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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77)화 (577/649)

Chapter 577 - 7. 질투는 나의 힘(77)

“내가 언제 한 눈을 팔았다고 그래?”

“언제나 그러시잖아요.”

텅 빈 눈동자는 얼핏 소녀의 감정이 모두 소실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열기를 듣다 보면,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세리아는 무감정하지 않다.

도리어 감정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그것이 여타의 모든 요소들을 압도하고 있는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마치 그림 위에 새하얀 물감을 쏟아 놓으면 흰 도화지처럼 보이듯이.

그 감정의 이름은, 나도 짐작이 가기는 했다.

“제가 옆에 있는데, 그 눈은 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죠. 이해해요. 이안 선배는 한창 때의 남자고, 여우 같은 년들이 달라붙어 꼬리를 치면 아무래도 눈이 갈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매일매일… 나를 두고.”

으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세리아를 중심으로 웅웅거리는 기파가 터져 나왔다. 다시 보아도 무시무시한 마력량이었다.

도대체 뭘 먹은 거지?

이 정도라면 나도 만전을 기해야 할 수준이었다. 비록 기술이나 오러의 힘은 내가 우위에 있다지만, 출력 자체가 급이 다른 수준이었다.

하필 내 몸뚱어리는 또 정상이 아니었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오러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세리아의 분노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게는 언제나 이안 선배뿐인데… 이안 선배는 늘, 내가 아닌 남을 보고 있고… 내가,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요? 바보같이 눈물만 흘리면서, 아무리 기다려도 달라지는 건 없고!”

“진정해, 세리아.”

나는 나지막히 세리아를 만류했지만, 당연히 세리아가 내 말을 들어먹을 리는 없었다.

세리아의 검에서 다시금 핏빛의 불꽃이 치솟는다. 서서히 자세를 잡는 그 모습은, 오래 전에 보았던 내 후배를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내가 처음 보았던 세리아.

그때도 세리아는 이처럼 압도적인 느낌을 풍겼다. 고작 대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는, 안 돼 안 돼 안 돼… 평생 빼앗기고만 살 거야… 이미, 이미 그 암캐한테는 모든 걸 빼앗겼는데? 가문도, 어머니도, 심지어는 이안 선배까지! 더는 싫어!”

그 울부짖음이 어찌나 격했는지, 분노와 질투에 젖은 목소리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공황 상태에 이른 세리아의 눈동자에 짙은 살의가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시 되찾아야 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세리아는 핏발 선 눈을 한 채 한 걸음을 내딛었다.

치켜든 검이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선홍빛이기만 하던 오러에, 세리아의 푸른 빛이 뒤섞이며 자줏빛의 기둥이 우뚝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누구를 죽여서라도!”

그리고 일섬(一閃).

자줏빛의 검격이 성벽처럼 솟구친다. 

수 미터, 혹은 십수 미터에 달할지도 모르는 오러는 나와 세리아 사이의 거리를 지워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해 내 검에 맺힌 오러는 왜소할 따름.

하지만 내게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텅, 하고.

시간의 단면에서 퉁겨 나오듯 내 몸이 내쏘아졌다. 아무리 검격이 빨라도, 정지된 시간 속을 내달리는 나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고속으로 내달린 내 검극이 세리아의 눈앞에서 벼락같이 솟구쳤다. 아직 색채를 되찾지 못한 세상은 한 점의 변화조차 없이 그대로였다.

이 절호의 기회를 타고 노리는 곳은 오직 하나.

바로 세리아의 어깨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검사에게 팔은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팔이 하나라도 무력화 된다면 검을 다루는 데 지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일 수는 없으니, 제압한다.

수많은 실전을 거친 내 판단은 정확했다. 세리아는 폭주한 만큼 이전과 같은 정교함을 잃어 버리고 있었고, 그 탓에 검을 휘두른 뒤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빈틈을 노출하고 있었다.

절대 내주어서는 안 될 어깨가 열릴 정도였으니.

그러니 시간 정지를 잘만 활용한다면 제압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콱, 하고 내 검이 세리아의 어깻죽지에 붙잡히기 전까지는.

“미친……!”

흉광을 품은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터트린 탄성이었다.

아슬아슬했다. 이미 몇 번이나 무리를 한 내 몸은 멈춘 세상을 오랜 시간 유지하지 못했고, 그 탓에 마지막 순간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찰나를 찰나로 쪼갠 여유밖에 없었을 터인데.

세리아는 말도 안 되는 내구도와 반응속도로 이를 극복해 냈다. 어깻죽지를 오므린 것만으로 칼날을 붙잡는 그 완력도 완력이었지만, 살갗이 찢겨나가지 않은 것도 용했다.

그야말로 ‘강철’이라는 비유가 아깝지 않은 강건한 육체.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에 던진 손도끼도 세리아의 손등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던가.

내게 회상에 잠겨 있을 틈 따위는 없었다.

내 검을 붙잡은 세리아는 곧장 발로 내 명치를 차려 시도했다. 저만한 근력으로 걷어차였다가는, 아무리 나라도 중상을 피하기 힘드리라.

지금은 고민조차 사치였다.

캉, 하고 손도끼와 발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무구와 인체의 격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충돌음.

그 결과 또한 백중세였다.

나와 세리아는 뒤로 한 걸음씩을 물러났고, 세리아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위해 어깻죽지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떨어지는 검을 붙잡으며 다시 한 번 일검.

