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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2)화 (582/649)

Chapter 582 - 7. 질투는 나의 힘(82)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아카데미가 위치한 중부는 때 아닌 폭염으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북부는 아니었다. 도리어 다가오는 겨울을 알리는 전령처럼 눈과 얼음의 향연이 열리던 참이었다.

그 바람 소리가 어찌나 매서운지 화상을 뚫고 나올 듯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덜덜 떨리는 창문의 소음이 구슬프다. 듣기만 해도 체감 온도가 몇 도나 떨어지는 눈보라 속에서, 유르디나 가문의 주인은 잔에 담긴 포도주를 찰랑이고 있었다.

델핀 유르디나.

유르디나 성의 집무실에서, 이 매력적인 금발의 여인은 나신이나 다름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흘러내린 가운 사이로 새하얀 살결이 보였다.

델핀 선배의 말에 따르면 아무한테나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처음일 예정이라 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시간을 들여 눈에 담고 싶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델핀 선배가 던진 화두는 그 이상으로 충격적이라,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끝내 토해낸 목소리에도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리아의 어머니가, 델핀 선배의 어머니를…….”

“죽였어.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주의 일종이라 해야겠지. 네 엘프 친구들이 레오릭의 집무실을 조사하다가 밝혀낸 사실이야. 아버님도 확인해 주셨고.”

“도대체 왜?”

나는 무심코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사실 델핀 선배를 향해 던진 질문조차 아니었다.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뱉은 혼잣말에 가까웠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아차, 하는 후회를 지우지 못했다.

무려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비사(秘事)였다. 이 난데없는 진실이 제일 고통스러울 사람은, 다름 아닌 델핀 선배였다.

유르디나 부인은 어린 시절 병사(病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원인불명의 질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일 따위, 극한의 환경을 자랑하는 북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병을 앓다가 죽은 것이었다면.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델핀 선배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어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정작 델핀 선배는 심드렁한 낯을 할 뿐이었지만.

“암흑교단은 오래 전부터 북부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유르디나 가문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을 테지. 어리석은 아버님이 계약을 맺은 덕에, ‘흡혈귀’의 핏줄까지 의심받지 않고 북부에 심어 두었어… 다음 단계는 뻔하지 않겠어?”

“유르디나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고 싶었나 보군요.”

“그 과정에서 어머님이 희생당했을 뿐이야. 문제가 있다면, 그 음모가 들통났다는 점이지.”

잔에 담긴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델핀 선배는 그렇게 단언했다.

무미건조한 음색이었다.

마땅히 느껴져야 할 슬픔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그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에 도리어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혹시 델핀 선배가 일부러 강한 척을 하고 있나 싶어서.

그러나 델핀 선배는 내게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가문에 귀빈이 찾아왔다더군. 이름을 밝히지 않은 노마법사가 조언을 해준 모양이야. 우리 어머니의 병환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노마법사? 이름도 밝히지 않은 노인을 귀빈으로 모셨단 말씀입니까?”

누가 들어도 수상한 이야기였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 진리를 추구하는 그들 중에는 더러 목표가 과정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부류가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민간에서 전승되는 설화 중 절반 이상은 나쁜 마법사가 등장하겠는가.

그러니 귀족들은 마법사를 초청할 때도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노마법사?

귀빈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심지어 그 솜씨까지 출중하다면야.

델핀 선배 또한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글쎄, 나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당시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아버님께서도 유독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계시고.”

“그 노마법사의 주장은…….”

“믿을 만하다는 게, 내 결론이야. 나뿐만 아니라 아버님과 엘프들이 내린 결론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내가 참견할 여지는 없었다.

나보다도 저 면밀히 사안을 살폈을 이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지.

그래서 나는 또 다시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내 입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델핀 선배. 세리아는…….”

“모르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흔들림 없는 어조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결코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특유의 고집스러운 말투.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흐릿한 의문을 뱉어냈다.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누가? 세리아? 혹은, 세리아의 어머니?”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픽, 하고 되다 만 웃음을 뱉어냈다. 포도주를 홀짝이는 그 입술이 유독 고혹적이었다.

