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1)화 (581/649)

Chapter 581 - 7. 질투는 나의 힘(81)

허공을 절단하는 은빛 발톱의 숫자는 무려 일곱.

절정의 경지에 달한 금사검은 결코 막을 수 없다. 동시에 일곱 개의 검격이 가해지는데, 이를 앞둔 자의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도망치는 것.

하지만, 여인은 오른팔을 제외한 모든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고.

그럼 끝이었다.

예정된 미래가 선고된다.

팍, 하고 굵은 핏줄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으며.

또한, 예정되지 않았던 미래가 찾아왔다.

쿵!

그렇게 지축이 뒤흔들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드드드드드드드득!

온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으니까.

난데없는 지진이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는 법.

“이런 씹……!”

카강,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여인을 묶어두고 있던 사슬이 일제히 부숴져 나간다.

그래봐야 한 줄기를 제외한 모든 칼날이 여인의 몸을 파고든 뒤였다. 팔과 다리는 너덜너덜해졌으며, 심지어는 복부에도 길쭉한 자상이 남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얕았다.

다시 말해, 살기는 살았다는 뜻이었다. 지진으로 인해 자세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악!

상처 입은 짐승은 그렇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하며, 헐레벌떡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자세를 바로잡지 못했을 때였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부르짖는 수밖에 없었다.

“엘시 선배!”

“알고 있어, 멍청아……!”

다행스럽게도 엘시 선배는 검지를 겨누고 있었다. 혹시 몰라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리 강건한 육체라도 복부와 사지에 깊은 자상이 남은 상태였다. 추가타를 허용하는 순간, 죽지는 않더라도 전투불능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내가 안심했을 찰나.

은빛의 바람처럼 내달리던 여인의 방향이 기묘하게 꺾였다.

그 의도를 눈치 챈 내 입에서는 곧장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요, 엘시 선배!”

탕, 하고 격발음과 함께 터져 나온 전하의 탄환.

그러나 이는 여인을 맞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인이 튼 방향의 끝에 인질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5황녀 시엔.

아직도 덜덜 떨리는 다리를 수습하지 못한 소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고, 엘시 선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여인이 내달릴 방향을 향해 미리 견제를 넣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은발의 여인이 의도하던 대로.

빛의 탄환이 발사되자, 여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뒤로 껑충 뛰더니 또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그녀를 붙잡을 수가 남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엘시 선배도, 멍하니 서 있던 황녀조차도.

다만 혼미해지려던 내 정신을 일깨워 줄 사람은 있었다.

“당장 쫓아!”

엘시 선배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거칠게 가리켰다.

“못해도 중상이야! 절대 저 속도 오래 유지 못한다고! 멀리 못 갔을 거야!”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당장 땅을 박찼다.

엘시 선배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곳에 자리한 인물 중, 다리가 가장 빠른 사람은 나였다. 나머지 둘은 마법사였으니까.

뒤를 쫓는다면 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력으로 달린 덕일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은발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춤주춤 걸어, 세리아에게로 다가가고 있던 여인을.

내 손이 온힘을 다해 손도끼를 투척했다.

쾅!

무시무시한 가속도가 더해진 손도끼는 차라리 포탄에 가까웠다. 폭음과 함께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비산했고, 세리아에게 다가서고 있던 은발의 여인은 결국 걸음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은발과 여인과 세리아 사이에 꽂힌 도끼날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경고의 의미로 검을 투척할 자세까지 잡아 보기로 했다.

“……당장 세리아에게 떨어져.”

몸이 멀쩡하면 몰라도,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

내가 검이라도 투척하면 여인은 곧장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내가 함부로 검을 던지지 못하는 까닭.

상상 이상으로 세리아와 여인의 거리가 가까웠던 탓이었다.

만일 내가 검을 던진다면 여인은 죽겠지만, 동시에 여인 또한 세리아를 얼마든지 노릴 수 있는 거리.

심지어 세리아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할 뿐 여인과 거리를 벌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래 전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만신창이가 되어, 동정심을 자극하는 목소리를 내면 누구나 그랬을 테니까.

“세리아, 내 딸…….”

그러면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여인.

나 또한 추가로 고함을 터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가가지 말라고 했어!”

내 협박에 세리아의 어머니는 구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내가 악역이라도 된 듯한 구도였다. 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지금 세리아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와, 여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푸른빛 눈동자.

미련과 망설임이 덕지덕지 묻어 나오는 시선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세리아의 설득에 나섰다.

“미안하지만, 세리아. 물러서… 네 어머니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 딸아.”