이번에는 칼날과 칼날의 대결이었다. 불꽃과 소리마저 뒤늦게 발생할 정도로 초속의 공방.

고작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나와 세리아는 단숨에 수십 번이나 되는 검광을 폭사했다.

캉, 캉, 캉, 캉, 캉, 캉, 캉!

무수한 소음이 고작을 찢을 듯이 터져 나온다. 새파란 불꽃이 소나기처럼 허공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잔상만이 남은 승부 끝에 밀린 쪽은 나였다.

나는 부상을 입은 채였고, 세리아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해져 있었다. 당연히 힘 대 힘의 싸움으로 넘어가면 내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완력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자, 세리아는 흉흉한 눈빛으로 빛내며 한 걸음을 파고들었다.

“아직……!”

다시 한 번 자줏빛의 오러가 솟구친다. 설령 내가 뒤로 도약하더라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확실히 외통수였다.

내가 단순히 검만 다룰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세리아가 완전히 내 품을 파고들기 직전, 그녀의 망막에 언뜻 핏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허공이 피를 흘리며 기기묘묘한 글자를 그린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기술은, 온 대륙을 통틀어 보아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용혈 문자(龍血文字).

세리아의 눈이 부릅떠지고,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열과 빛의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나 또한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해서, 뒤로 나가떨어져야 했지만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였다.

용혈 문자의 힘은 강화된 육체로도 감내하기 버겁다. 여태 단 한 번도 밀리지 않던 세리아조차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봐야 짧기만 한 여유.

내게는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온몸에 마력을 회전시켰다. 다시 한 번 세상에 빛이 사라지고, 어느덧 내 몸뚱어리는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그 사이를 질주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닿아라……!

그러나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짧았다. 허벅지를 칼날이 가르기 직전, 세리아는 가까스로 정지된 시간 속을 벗어나며 내 칼날을 쳐냈다.

“크윽…..!”

자세가 한 번 무너졌던 탓인지, 내 검을 제대로 되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공방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내가 멈춘 세계 속을 내달리고, 세리아가 반격하고, 그러다 또 뒷걸음질을 치다 달려들고.

그럴 때마다 내가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0.9초.

0.5초.

0.3초.

마지막에는, 0.1초조차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시간까지.

어느덧 시야가 흐릿했다. 나는 헐떡이면서, 땅에 엎어지듯 상반신을 굽힌 채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흡혈귀의 혈족과 싸우며 얻은 상처가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힐링 포션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기묘한 상처는 지속적인 출혈을 유도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체력의 한계.

절대 지치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할 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다만 세리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후후, 아하… 아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옷은 곳곳이 찢겨 나가 있고 몸에도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그중에는 팔이나 다리처럼, 검사로서 치명적인 부위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나와 세리아의 격차는 분명했다.

세리아는 두 다리로 꼿꼿이 서 있었고, 나는 숨이 차서 움직이기도 벅찼다. 이를 깨달은 세리아는 제 몰골을 둘러 보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안 선배, 너무 상냥해요… 좀 더 확실히 제 목을 노릴 만한 기회가 있었잖아요?”

나는 그 말에 흐,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세리아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정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든 세리아를 제압할 수 있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가령, 목숨을 걸고 최대한 지근거리에서 시간을 벌어 본다든지.

물론 한계는 있었다. 내가 검을 들고 있는 이상 세리아의 경계를 피할 수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리 가까워져도 나와 세리아 사이에는 늘 간극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기회는 필연적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세리아는 아직 ‘경계’를 보지 못했으니, 나와 세리아의 실력 차는 명백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세리아를 제압하지 못했다.

어째서?

그만큼 독하지 못했으니까.

사랑하는 후배를 어찌 내 손으로 벨 수 있단 말인가.

순간의 망설임은 승부에서 치명적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나와 세리아의 구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세리아는, 내가 차마 그녀를 베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기뻐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흘러 넘칠 만큼 정욕으로 가득했으니까.

“아아, 상냥해. 상냥해. 상냥해… 그러니까, 누구도 쳐내지 못해. 알고 있어요, 이안 선배… 사실은 고를 수 없었던 거죠?”

한 걸음, 두 걸음.

소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풀어 버렸다.

소용 없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공방 끝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세리아의 오러가 현실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력이든, 현상이든 그 오러 앞에서는 물리적으로 찢겨 나가고 말았다. 마치 무정형의 존재가 고체라도 되는 것 마냥.

이것이 세리아가 지닌 오러 특성인가?

시간 정지가 아슬아슬하게 풀린 까닭이 다 있었다. 아마도 나와 세리아의 오러가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 문제이리라.

지금처럼 내가 달려드는 구도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최소한, 내가 만전의 상태였다면 몰라.

세리아는 내 침묵을 타고 또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암캐도 쳐낼 수 없었던 거예요. 너무 상냥하니까…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

나는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사고가 혼탁하다. 기억과 기억이 접합되며 낯선 풍경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

약효가 올라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아직은 아니었다.

“앞으로 제가 대신 쳐내 드릴게요. 이안 선배가, 오로지 저만 볼 수 있도록… 그 거슬리는 암컷들을 죽이고 죽여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요. 네? 이안 선배도 그러고 싶어서 절 베지 않으신 거죠?”

후우,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시야가 좀 맑아졌다.

어느덧 나와 세리아의 거리는 단 몇 미터.

그렇게 세리아가 또 한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캉, 하고.

오늘만 몇 번인지 모를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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