘려야 했다.

“흐음…….”

“차라리 곁에만 있는 걸로 좋아! 미움 받을 바에야, 얌전히 옆에서 지켜만 보겠다잖아! 그,  그게… 그게 뭐 나쁜 거냐고!”

켜켜이 묵혀 두었던 말이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온 세상이 소녀를 미워했다. 그래서 소녀도 세상을 미워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소녀를 진심으로 위해 주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에게 죄를 저질렀고, 너무나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의 악몽은 그 상처와 결합하여 소녀의 마음 속에 더욱 깊은 흉터를 남겼다.

시엔은 정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목숨을 위협받았던 날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소녀의 정신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황녀를 탓했다.

실은 책임회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무고한 인간을 비난했다는 과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며 누군가를 비난한다.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하필 그 상대가 황녀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진정한 병자는 스스로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른다.

만일 오늘과 같이 극한의 환경에 놓이지 않았다면, 시엔은 제 심중에 쌓아 둔 말을 토해내지도 못했으리라. 스스로도 제 가슴에 박힌 말뚝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니까.

악에 받힌 황녀는 그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목청을 높였을 뿐.

차가운 푸른 눈동자와, 핏발 선 연회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충돌한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세리아는 이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나쁘지 않죠.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고, 대신 자기도 상처 입지 않겠다는 그 마음. 그 배려심… 어느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황녀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푹, 하고.

세리아의 검이 시엔의 마지막 남은 허벅지를 관통했다.

마치 진통제를 맞은 듯했다. 분노로 달구어졌던 머리가 빠르게 식으면서, 날 것의 통증이 차오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불꽃보다 뜨거우며, 전류보다 짜릿하고, 얼음보다도 차가운 그 감각.

닫혀 있던 성대가 다시금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 으, 꺄아아아아아아악!”

“단지 등신 같을 뿐이지. 평생 그렇게 살아서, 뭐요? 원하는 것 하나 가질 수 없는 인생인데… 후후, 황족도 별 거 없네요. 용의 핏줄이라 우쭐대더니, 결국엔 어리석고 멍청한 겁쟁이일 뿐…….”

담백하고, 그 이상으로 잔혹한 후벼파기였다.

이를 들은 황녀는 곧장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중에서도 유독 황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낱말이 하나.

‘황족’.

그 말이 나오자마자 시엔의 눈이 한계까지 치켜 뜨였다. 소녀의 분노가 어찌나 컸는지,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릴 정도였다.

“그 말, 끄으으… 사과해……! 감히, 제국 황가를 모욕해? 수백 년 동안 명예와 존경을 잃지 않은 우리 황가를? 우리 아버지는, 그리고 큰할아버지는 너 따위한테 비웃음을 살 만큼……!”

일평생 동안 황가의 일원으로 살아 온 황녀였다.

당연히 황가의 일원으로서 지닌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더불어 자상한 아버지와 최강의 큰할아버지 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자란 그녀가 아니었던가.

시앤의 분노는 정당했다.

황가를 모욕한다는 건, 곧 황가의 모든 어른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단지 이 전장이 사회의 상식의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었을 뿐.

“머저리 같은 딸내미를 둔 죄라고 치죠.”

시엔은 최선을 다해 몸부림을 치려 했으나, 승기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시엔의 턱을 후려치는 세리아의 칼등.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을 이겨낼 만한 초인은 드물었다. 결국 황녀는 더는 저항하지 못하고 철푸덕 엎어지고 말았다.

시야가 흐릿하다.

정신은 몽롱하고, 눈꺼풀을 젖히기도 힘들었다. 흔들린 초점은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다만 분해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이처럼 사무치는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던가?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사실 세리아의 말이 옳았다.

도망치고, 협상만 하는 자는 절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익히 배워 온 진리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무서웠다.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 봐.

내게는 그럴 만한 각오가 없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내 인생은 끝나고 마는 걸까?

바보같이, 바보같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단지 움찔움찔 떨리는 팔다리가, 생의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을 뿐.

세리아의 손이 서서히 검을 치켜들었다. 오래된 숙제를 끝마치듯, 지루한 눈을 한 채로.

“그럼, 잠깐만 주무시길… 당신의 피만큼은 꽤 훌륭하니까, 제가 유용하게 쓸……!”

바로 그때였다.

쾅, 하고 폭음이 터져 나오며 세리아가 들고 있던 검이 허공을 날았다. 얼떨떨해진 푸른 눈빛이 검을 쥐고 있던 제 손을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부닥쳤다.

섬광, 아니 손도끼인가.

그 무시무시한 속도에도 세리아의 손등은 멀쩡한 채였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내구성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세리아의 눈동자는 한계까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필 이 시점에?

그러나 온 대륙을 통틀어도 손도끼를 이처럼 귀신 같이 다루는 자는 드물었다. 하물며 투척까지 하는 자는 더 드물었으며, 무엇보다 공중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다 되돌아가는 그 묘기까지.

세리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어느 사내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적막을 뚫고 내려앉았다.

“……안녕, 세리아.”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가,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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