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9 - 7. 질투는 나의 힘(79)
대삼림(大森林), 혹은 대수림(大樹林)이라 불리는 남부의 드넓은 숲은 모든 생명의 보고라 불린다.
무려 수백만 종 이상의 생물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 끝없이 펼쳐진 나무와 물의 천국에서 살고 있는 생명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며, 또 앞으로 수백 년이 지나더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만큼이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장소.
하지만 인류가 지금껏 대수림을 정복하지 못한 까닭은, 숲이 그 가치만큼이나 치명적인 위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륙에 서식하는 독충과 독물의 태반이 서식하는 곳이 바로 대수림이었다. 그곳에는 온갖 기기묘묘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유명한 독초를 떠올리고 말았다.
달의 장미.
은빛, 혹은 푸른빛을 띠고 있는 이 장미의 가시에는 치명적인 독이 흐른다. 그럼에도 달빛을 받아 개화한 그 자태를 눈에 담으면, 무심코 손을 뻗고 만다는 풍문이 있는 기물(奇物)이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것은 독을 숨기고 있다.’라는 옛말에 딱 들어맞는 꽃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뜬금없이 내가 이러한 생각을 떠올린 이유는, 글쎄.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 내 눈앞에 선 여인을 보았다면.
대수림 깊숙한 곳에서 자라고 있는 독장미는, 비단 식물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형상을 한 괴물 또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태어난다.
흡혈귀의 혈족.
그중에서도 ‘직계’라 불리는 강력한 존재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났다.
나를 ‘사위’라고 부르면서.
“어머, 그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젊은 연인이니 그럴 만도 하죠. 참고로, 저도 어린 시절 애아빠와 만난 지 단 이틀만에…….”
“누구십니까.”
여인을 대하는 내 목소리는 경계심으로 뻣뻣이 굳어 있었다.
나는 부축하고 있던 세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세리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당혹과 의문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괜히 부모의 존재가 이제 막 폭주에서 벗어난 세리아의 심리에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뻔한 질문을 던지고 만 것이다.
당신이 누구냐고.
대답이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기껏해야 나와 동년배로 보이는 은발의 여인은, 품위 있는 자세로 살짝 제 치맛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북부의 예법이었다.
“초면에 실례했어요, 사위. 제 이름은 아이라 유르디나… 아니, 이제는 ‘아이라’라고 소개해야 할까요? 들으신 바와 같이, 세리아의 못난 어머니랍니다.”
“왜 하필 이 시점에 나타난 거죠?”
내 물음에 세리아의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호선은 일견 슬퍼 보이기도, 씁쓸해 보이기도, 또 한편으로는 포기한 듯 보이기도 했다.
여인의 고개가 힘없이 내저어졌다.
“저 또한 이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참으로 애석하죠… 이처럼 좋지 않은 시점에, 좋지 않은 관계로 만나게 될 줄이야.”
엘시 선배가 털레털레 내 옆으로 걸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흙먼지로 엉망이 된 옷을 손으로 탁탁 털어내더니, 짜증과 적의가 잔뜩 뒤섞인 낯빛으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 강하다.”
“딱 봐도 그래 보여요.”
빈 말이 아니라, ‘아이라’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세리아의 어머니는 얼핏 보기에도 강해 보였다.
강자 특유의 여유가 듬뿍 묻어나오는 분위기만 보더라도 그랬다. 그리고 엘시 선배와 격전을 거친 탓에 옷 곳곳이 타 버리기는 했지만, 정작 생채기 하나 없어 보이는 새하얀 피부.
더불어 그 자그마한 손짓 하나에도 소란스레 반응하는 주위의 마력까지.
세리아는 여전히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세리아가 나를 떠날세라 팔에 더욱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러든 말든 세리아의 어머니는 상냥한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내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꺾이지 않은 내 경계심을 보고도, 세리아의 어머니는 구슬픈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제 그만 떠나 주세요. 이 싸움은, 그렇게 단순한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거든요. 사위도 슬슬 깨닫지 않았나요? 선과 악이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해요. 천신과 악신, 인간과 마수… 구분은 명료해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캐 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그럼 흡혈귀가 옳다는 겁니까?”
“누구도 옳지 않죠. 또,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고.”
하지만 세리아의 어머니는 일순 섬찟해지는 낯빛을 지우지는 못했다.