“농담이지, 서방님?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가주’는 책임져야 할 자리지, 누구한테 책임을 돌려야 할 자리가 아니거든.”

“그래도 세리아가 원망을 많이 했을 텐데요. 지난번에는, 델핀 선배가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고……”

“이 또한 내가 져야 할 책임이겠지.”

그 읊조림에서 델핀 선배의 진심이 얼핏 비치는 듯했다.

씁쓸한 표정을 한 채, 술을 홀짝이는 저 여인의 어깨 위에는 얼마나 무거운 짐이 얹어져 있을까.

그래봐야 짤막한 감상에 불과했다.

이내 델핀 선배는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고, 나는 일부러 델핀 선배의 마음이 어떤지 캐묻지는 않았으니까.

가주에게는 가주의 역할이 있다.

그 너머에 위치한 외톨이의 진심을, 함부로 들춰내고 싶은 마은은 없었다.

위로는 다시 만나서 전하더라도 충분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델핀 선배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서방님도 이 문제는 비밀로 해줘. 세리아는 이대로 멍청하게 남 탓만 하고 있는 쪽이 어울리거든.”

이윽고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끝맺는 말이 하나.

“그러는 편이, 조금이라도 귀염성 있지 않겠어?”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후에는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델핀 선배는 못내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 객관적으로 볼 때, 전력이 너무 부족한데. 차라리 다음을 노리는 편이…….”

“델핀 선배, 가주는 책임을 지는 자리라 하셨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진홍빛 눈동자에, 옅은 이채가 감돌았을 뿐.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재차 강조했다.

“제게도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마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리아가 진실을 듣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

세리아는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제 어머니의 고백을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이안은 저 앞에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표정에서 사내의 심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다.

이안과 델핀이 약속을 나눈 지 단 며칠만에, 세리아는 듣지 말아야 할 진실을 듣고 말았다. 이 참사가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직 운명을 제외하고서는.

덜덜 떨리는 세리아의 입술이 목소리를 짜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뿐.

“아, 으, 아…….”

딱, 딱, 따닥.

도를 넘은 충격이 전신의 근육을 경련시켰다. 턱 근육도 그 예외는 아니라서, 세리아의 이는 서로 부닥치며 날카로운 소음을 뇌리에 꽂아 넣었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는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대상을 가정한 공포가 아니었다.

단지 진실이, 세상이,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과거를 향한 절망이나 진배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피에 취한 세리아의 어머니는 제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괴물이었으니까.

괴물이 어찌 인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세리아는 덜컥 겁이 났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도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존재했으므로.

나 또한 괴물인가?

뒤죽박죽 얽혀 들어가는 기억 속의 핏빛의 화상이 떠오른다.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지금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어. 그러지 않아도 델핀의 어머니는 병약했거든. ‘저주’로 조금만 몸의 균형을 흔들면, 알지? 특히 우리 가문의 주술은 고대에 실전되었던지라 들킬 걱정도 크지 않았단다.”

“흐으, 으, 흐으……”

“델핀, 그 못난 계집애는 제 어미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도 모르더구나. 어린 계집치고는 당차게 굴었지만… 죽는 날에는 눈물을 숨기지 못했지. 세상의 이치가 이렇단다.”

은발의 여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떠들었다.

마치 소중한 가르침을 내리는 부모처럼.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세리아의 마음 따위는 알지도 못하면서.

“빼앗지 않으면 빼앗길 뿐이야… 너는 델핀에게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빼앗긴 거고, 이 어머니는 델핀으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은 거지.”

무너진 기억의 댐이 온갖 장면들을 망막에 퍼붓는다.

원망했던 모든 말들.

얼마 전에 쏘아붙였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날’이라니? 무슨 소리…….]

[어머니를 쫓아냈던 날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한 거야.

덜컥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여인의 목소리는 이어진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허공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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