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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3)화 (583/649)

Chapter 583 - 7. 질투는 나의 힘(83)

“들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네 아버지는 내 차지가 되었을 테고, 유르디나 가문은 네 차지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 망할 늙은이 때문에…….”

[세리아, 그날은 말이지…….]

델핀은 그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니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냉혹하고 근엄했던 델핀이 아니었던가.

계시와 같은 깨달음이 찾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알고 있었구나, 언니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단다. 너는 내 딸이자 흡혈귀의 조카니까, 네 힘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내게 말하지 못했던 거야.

그날의 진실을, 내 원망을 감내해서라도.

“무, 무, 무슨…….”

울음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물든 목소리는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세리아의 낯가죽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울음, 웃음, 절망, 분노, 증오, 원망.

모든 감정들이 집약된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오직 하나뿐.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륵 흘러내리고.

“자, 내 딸아. 조금만 피를 빌려주련? 용의 피를 먹은 너니까, 분명 내게도…..?”

콱!

명치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각에, 은발의 여인은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 서서히 제 복부를 향했다.

그곳에는 주먹이 꽂혀 있었다.

다름 아닌 제 딸의 주먹이.

여인이 의문을 토해 낼 틈은 없었다.

쾅, 하고.

포탄처럼 날아간 여인의 몸뚱어리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에 처박힌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했던지, 몇 그루나 되는 나무가 으스러지며 쓰러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림자 하나가 비산하는 목편 속을 내달린다.

눈물 몇 방울이 잔상처럼 궤적에 남았다. 비통한 절규는, 그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로 내질러지고 있었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아아악……!”

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폭주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무렵이었다. 지금의 세리아는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기보다, 동물과 비슷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무장을 굳이 다룰 필요가 없기도 했고.

이미 온몸이 흉기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무작정 분노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면, 도리어 검보다 육체가 더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은발의 여인은 마침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던 도중이었다.

중상을 입은 데에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기까지.

어지간한 마수조차 죽음을 각오해야 할 부상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몸을 일으킬 기력이 남아있다는 것은, 여인의 육체 또한 내구도에서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봐야 세리아와는 무관한 이야기였지만.

세리아의 육체 또한 강건하기로는 금속과 비교해야 할 수준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세리아가 육탄전에서 밀릴 걱정은 없었다.

쿵, 하고 터져 나오는 묵직한 충격파.

단지 두 여인의 몸이 충돌한 결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또 다시 몇 그루의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고, 어느덧 은발의 여인 위에 올라탄 세리아는 다짜고짜 주먹을 내질렀다.

팍!

가죽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이 옆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핏물.

세리아가 진심을 담아 때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소녀의 입에서 연달아 원망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 무슨 짓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어머니를 잃어야 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알아?! 아니, 당신만은 알아야 하잖아! 도대체 어, 언니한테… 아니, 우리 가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세리아.”

의외로 평온한 음색이었다.

나지막이 딸의 이름을 부른 여인은, 서서히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세리아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역겨운 사랑이다.

세리아는 처음으로 그렇게 깨달았다. 사랑도 역겨울 수 있단 사실을.

“아직도 인간인 체를 하는구나.”

“나는 인간이야……!”

“아니, 너는 내 딸이잖니.”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여인은 재차 상냥한 낯빛을 지어 보였다.

세리아는 주먹으로 그 낯짝을 으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 나와 마찬가지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도대체 뭘……!”

“네 옷에 묻은 피.”

간주도 없이 증오를 토해내던 세리아의 숨이 멎었다.

푸른 눈동자가 말없이 제 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흥건한 핏자국이 몇 개나 자리하고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비로소 세리아의 뇌에 끼어 있던 안개가 개인다. 여태껏 잊고 있었던, 폭주했던 당시의 기억들.

은발의 여인은 새하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과연 네 피일까?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세리아의 몸이 다시금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기억, 기억, 기억.

피가 터져 나온다. 세리아는 웃고 있다.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저 뇌리에 가득 찬 생각은 하나뿐이다.

‘이안 선배를 가져야 해.’

“으, 아, 으…….”

“이래도 네가 인간 같니? 너와 나, 도대체 무엇이 다르지?”

탁, 하고.

여인의 손이 단단하게 세리아의 어깨를 붙들었으나 반항은 없었다. 여인은 세리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목소리를 덧붙였다.

“피는 절대 속일 수 없는 법이지.”

탁, 탁.

어른이 된 딸을 치하하듯 여인의 손이 두어 번 세리아의 어깨를 두드린다.

“…..과연 내 딸답구나, 세리아.”

아으, 흐으, 하악.

세리아는 신음을 제외한 그 어떤 말도 되돌려 주지 못했다. 단지 절망에 빠친 눈빛으로, 과호흡을 반복하고 있을 뿐.