고혹적인 입술의 틈새로 날카로운 첨단이 얼핏 비친 듯했다. 어느덧 푸른 눈동자를 차가운 살의로 빛내면서, 여인은 스산한 호선을 머금었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해야 할 일을 할 뿐. 이 싸움터에서 사위의 자리는 없어요.”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인류의 명운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지만, 누구도 내게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내 멋대로 오리잪을 부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
더불어 나는 대마녀와 흡혈귀의 사정 따위 잘 알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곳을 떠나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물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세리아는?”
내 짤막한 반문에, 세리아의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세리아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서, 선배…….”
“세리아는 어떻게 됩니까? 제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단단한 의지가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세리아의 어머니 또한 내가 이 질문을 얼마나 중히 생각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러니 여태껏 막힘없이 대답하던 것과는 달리, 이처럼 시간을 끌고 있을 테지.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세리아의 어머니는 한숨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사위, 세리아는 제 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리아는 인간이 아니란 뜻이죠.”
세리아의 숨소리가 다시 한 번 멎었다.
내게 기댄 세리아의 부드러운 무게감이 더욱 묵직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말없이 세리아의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지만.
“예전에는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인간인 체하며, 제 운명조차 모르고… 그러다 보니 불쌍한 꼴도 몇 번 당했을 테죠.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어째서입니까?”
“운명이 찾아왔으니까요.”
단언.
자그마한 흔들림조차 용납하지 않는 묵직한 어조였다. 그러면서 세리아의 어머니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제자리를 찾아갈 때예요. 저도, 언니도, 큰언니도… 그리고 세리아도. 내 딸아, 이리로 오렴.”
흠칫, 하고 세리아의 몸이 굳는다.
이제야 막 제정신을 차린 세리아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채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혼란과 망설임으로 가득 찬 눈빛은, 마치 내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세리아의 갈등을 눈치 챈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은발의 여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갔다.
“아직도 모르겠니? 넌 그곳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 주위를 둘러 보렴. 그리고 네 몸 안에서 꿈틀대는 힘은 또 어떻고?”
푸른 동공에 일던 흔들림이 더욱 격렬해진다.
세리아의 몸은 굳다 못해 움츠러들고 있었다. 땅바닥을 향하는 그늘진 눈동자와, 열기를 더해가는 헐떡이는 숨소리.
불길한 징조였다.
“저, 저는…….”
“안 됩니다.”
내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망설이는 세리아를 대신해 나선 내 목소리에, 품에서 일던 떨림이 멎었다. 세리아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세리아를 닮아 있었지만, 보다 깊고 사나웠다. 마치 폭풍을 숨긴 바다처럼.
“세리아를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괴물의 삶을 살게 하라고요?”
“적응하는 과정일 뿐이지.”
“적응한 뒤에는요?”
흐응, 하고 세리아의 어머니는 묘한 소리를 내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폭주한 힘에 적응한 삶.
아마도 이전과 같지는 않을 터였다. 흡혈귀는 악신과 계약한 결과로 탄생한 괴물이었고, 그들의 사고방식이 인간과 같을 리는 없었다.
당장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흡혈귀의 권속들도 그렇지 않았던가.
아무 망설임 없이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희생한 끝에 괴물의 삶을 택한 이들이었다.
단언컨대 세리아는 그만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강경해진 어조로 못을 박아야 했다.
“선배로서, 세리아를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기회.”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며 세리아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내리쬐는 땡볕이 분해되며 새하얀 빛의 입자로 화한다. 춤을 추듯 내려온 빛무리가 은발의 여인을 휘감기 시작하자, 그러지 않아도 아름다웠던 세리아의 어머니는 더욱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행위가 단지 미(美)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를 뒷받침하듯, 엘시 선배의 딱딱히 굳은 경고가 고막에 와 닿았다.
“……조심해라.”
허리춤을 향하는 내 손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데.
그러나 여인은 내 초조한 심정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새하얀 손을 쭉 내뻗어, 아리따운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최후 통첩이었다.
“지금이라도 세리아를 두고 떠나요, 사위. 그래도 사지가 멀쩡한 편이 더 좋지 않겠어요?”
“자신만만하시군요.”
“후후, 어리석게도… 당신이 본 게 우리들의 전력이라 생각하지는 말아요. 무엇보다, 당신. 지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잖아요? 부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길 바라요… 그래서, 대답은?”
대답이라.
나는 아주 간단명료한 의사 표현을 돌려 주기로 했다.
캉!
섬광처럼 날아든 손도끼가, 여인의 손등에 얻어맞고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