하지만 세리아의 설득에 나선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인이 자상한 목소리를 내자, 세리아는 화들짝 놀라 떨리는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언제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니? 나는, 언제나 널 위해 살아왔단다.”

“믿지 마!”

“또 다시 빼앗기기만 할 거니?”

세리아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내 후배의 숨소리가 멎는다. 눈동자에 일던 잔잔한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목청을 높였다.

“듣지 마, 세리아! 그리고 당신도 닥쳐!”

하지만 세리아의 어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검이 무서워 거리만 유지하고 있을 뿐, 그 눈과 입은 오로지 세리아를 향하게 된 지 오래였다.

“델핀, 그 계집애한테 모든 걸 빼앗겼다고 들었단다.”

“모, 모든 걸…….”

“그래, 모든 것.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니?”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절절한 호소를 하는 여인의 모습은 설득력을 몇 배나 더하고 있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애원이 끊임없이 여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 또한 네 아빠를 빼앗긴 경험이 있단다.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인간 계집 따위가 나와 네 아버지의 사이를 질투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지. 나는, 네 아빠의 유일한 짝이 되고 싶었는데.”

“유, 유일한 짝…….”

“누구나 그렇지 않겠니?”

그러면서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여인.

흘깃 나를 향하는 시선에서는 옅은 책망의 기색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울컥해서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리아의 상반신이 슬쩍 여인에게로 기운다.

걸음을 내딛지는 않았지만, 거리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는 선택.

나는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짝이 되기를 원해. 너도 그렇지?”

“이안 선배의, 유일한 짝…….”

“지금껏 전부 빼앗겨 왔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제 와서 하나를 가져간다고 해도 그게 큰 잘못일까?”

세리아의 동공에서 점차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홀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꽃향기라도 되는 양, 검은 기류가 세리아를 향해 스물스물 흐르고 있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당장 물러서! 세리아, 너도! 그렇지 않으면……!”

“델핀, 그 계집애로부터 빼앗는 거야.”

“델핀 언니로부터…….”

안 된다.

나는 이쯤에서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이대로 검을 던지는 것이 맞을까? 세리아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리아의 어머니가 아닌가.

설마 제 자식을 길동무로 삼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팔에 힘까지 주었던 나였으나.

“……이런 씨발.”

그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세리아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단 생각이 걸림돌처럼 틀어박혀, 아무리 팔을 휘두르려 해도 움직이지가 않았다.

어찌 내가 세리아를 두고 도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는 사이에도 여인의 설득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너는 내 말만 들으면 돼. 지금껏 델핀에게 얼마나 많은 걸 빼앗겼니?”

“검, 가신들의 사랑, 어머니, 그리고… 이안 선배.”

“후후, 델핀이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세리아의 눈동자에 칙칙한 욕망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오래 전의 악몽을 떠올리는 소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와, 적의.

그리고 질투.

“이제 네가 빼앗을 차례야.”

“내가……?”

“그래, 모든 것을… 내가 그랬듯이.”

바로 그때였다.

“끄엑?!”

팍, 하고 솟구친 손도끼가 세리아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당연히 날이 아닌 자루였지만, 급소를 강타당한 통증이 모자랄 리는 없었다.

흐릿해지던 세리아의 눈동자가 다시금 광채를 되찾았다.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던 세리아는, 어느덧 송곳니를 드러낸 어머니를 보고 화들짝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려 들었다.

그보다도 먼저 어머니가 입을 열었을 뿐.

“그래, 세리아. 내가 했던 것처럼… 비록 나는 마지막에 사소한 문제를 겪긴 했지만, 너는 아닐 거야.”

“어, 어머니가 했다니요? 뭘요?”

“되찾기.”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는 몰랐을 테지.

델핀 선배는 일부러 세리아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일부러 세리아를 제외하고 단 둘이 대화를 나누기를 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리아는 화가 나 뛰쳐나간 적도 있다고 들었다.

제 언니를 원망하면서.

나는 가까스로 애원을 짜냈다.

“그만, 그만… 듣지 마, 세리아! 얼른 뒷걸음질이나 쳐!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머, 너는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모녀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당신도 당장 물러서라고 했어!”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세리아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말없이 제 어머니를 응시하는 세리아의 눈빛은 두려움과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무, 무슨 짓을…….”

“델핀의 어머니 말이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여인은 그렇게 자랑스러운 어조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죽였단다.”

오래 전 눈보라에 묻어 버렸던 유르디나 가문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세리아의 어머니가 쫓겨났어야 했던 사정.

흔들리던 세리아의 눈동자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