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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0)화 (580/649)

Chapter 580 - 7. 질투는 나의 힘(80)

손도끼와 인간의 피륙이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뻔했다. 당연히 인간 쪽이 망가지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럴 때는 한 가지 전제를 의심해 보아야 했다.

과연 상대가 인간인지를.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여인의 손등은 그 육체가 얼마나 강건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과연 세리아의 어머니.

내구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실제로 세리아 이상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봐야 옳았다.

나는 곧장 엘시 선배에게 외쳤다.

“황녀 전하를 부탁드립니다!”

“나 보고 짐덩이를 끼고 싸우라고?!”

“대신 저는 세리아가 있잖아요!”

세리아는 폭주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성도 제대로 되찾지 못한 마당에, 제 어머니를 향해 칼을 뽑으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세리아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리아, 최대한 멀리 도망쳐. 내가 어떻게든 이곳에서 막고 있을 테니까…….”

“어머, 저는 그런 걸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훅, 하고 코끝에 와 닿는 살내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여인의 그림자가 내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발을 내딛는 기색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내 곁에 다가온 세리아의 어머니는 어느덧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은빛의 안개를 두른 그 눈동자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렬한 광채를 품고 있었다. 더불어 발달한 송곳니와 손톱이 심상치 않은 예기를 비쳤다.

예쁘다기보다는, 그래.

위험해 보이는 생김새였다. 나는 급히 세리아를 감추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여인이 손톱을 치켜드는 것이 빨랐다.

“아파도 조금만 참… 크흣?!”

물론, 내게도 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세리아의 어머니는 난데없이 비명을 토하며 휘청여야 했다. 등 뒤에서 날아온 손도끼가 뒷목을 강타한 탓이었다.

정중동(停中動)의 묘리.

이제 나를 상대하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기술이었지만, 세리아의 어머니는 행방이 묘연해진 후 세속과 연이 끊긴 인물이었다.

심지어 ‘흡혈귀’와도 별도로 행동을 하는 듯했으니.

이 기술을 모를 만도 했다.

정보의 격차는 곧장 빈틈으로 이어지는 법, 세리아의 어머니는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인 채 짧은 틈새를 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봐야 초 단위로 계산이 불가능한 찰나의 시간.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무인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이를 유용하게 활용하지는 못했으리라.

나는 내던지듯 세리아를 저 멀리로 밀쳐 버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새 자세를 되찾은 여인의 손톱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검만 있다면 여인을 막아서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캉, 하는 소음과 함께 터지는 불꽃.

칼날처럼 자라난 손톱의 경도는 무시무시했다. 그 위를 흐르는 핏빛의 오러가 여인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최소한 익스퍼트 이상.

경도를 보면, 하이 익스퍼트에 달할지도.

심지어 상대의 손은 두 개였다. 다시 말해, 사정거리는 짧아도 근접하는 순간 내가 불리할 수밖에 없단 뜻이었다.

카강, 카강, 카강!

검이 무수한 손톱 세례에 긁혀 나가며 불쾌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오러로 보호하고 있다지만, 이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긁어낸다면 날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좋은 검을 구해놨어야 하는데.

몇 차례 공방을 나누며 내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세리아의 어머니는 우아하게 한 바퀴를 돌며 손톱을 그었다.

최후에는 다리를 쭉 내뻗으면서.

마치 무용과도 같은 동작이었으나, 그 일각에 실린 힘을 생각하면 결코 한가로이 감상을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컥!”

마지막에 검면으로 틀어막았음에도 묵직한 충격이 장기를 뒤흔든다.

내가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나자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간 쪽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곧장 한 걸음을 내딛어, 내 품을 파고들고자 했다.

간격이 짧아질수록 유리해지는 쪽은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업화(業火).”

짤막한 시동어였다.

마력의 전조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재빠른 영창, 그럼에도 그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화륵,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은발의 여인은 허공으로 뛰어올라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착지했다.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우며 올라오는 것은 고열의 불기둥이었다.

쾅!

폭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나는 등 뒤로 디딤발을 거칠게 박아 넣었다.

이제부터는 반격 시작이었다.

“뇌화(雷火).”

또 한 번의 시동어가 울려 퍼지자, 하늘에서 불꽃과 벼락이 실처럼 얽히고설키며 날아들었다. 뱀처럼 뒤쫓아오는 불과 전하의 창을 보고 은발의 여인은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그리고 일섬(一閃).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벼락이 반 토막이 나 흩어졌다. 이미 세리아를 상대할 때도 본 적이 있던 광경이었다.

모든 현상을 물화(物化)시키는 오러.

설마 유전이었을 줄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땅을 박찼고, 이윽고 또 다시 터져 나오는 시동어.

“천궁(天弓).”

무려 연달아 세 번.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마법이었다. 만일 위력이 일정 이하였다면, 흡혈귀 또한 무시하고 맞는 편을 택했겠지.

그러나 엘시 선배가 쓰는 마법은 재빠를 뿐만 아니라 그 위력 또한 충분했다.

그 강건한 흡혈귀의 직계가 애써 피해가야 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발동한 마법은 피하기 지극히 까다롭기도 했다.

하늘에서 쏟아진 벼락의 화살은 무려 여덟 개.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속도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눈치 채고 보면 금빛의 궤적만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흡혈귀의 직계라 하더라도 빛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여덟 줄기나 되는 화살 중 반절 이상을 쳐내기는 했지만, 여인은 팔다리에서 몇 줄기의 핏물을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 사나운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달리고 있던 것이다.

은하수를 이룬 검이 낭떠러지를 그리며 내리꽂힌다.

캉!

세리아의 어머니는 두 손톱을 교차시켜 내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무릎을 살짝 굽히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도 용케도 밀리지 않는 모습.

