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4 - 7. 질투는 나의 힘(84)
대마녀는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인형(人形)은 낯익은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 못해도 수백 년 전부터 알고 지냈던 질긴 인연의 형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한때는 피를 나눈 가족이었다. 가문의 존경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핏줄이 몰락할 때까지는, 단 몇 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세상이 대마녀의 재능을 깨달을 때까지만.
결계는 시간과 공간을 왜곡한다. 대마녀가 일그러진 공간 사이를 통과하자, 난반사 되는 빛무리가 그리운 목소리를 재생했다.
대마녀도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다.
어린 시절, 미숙하고 무뚝뚝했던 제 자신을 누군가 보듬어 주고 있었다. 은발의 여인은 말없이 대마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입에 문 막대 사탕만을 쪽쪽 빨았을 뿐.
상냥한 조언이 안온한 풍광을 흔든다.
“오늘도 공부를 걸렀더구나. 마법 스승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니?”
소녀는 대답이 없다. 여인은 그 시큰둥한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 소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너무 쉽니?”
“……조금은.”
“그래도 해야 해.”
안온한 음색으로 여인은 재차 소녀를 타일렀다.
“그것이 귀족이니까. 때로는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존재하지.”
따스한 손길이 소녀의 어깨 위로 새처럼 내려앉는다. 소녀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리라.
“너는, 우리 가문의 기둥이 될 거야. 너는 천재니까… 나중에도 이 언니를 옆에서 지켜줘야지?”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대마녀의 손이 복잡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연달아 몇 개의 상징을 그리던 손을 중심으로, 새하얀 마법진이 펼쳐졌다.
‘이따위 꿈은 이제 지긋지긋해.’
쾅, 하는 짤막한 폭음이 꿈결처럼 멀리서 들려 왔다. 유리처럼 깨져 나간 공간의 틈새를 빠져 나온 대마녀의 앞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상 위에 오른 소녀는 모두의 환호를 받고 있었다. 어느새 너무나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천재란 그러한 존재다.
모든 찬탄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범인의 노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짓밟고 정점에 선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소녀는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아마도 조명이 비치지 않는 구석으로 떠난 제 언니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모든 찬사가 언니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무대가 아닌 관중석에 서서 영혼 없는 축하를 받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문에 동량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소식에, 여인은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넘치던 아이였어요. 저 아이를 가르치려고 초빙한 마법사가 어찌나 고생했던지… 후후, 그래도 다행이네요. 제가 연구를 하는 사이에도 가문을 지켜 줄 기둥이 생겨서.”
그때까지만 해도 여인의 목소리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소녀가 참으로 좋아하던 온기가.
하지만 소녀는 어렸고, 타고난 재능으로 살아 왔던 만큼 인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소녀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만한 사정은 충분했다.
언니의 대화를 훔쳐들으며 소녀는 결심했다.
언니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 주겠다고.
그러면 또 다시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을까.
대마녀의 손이 다시금 수인을 맺는다.
조롱을 담은 음성이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우리 사이는 정말 좋았는데, 동생아. 모두가 부러워 마지않던 자매지간이었지…….”
“닥쳐.”
냉소적인 단답과 함께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폭음.
대마녀의 몸은 이제 땅으로 꺼진다. 바람에 나부끼는 옷가지가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자를 꾹 눌러 쓰면서, 소리 없는 착지.
어느덧 텅 빈 광야가 보였다. 그곳에 선 수십 개의 거울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며, 어지럽도록 망막을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또 다시 기억이 뇌리를 파고든다.
“스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가지 난제를 풀었다더군요.”
“’혼의 그릇’과 ‘다원소 병립 술식’이라…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질 날도 머지 않았어.”
속닥이는 소리들은 더는 낯설지 않았다. 다만 소녀가 얼떨떨했던 것은, 여인의 위태로운 미소였다.
언제나 짓고 있던 상냥한 웃음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살얼음판을 닮은 낯빛은 그 틈새로부터 얼핏 질척한 감정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속삭이는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급류처럼 기억 속의 풍경을 휩쓸어 버리면서.
“그런데, 두 난제는 차기 가주가 연구하고 있던 주제가 아니었나요? 평생을 바쳐 고민해 온 문제가 고작 몇 년만에…….”
“동생이 차기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지도 모르죠. 무얼, 가문에도 흥복이 아니겠습니까. 유능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그것이 남부의 법칙이니.”
“그렇다면 저 아이는 모든 걸 빼앗기게 되겠네요.”
어린아이가 개구리한테 돌을 던지는 꼴이었다.
그렇게 떠드는 이들 중에서 악의를 가진 자는 없었다. 그러한 마음을 품을 정도로 상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러한 관심 또한 예전에는 언니의 것이었는데.
그날 부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대마녀는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다시금 손에 마력을 결집시켰다. 파직, 거리며 튀는 전하와 함께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원소 병립 술식’.
하나의 인간이 두 개 이상의 원소를 다룰 수 있게 하는 비전이었다. 수백 년 전의 마도학계에서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난제라 생각했으나, 어느 천재 소녀 하나의 손에 해결된 문제이기도 했고.
대마녀는 문득 스치는 과거의 풍광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이따위 기억이라도 몇 번이나 반추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지 않으면 복수심이라도 무뎌질까 봐?”
“착각하지 마렴.”
사뿐사뿐 흙을 즈려밟는 소리.
고혹적인 외모를 한 은발의 여인이 수십 개의 거울 중 하나의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대마녀의 앞에 과거의 화상을 비추던 물건이었다.
‘흡혈귀’, 일세를 풍미한 마인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경계’의 내부나 다름없는 공간이야. 상식도, 물리법칙도 통하지 않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법칙 또한 지극히 제한적이거든.”
