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6 - 7. 질투는 나의 힘(76)
드넓은 숲의 공터에는 그림자가 셋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와 세리아, 그리고 시엔까지.
공터를 채우고 있었을 나무와 바위들은 가루가 되어 흩날린 지 오래였다. 지반마저 형편없이 터져 나간 마당이었으니,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것이 스러질 수밖에.
물론 우리들도 마냥 멀쩡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나는 하도 다급히 달려온 탓에 호흡이 온전치 못했다. 하이 익스퍼트에 도달한 이후, 이처럼 숨이 거칠어진 적이 많지 않았는데.
하물며 내 몸은 흡혈귀의 권속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내 몰골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이마저도 황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엔의 사지는 어느 하나 성한 부위가 없었다. 팔다리에 난 관통상에서는 핏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있었고, 강렬한 통증을 겪은 연회색 눈동자는 초점조차 맞지 않아 흐릿할 지경이었다.
용의 피를 이은 소녀였다.
어린 시절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자라왔겠지. 최소한 이처럼 살갗과 근육이 너덜너덜하게 찢기는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싸늘한 감각이 가슴 한 켠을 에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멀쩡한 이는, 오직 하나뿐.
텅 빈 눈동자를 한 내 후배밖에 없었다.
저것을 내 ‘후배’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나는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분위기가 좀 바뀌었네, 세리아.”
“선배…….”
나를 대하는 세리아의 태도는 복잡했다.
멍하니 뒤돌아 보다가, 화들짝 놀라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이글거리는 눈빛을 내게 보내기도 했다. 낭패감이 깃든 낯빛이 차갑기만 하던 이전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그 입에서는 옅은 신음이 터져 나오기까지.
“선배, 선배, 선배… 으, 아… 내, 내가 뭘…….”
“세리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세리아의 텅 빈 눈동자에, 불꽃처럼 빛이 점멸한다. 그럴수록 세리아의 낯빛은 혼란과 공포로 가득 차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애초부터 세리아가 정상이 아니리란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본래 그녀는 이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죄 없는 소녀의 팔다리에 하나씩 관통상을 남기다니.
심지어 적을 죽일 때조차 깔끔히 목을 베는 편을 선호하던 세리아였다. 텅 빈 눈동자가 말해주듯, 세리아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있으리라 가정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다만 예상 외로 그 최면의 심도가 깊지는 않을지도.
당장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만 해도 그랬다.
나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달려 세리아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 곁에는 무력화된 황녀가 위치하고 있었다.
섣불리 자극했다가는 황녀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신중히 세리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세리아, 세리아? 괜찮아?”
“아, 으, 아… 이, 이안 선배…….”
드디어 내 이름이 나왔다.
나는 그 사실에 고무되어 두어 걸음을 더 전진했다. 세리아는 몸을 흠칫 떨며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폭주할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이대로 끝나는 걸까?
어물거리는 목소리가 내 희미한 기대감을 자극했다.
“저, 제가 뭘… 뭘 어떻게…….”
“침착해, 세리아…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덜덜 떨리는 시선이 세리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증언하고 있었다.
가녀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숙련된 검사였으므로, 그 근육의 움직임이 무슨 의미인지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검을 휘둘러야 할지.
세리아의 망설임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 정도로 세리아의 근육은 솔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추억 이야기를 주절거리기로 했다. 혹시나 세리아가 제정신을 되찾을 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세리아, 예전에 처음 대련했을 때 기억 나?”
“대, 대련?”
“그래, 그 이후로 네가 날 졸졸 따라다녔잖아…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혹시 기억하겠어?”
그러자 세리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고개를 푹 떨군 소녀는 무어라 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발달한 청력으로도 제대로 청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언어조차 되지 않는 파편화된 음성일 가능성이 컸다.
이윽고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는 위험한 광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무래도 느낌이 불길했다.
그러니 준비를 하는 수밖에.
세리아의 혼잣말이 언어의 형체를 갖출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기, 억… 기억, 기억, 기억… 기, 기억…….”
“그래, 기억하겠어?”
