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8 - 7. 질투는 나의 힘(78)
마지막의 마지막, 내가 내지른 검격이 세리아에 의해 틀어막혔다는 뜻이었다.
지친 몸뚱어리는 검 손잡이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다. 힘없이 날아간 칼은 허공을 몇 번인가 빙글빙글 돌더니, 그대로 땅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손도끼도 휘둘러 보았지만 허사였다.
세리아의 신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흉기나 다름없었다. 지친 몸으로 상대할 만한 완력이 아니었다.
세리아는 내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텅 빈 눈동자로 웃는 소녀의 모습은, 어딘가 소름이 돋는 면이 있기도 했다.
“이제야 겨우 끝났네요. 솔직히, 선배가 망설이지만 않았어도 쓰러지는 쪽은 제가 됐어야 되겠지만…….”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헐떡이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세리아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없었다.
내가 아는 후배는 좀 더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을 텐데.
어느새 세리아는 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와 대련했을 때 말이야. 그때도, 내가 밀렸었는데…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나?”
“그게 중요한가요?”
단호한 반문.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옅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비틀비틀 엎어지려던 몸을 바로 세우자, 내 눈앞에는 잡티 하나 없는 맑은 피부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예쁘다.
세리아는 늘 그랬으나, 지근거리에서 보니 감상도 달라졌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도 흠집 하나를 찾기 힘들 줄이야.
나는 다소 지친 목소리로 한탄했다.
“세리아, 아무래도… 나는 너한테 칼은 못 대겠어.”
“네, 그럴 것 같았어요.”
대답하는 그 목소리조차 미모만큼이나 청명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나와 세리아 사이의 간격은 넓지 않아서, 손을 뻗으면 그대로 닿을 듯했다.
내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대신 말이지…….”
바로 그때.
내 팔 근육이 급격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아니, 비단 팔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자 무시무시한 힘이 솟아올랐다. 여태껏 이러한 힘을 어떻게 아껴두었나 싶을 정도로.
세리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럴 만도 했다.
칼날로도 생채기를 낸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와서 주먹질을 해봐야,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일 ‘달 뒤집기’와 같은 유술을 썼다면 또 달랐겠지만.
최소한 세리아의 뇌리 속에서 내 주먹이 그녀에게 타격을 입히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고 있을 터였다.
그래, 지금까지는.
하지만 내 주먹이 내뻗어지기 직전.
세리아는 두 눈을 한계까지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이 일그러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내 주먹이 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풍경이 구부러지고 빨려 들어가며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내게 묻고 있는 듯했다.
‘이게 무슨?’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쿵, 하고 한 걸음을 내딛자 세리아는 본능처럼 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인의 가녀린 팔에서 근육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래, 근육.
주먹과 검이 교차한다.
장면과 장면이 연속되지 않고 끊어지듯 뇌리에 틀어박혔다. 어쩌면 너무 집중한 탓일지도 몰랐다.
하나, 세리아의 검이 내질러지는 내 주먹을 향한다.
둘, 느닷없이 내 상반신이 굽어지며 주먹이 궤도를 튼다.
셋, 품을 파고든 내 주먹이 세리아의 복부를 향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파고들기.
세리아가 검을 휘두를 궤도를 미리 읽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묘기였다. 멈추다시피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세리아의 복부에 주먹을 꽂기 직전에 읊조렸다.
“……근육이 너무 솔직하다고 했잖아.”
세리아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직후, 경악을 담은 세리아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려던 그 찰나.
쾅!
단순히 주먹으로만 만들어냈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땅이 울리고, 대기가 떨며, 온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
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세리아의 몸은 붕 떠오른 채 직각으로 꺾여 버렸다.
붕산격(崩山擊).
극의에 이르면 산마저 붕괴시킨다는 일격이, 흡혈귀의 신체에 작렬했다.
**
쿵!
자욱한 흙먼지를 가르며 무언가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도 내 일격에 얻어맞고 멀리 날아간 세리아가 일으킨 소음일 터였다.
세리아가 날아간 방향은 명확했다.
그 궤적을 따라 흙바닥이 파이고 나무가 무너져 내렸으니까.