여인이 서서히 상반신을 잡아당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입술 사이로 숨겨져 있던 새하얀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 딸의 목덜미를 물고, 피를 갈취하기 위해서.

서서히, 서서히.

세리아가 덜덜 떨고 있는 동안에도 여인의 송곳니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의 숨결이 세리아의 목덜미에 와 닿으려던 찰나.

팍, 하고.

여인의 이마에 도끼날이 틀어박혔다.

“……세리아.”

풀썩, 하고 여인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를 뒤로 하며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었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 아직도 덜덜 떨고 있는 세리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질질 끌다시피 세리아를 어머니의 몸뚱어리 위에서 끌어내리기까지.

세리아는 그때까지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두 손을 어깨 위에 얹는 사내의 눈동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비치고 있었다.

“너는,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네가 잘못한 건…….”

“제 잘못이에요.”

울음소리처럼 터져 나온 고백이었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세리아의 두 눈에서는 맑은 이슬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안도 오랜만에 보는 감정의 격류였다.

“제가, 제가 괴물이라서… 주, 주제 넘은… 흐윽, 사랑을 해서…….”

“괴물이라니?”

“괴물의 딸이니까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뱉는 한탄을 앞두고, 어찌 함부로 입을 열 수 있을까.

이안은 일순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위로라도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두 남녀를 평화롭게 두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난폭한 울림이었다.

벌써 두 번째, 난데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축은 강렬한 용트림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강도는 이전보다도 몇 배나 강해진 채였다.

그 진원지는 명확했다.

숲의 중앙, 아마도 대마녀와 흡혈귀가 전투를 벌이고 있을 장소.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그러지 않아도 대마녀는 흡혈귀에 비해 살짝 밀리는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전투가 진행 중이라면, 대마녀가 밀리고 있을 공산이 컸다.

심지어 결계의 핵은 얼마나 파괴되었는지조차 불명.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틀, 비틀.

이안은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마에 도끼가 꽂힌 은발의 여인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딛고 있던 중이었다. 팟, 하고 강제로 뽑아낸 손도끼의 흔적으로부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피를 줄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은 어딜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일단 온몸에 자라나기 시작한 털이 그랬다. 귀가 길쭉해지고, 눈매는 더욱 얇고 사나워졌으며,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 팔과 다리까지.

짐승.

그래, 마인의 진정한 모습은 이랬다.

악신과 계약해서 인간과 마수의 경계에 위치한 이들.

이안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 바쁩니다. 슬슬 도망치시죠.”

“그렇게는 안 되지, 사위.”

키득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지나치게 높은 음정이 고막을 바늘로 쑤시는 듯 불쾌했다.

그래봐야 치명상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사내는 입맛을 다시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 끝내지 않으면, 대마녀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그러한 결론을 내렸을 찰나.

팍, 하고 핏물과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끄, 윽……?!”

당연히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푸른 빛줄기가 사내를 지나치는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 광탄이 꿰뚫는 것은, 박쥐의 형상을 한 괴물의 팔이었다.

사내의 눈이 멍하니 광탄이 발사된 지점을 향했다.

“이안 선배, 어서 가세요!”

“……황녀 전하.”

워낙 의외의 인물이었던 터라, 이안은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이 시점에 황녀가 나타나다니?

평소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망막에 비치는 현실은 너무나 명확했다.

“이미 엘시 선배는 숲의 중앙으로 떠나셨어요! 결계의 핵은 대부분 파괴했고, 남은 건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서 가서 흡혈귀를 상대해 주세요!”

“하오나…….”

“얼른!”

으득.

이안은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황녀의 의지는 상상 이상으로 확고했다. 이제 와서 고민이나 걱정 따위를 덧붙여 봐야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다만 유일하게 남은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세리아.

이안의 눈이 미련을 담아 제 후배를 훑었으나, 시간은 이미 분초를 다투고 있었다.

쿵!

다시 한 번 땅이 흔들렸고, 이안은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야 한다.

황녀는 으득으득 이를 갈며 외치고 있었다.

“저는, 용의 핏줄이에요. 언제까지나 짐덩이로 남을 생각은 없어요!”

일순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이안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는 이내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땅을 박차기 직전, 그의 아련한 눈빛이 황녀를 향했다.

“세리아를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살아 남으세요.”

“당연한 말씀을……!”

그것이 끝.

탕, 하고 또 다시 격발음이 터져 나온다. 이안은 그 소리를 뒤로 하며 전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또 앞으로.

아마도 저 앞에서는 ‘흡혈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최후의 싸움이 눈앞이었다.

사내가 최후의 수단까지 짜낸 마지막 전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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