그렇게 적막이 내려앉는다.
두근, 두근.
숨소리조차 고요해진 공터에서는 내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두들기고 있었다. 손도끼를 쥔 내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찰나의 침묵 끝.
“기, 기억… 할 리가 없잖아!!”
발작처럼 터져 나온 외침과 함께, 세리아가 쥔 검신으로부터 핏빛의 오러가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그 높이만 해도 수 미터.
괴물의 흉성을 되찾은 세리아의 기세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세져 있었다. 나조차도 일순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우선, 압도적인 그 마력의 양이 가장 까다로웠다.
세리아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사자후가 파도처럼 넘실대며 심장을 강타했다. 단지 소리만으로도 내장이 뒤얽히는 감각, 심지어 핏빛의 오러는 폭발하듯 터져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내가 아니라, 세리아의 바로 옆에 엎어져 있는 황녀가.
만일 내가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든다.
색채를 잃은 만물은 점차 운동량을 상실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모든 동력을 잃어 버렸다. 희고 검은 세상 속을 내달리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고작해야 몇 초.
아니, 그 이하였다.
이미 흡혈귀의 혈족과 전투를 벌이며 나는 몇 번이고 시간을 정지시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에 도달한 초인이 아닌 이상, 이처럼 강력한 힘을 무한정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적된 피로는 정지된 세상의 유지 시간을 더욱 단축시킨다. 그 탓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내 목표는 단 하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땅을 구르는 내 품에는 어느덧 황녀가 안겨 있었다. 나는 재빨리 손도끼를 땅바닥에 박아 넣으며 해(解)의 묘리를 실어야 했다.
쿵!
마치 해일이 방파제에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핏빛의 파도가 은빛의 벽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내가 손도끼를 찍자마자 치솟은 방벽이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숙련도였다.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충돌의 여파가 내 몸뚱어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일순 의식이 흐려지며, 내 눈앞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질 뻔했다.
메마른 황야.
시체가 널브러진 그 풍경이 얼핏 망막에 맺히자마자, 나는 입술을 짓씹어 제정신을 되찾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도리어 몽롱해지던 정신을 일깨운다. 더불어 내 가슴팍에 닿는 옅은 숨결까지도.
황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안 경…….”
“괜찮으십니까, 전하?”
애써 평정을 가장한 내 목소리에, 황녀의 눈에서는 한 줄기의 이슬이 흘러내렸다.
“미안, 미안해요… 제가, 무능해서… 또 폐를…….”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나는 일부러 강한 어조를 써 단언했다. 황녀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황녀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명백한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가 올 때까지 잘 버텨 주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그녀의 활약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들 의무가 있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주셨어요. 남은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르디나 선배는.”
내가 품속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뿌리자, 황녀는 느닷없이 그렇게 운을 뗐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가냘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내게 말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에요… 폭력을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어요. 심지어 피를 원한다면서 저를 아주 아작 낼 기세였으니, 이성도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봐야겠죠.”
“알고 있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간질한 눈빛을 하면서, 소녀의 자그마한 손이 조심스레 내 옷자락을 쥐었다.
나와 황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그녀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있었다.
제 몸도 성하지 못하면서.
“유르디나 선배를, 이안 경은 벨 수 있나요?”
일부러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아직은 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세리아를 내 손으로 베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세리아는 언제나 내 동료였고, 진검을 들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실전을 치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나는 결코 세리아를 죽이지 못하리라.
치명상은커녕, 상처조차 제대로 입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이성을 잃어 얼마든지 내게 해를 입혀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끔찍히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쾅, 하고 핏빛의 파도가 최후의 공세를 마치고 폭발했다. 그리고 자욱한 흙먼지 너머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그림자.
허공에는 불길한 푸른빛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이안 선배… 또, 또 한 눈을 파시는 건가요?”
그 스산한 물음을 들으며, 나는 땅바닥에 박혀 있던 손도끼를 뽑아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 대신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자고로 검사는 칼로 대화를 나누는 법이었으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겨루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는 식은땀과 함께 쓴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