그러고도 얼마나 더 날아갔을지 모를 정도였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죽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한동안 재기는 불가능하겠지. 아무리 피부가 단단하다고한들, 내장이 뒤틀리면 몸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수도 없이 겪어 본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남은 것은, 세리아의 뒤를 쫓아 신병을 확보하는 것뿐.
그렇게 내가 손을 탁탁 털고 있자 어디선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안 경!”
그러면서 통통 뛰듯이 내 곁으로 달려오는 소녀가 하나.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이었다.
분명 사지가 관통돼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이내 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시엔이 누워 있던 자리에, 비어 버린 물약병 몇 개가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족이 들고 다니는 치유 물약이었다.
심지어 황녀는 나처럼 중상에서 회복된 적이 많지도 않을 터였다. 치유 효과를 제대로 받았다면, 사지를 꿰뚫린 인간이 다시 뛰어다니는 기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단해요! 방금 그 기술은 뭐죠?! 얼핏 보기에는, 성국의 비전 유술 같았는데…….”
“편법을 좀 쓴 겁니다.”
나는 황녀의 의문을 그렇게 일축하며 시선을 돌렸다.
비록 내가 만든 참상이기는 했으나, 주먹질 한 번이 불러온 여파치고는 어마무시하기는 했다. 내심 세리아의 몸 상태가 걱정될 정도로.
혹시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겠지?
걱정이 앞서자 내 몸이 자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보다, 우선 세리아를 찾으러 가 보죠. 저대로 두면 또 위험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내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저벅저벅.
저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비틀비틀 걸어오는 그림자가 내 망막에 맺혔다.
윤곽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황녀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설마 그 일격을 맞고도 운신이 가능할 줄이야.
내 입에서 절로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물론 세리아의 몸이 멀쩡하지는 않겠으나,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참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이, 이안 선배……?”
명백한 온기를 담은 목소리가 내 고막을 적셨다.
다름 아닌 세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색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세리아의 신색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했다.
돌아온 초점과 겁에 질린 푸른 눈동자.
내가 알던 후배의 모습이었다.
나는 곧장 날듯이 뛰어가 세리아의 몸을 부축했다. 과연 타격이 없지는 않았는지, 세리아는 내가 어깨를 빌려주자마자 한 웅큼의 핏물을 토해냈다.
“세리아, 괜찮아? 이제 정신이 들어?”
“서, 선배… 지, 지금 무슨 일이… 저는 왜 이곳에……?”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제야 나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언젠가 내게 엘시 선배가 조언해 준 적이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후배에게는 매가 약이라고.
내심 헛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설마 이처럼 빛을 보는 날이 오다니.
세리아가 제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만일 세리아가 그대로 망가져 버렸다면,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을 터였다.
“잠깐, 잠깐 악몽을 꾼 거야… 알았지, 세리아? 우선은 쉬어야……!”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세상은 나와 세리아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쾅!
폭음과 함께 저 멀리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다급히 세리아와 함께 땅바닥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그러자 나와 세리아 위로 날아가는 그림자가 하나.
쿵, 쿵, 쿵!
나무 몇 그루를 쓰러트리고 나서야 그 소녀는 땅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막강한 기술에 당한 듯했으나, 정작 새로 나타난 소녀는 발끈해서 금세 몸을 일으켰다.
“좋아, 해보자는 거지? 어디 한 번, 이 엘시 라이넬라 님의 진심을……!”
그리고 정적.
나와 고깔 모자를 쓴 소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도, 상대도 놀란 듯 입술만 어물거리기를 몇 초.
당연하다는 듯 소녀를 뒤따르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조그만 주제에 제법 실력은 있네요. 하지만 언니에게 방해가 될 수는… 어머.”
사뿐사뿐.
고혹적인 걸음을 옮기던 여인은 나와 세리아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살짝 커진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옅은 기대감이었다.
고작해야 20대 초중반일까.
세리아의 언니쯤 되는 외모를 한 은발의 여인은, 이내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처음 뵙네요, 사위… 그리고, 사랑하는 내 딸.”
나는 얼떨떨한 낯빛을 지을 뿐이었고, 내 품에 안겨 있던 세리아는 호흡조차 잊어 버렸다.
삼자대면.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세리아의 어머니를, 처음으로 마주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