심지어 여인은 옅은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이런다고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왜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여인이 푸흐,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기 직전.

삐걱, 하고.

나는 칼날에 싣고 있던 무게 중심을 갑작스레 칼자루로 틀었다. 일순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은발의 여인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단지 무슨 생각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

대답은 필요없었다.

나는 여인의 손톱을 지렛대로 삼아, 미끄러지듯 여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여인의 어깻죽지를 파고드는 내 손이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인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내가 언젠가 당했던 대로.

비전 유술 ‘달 뒤집기’.

여인의 몸이, 지면과 직각을 이루며 틀어박힌다.

쾅!

흙먼지와 함께 솟구치는 바위 파편을 맞으며, 나는 비틀비틀 걸어 폭심으로부터 벗어났다.

본래 ‘달 뒤집기’는 상대의 힘을 흘려내며 역이용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를 억지로 써 버렸으니, 내 몸뚱어리에도 부담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지 않아도 타격이 누적된 뼈와 근육이 바들바들 떨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지 않은가.

그만 좀 쓰라고.

안타깝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다.

쿨럭이며 안전거리를 확보한 나는, 엘시 선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여인의 멱을 따야 한다고 심장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날붙이조차 먹히지 않는 강철의 육체를 지닌 존재였고, 무엇보다도 내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황녀.

아무리 기감을 퍼트려도, 황녀는 도주하는 기색이 없었다.

불행히도 내 추측이 옳다는 사실은 곧 밝혀졌다.

“아니, 엘시 선배!”

황녀는 엘시 선배의 등 뒤에서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얼떨결에 펼친 두 손바닥 위에는 처음 보는 돌멩이가 얹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엘시 선배가 준 물건인 듯했다.

그렇다면 엘시 선배는?

황녀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중얼중얼 영창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내 호명에도 짜증스러운 낯을 하는 꼴을 보니 꽤 집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왜?!”

“황녀 전하를 지키라니까요!”

“나는 짐덩이 같은 거 안 키워!”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렸다. 검지를 따라 떠오른 빛의 고리의 안쪽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속속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도망치려면 스스로 도망치고, 맞서 싸우려면 스스로 맞서 싸우라 해!”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야!”

의외로 강경한 어조였다.

나는 일순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엘시 선배는 그쯤에서 흘깃 덜덜 떨고 있는 황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을 받은 소녀는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신병을 대하는 고참병의 태도였다.

“짐덩이가 될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온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알아서 하라 해!”

“하지만……!”

“온다! 준비해… 천국의 사슬!”

애석하게도 세리아의 어머니는 나와 엘시 선배가 다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쾅, 하고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폭음.

단숨에 터져 나온 기파에 지반이 뜯겨 나가며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경지에 오른 무인은, 시야가 없어도 상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법.

나는 검을 가로로 들어 달려드는 짐승을 가로막았다.

카가가가가각!

좌우로 교차된 손톱이 톱날처럼 검을 긁어댄다.

날듯이 나를 덮친 은발의 여인은 놀랍도록 오랜 시간 허공에 떠 있었다. 몸을 두르고 있던 새하얀 빛무리는 어느덧 날짐승의 형상을 이룬 채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박쥐인가.

눈동자로 추정되는 부위에서 핏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림자를 대신해 여인의 등 뒤에 떠오른 그 형체의 영향인지, 은발의 여인은 더욱 짐승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더욱 자라난 손톱과 송곳니, 그리고 욕망이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

박쥐가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우드득, 하고 발이 지반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아프던 몸뚱어리가 더욱 거친 비명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구원은 곧바로 찾아왔다.

촤르륵, 풀려난 빛의 사슬이 포탄처럼 여인의 팔다리를 강타했다. 사슬의 격류에 휩쓸린 여인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저 뒤로 날아가 버렸다.

굵은 사슬이 여인의 사지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벌어줄 수 있는 틈은 잠깐뿐.

벌써부터 빛의 사슬이 떨리고 있었다. 이를 유지하고 있는 엘시 선배의 낯빛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저 마법조차 괴물을 구속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듯했다.

엘시 선배는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며 외쳤다.

“빨, 리… 결정타를 날려!”

키에에에에에엑!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 놓인 여인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을 친다.

나는 끙, 하고 혀를 차면서도 땅을 박차는 수밖에 없었다.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콰직, 콰득, 으드드득.

빛의 사슬에 일던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단 몇 걸음을 내딛으면, 은발의 여인은 구속에서 풀려나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겠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에도 무지막지한 완력을 자랑하던 괴물이었다.

그렇게 되면 감당이 불가능했다.

이윽고 내가 여인의 지척까지 다가간 순간.

“……크흐.”

비명을 내지르던 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명백한 조소(嘲笑).

그 까닭이 밝혀질 때까지는 기다림조차 필요없었다.

우드득!

여인의 오른팔이 홀로 구속을 떨치며 벗어나 있었다.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 그 손톱에 덧씌어진 오러의 길이는 여태 보았던 것 중에서도 최고였다.

나는 여인의 노림수를 이해했다.

이제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은 셈이었다.

하나는, 저 손톱에 몸을 내주는 대신 여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저 손톱을 막아내는 대신 여인이 구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시간을 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살행위였다.

전자를 택하고 싶어도, 내게는 아직 흡혈귀와의 전투가 남아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둘 중 아무것도 택하지 않기로 했다.

툭, 하고 좌하단으로 떨어지는 검극.

그 자세를 본 여인의 낯빛이 처음으로 새하얘졌다. 일순 눈동자에 머물던 광기마저 지워질 만큼 경악한 기색이었다.

“그, 걸 어떻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발의 여인 또한 한때는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이었으니.

비전절기 금사검(金獅劍).

유르디나의 직계만이 숨길 수 있는 사자의 발톱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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