“그럼 이 기억들은 뭐지?”
“글쎄, 너와 나의 ‘교집합’이라고 할까.”
서서히 걸음을 내딛으며 혀를 굴리는 여인의 목소리는 새를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 대마녀가 보았던 언니도 이랬었다.
품위 있고 자비로운 귀족.
냉철한 두뇌와 따스한 마음을 갖추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랬던 언니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영락했을까.
실은 대마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재능이란 저주다.
이를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야 했으니까.
물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과거였다.
“오행(五行)이 서로 순환하듯, 사람과 사람 또한 서로 맞닿아 가며 삶을 만들어 가지. 그 ‘연(緣)’의 교차점을 보여주고 있는 거야.”
“우리 사이에서는 좋은 기억도 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그러한 기억들이 아니지. 너도 잘 알고 있잖니?”
흡혈귀가 뒷짐을 지자 허공에 화륵, 하고 도깨비불이 떠오른다.
핏빛으로 타는 불덩이는 얼핏 보기에도 불길해 보였다. 더불어 흡혈귀를 중심으로 차츰차츰 그 면적을 넓혀 가는 피 웅덩이까지.
어느덧 수십 개의 거울들에 금이 가 있었다.
그 사이로 흘러 넘치는 핏물들이 땅을 적신다. 이 모든 혈액들은 흡혈귀의 충실한 수족이 되리라.
누가 보아도 대마녀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곳은 흡혈귀의 결계 내부였고, 대마녀는 본체를 꺼낼 수도 없었다. 만일 대마녀가 본체를 불러 오는 순간, 흡혈귀 또한 제 본체를 대수림의 결계 밖으로 내보낼 테니까.
그렇게 되면 종말이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남부 열왕국은 다시 한 번 불바다가 될 테고, 고삐 풀린 괴물이 작정하고 몸을 숨기기 시작하면 추격은 지극히 어려워지겠지.
대마녀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대마녀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남은 손으로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새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구름을 그리며 흩어지자, 여인은 질긴 인연에게 물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이 모든 것이 널 끌어들이기 위한 밑작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대마녀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후우, 하고 깊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만을 다시 뱉었을 뿐.
흡혈귀의 눈빛은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나를 무작정 쫓아올 사람도, 이론적으로 나를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도 너밖에 없어. 내가 말했지, 이곳은 오행으로 이루어진 결계라고. 나를 죽이고 싶다면, 오행을 모두 다룰 줄 알아야 해.”
“그리고 그럴 사람은 오직 나뿐이고?”
“전설 속의 용이라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풋, 하고 옅게 웃음을 터트린 대마녀는 이내 곰방대를 정리했다.
‘용’이라.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대마녀의 선전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다섯 원소를 모두 다룰 수 있는 이는 온 대륙을 통틀어도 대마녀가 유일했다.
물론 이를 모르고 흡혈귀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너만 죽이면 날 해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지. 드디어 너를 죽이고, 내 존재를 증명하는 거야.”
“남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존재라… 하찮군.”
“그럼, 달리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
끝내 울컥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흡혈귀는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색채가 짙었다. 선정적이다 싶을 만큼 강렬한 증오의 빛깔이 푸른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품어 왔던 원한이다.
그야 가벼울 리는 없겠지.
대마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온몸에 마력을 두르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내 모든 것을 앗아갔는데! 너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어. 너를 쓰러트리고, 짓밟고, 죽이고 나서야! 그래야만 나는 ‘나’를 되찾을 수 있다고!”
“재차 말하지만, 날 죽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러면서 대마녀는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직 균열이 덜 인 거울이었다. 그곳의 조각난 파편 중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을 비추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강하고 상냥하던 여인.
수백 년 전, 대마녀가 ‘언니’라 부르며 따르던 인간이 있더랬다.
“이미 그토록 빛나던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데! 다시 한 번 잘 봐, 지금 당신이 얼마나 영락했는지! 시샘에 미쳐 칭얼거리는 어린애만 남아있을 뿐이잖아!”
“……닥쳐.”
“기품 있고 아량 있던 내 언니는 이미 죽었어!”
드물게도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한 차례 목청을 높인 대마녀는, 이윽고 어지럽다는 듯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후우, 후우.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대마녀의 눈꺼풀은 다시금 열릴 수 있었다.
짙은 피로와 슬픔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 시선을 마주한 은발의 여인은 이를 으득으득 갈아 보였다. 노골적인 적의가 칼날처럼 대마녀를 겨누고 있었다.
대화?
더는 필요없었다. 만일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미 수백 년 전에 해결했을 테니까.
대마녀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광야를 제외한 모든 것이 지워진 세계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새 소리도, 짐승이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소리도, 바람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공터.
수백 년을 살아 온 두 존재가 무덤으로 삼기에는 실로 적절한 장소가 아닌가.
그렇게 조소인지, 고소인지 모를 미소를 머금으며 여인은 읊조렸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바라던 바야… 이제, 끝내자.”
그것이 짧은 평화의 끝.
시작은 흡혈귀의 선공이었다.
콱, 하고 피웅덩이로부터 수백 개나 되는 송곳이 치솟았다. 하나하나 그 예기와 경도가 범상치 않았다.
만일 수천의 병력이 이곳에 있더라도 감히 대적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흡혈귀의 상대는, 나약한 인간 수천 따위가 아니었다.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마도의 끝을 본 자이자, 남부 열왕국의 대모(大母).
위대한 대마녀는 조용히 제 주먹 안에서 휘몰아치던 불과 뇌전의 구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대지와 하늘을 통째로 뒤흔드는 폭음.
이는 지금부터 벌어질 이적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폭심을 중심으로, 허공이 균열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