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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5)화 (585/649)

Chapter 585 - 7. 질투는 나의 힘(85)

쩌저적-

마치 공간이 유리나 수정이라도 된 듯한 광경. 하지만 이까짓 현상으로 호들갑을 떨 만한 이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과 벼락의 연회가 나뭇가지처럼 일대를 뒤덮었을 뿐.

쾅, 쾅, 쾅, 쾅!

피의 송곳들은 그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터져 나가고 있었다. 일제히 파편이 비산하는 장면은, 마치 무언가를 축하하기 위한 폭죽 같아 보이기도 했다.

허나 흡혈귀 또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낭창낭창 뻗은 여인의 팔이 곧장 대마녀를 향해 뻗어졌다.

우우우우우우우-!

저 멀리에서, 해일이 인다.

지평선을 뒤덮으며 핏빛 악령의 무리가 대지를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이를 두고 ‘달려온다’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엎치락뒤치락하며 제 몸을 뒤섞어 가는 악령들은 저들이 만든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지 못했다. 뭉개지고 철퍽거리는 무정형의 존재들은 차라리 액체에 가까웠다.

단지 악다구니를 쓰는 입과 찢어질 듯 크게 뜨인 텅 빈 눈만이 흉물스레 남아있었을 뿐.

핏빛 파도는 그 규모만큼이나 순식간에 일대를 덮쳐 버렸다. 이제야 막 시작된 불과 벼락의 축제는, 그 무시무시한 질량과 부피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쾅!

대마녀가 악령의 무리에 치이는 소리는 그랬다.

파도보다는 차라리 소 떼에 치였다는 설명이 정확할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막강한 운동력을 지닌 핏빛의 악령 사이로, 악다구니와 함께 팔이 뻗어져 나왔다.

작은 체구의 대마녀가 저항할 틈은 없었다.

악령들은 물어뜯고,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대마녀를 저들 속으로 파묻으려 애를 썼다. 대마녀가 그 안에 융화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그럼에도 오직 하나, 대마녀의 새하얀 왼팔은 하늘을 향해 당당히 뻗어져 있었다.

태양이라도 움켜쥐겠다는 듯 힘 있게 주먹을 쥐면서.

이윽고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

슥, 하고 하늘을 횡단하는 빗금을 경계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

그 양은 말 그대로 ‘해일’, 핏빛 악령으로 만들어 낸 착시 따위는 다른 진짜배기 재앙이었다.

쿠구구구구궁!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물줄기가 대지를 강타하자, 핏빛 악령의 무리는 지반과 함께 형편없이 터져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핏빛 파도는 해일에 흠뻑 젖으면서도 끝까지 힘겨루기를 하는 활약을 보였다.

만일 홀로 빠져 나온 대마녀의 손이 또 하나의 수인을 그리지만 않았다면.

찢겨진 하늘에서 무수한 낙뢰가 떨어진다.

콰광! 쾅, 쾅!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 낙뢰는 물줄기를 타고 제가 품고 있던 전하를 유감 없이 퍼트렸다. 아무리 흡혈귀가 불러낸 악령의 무리더라도, 두 가지의 재앙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비명 소리, 타는 냄새, 그리고 축축한 공기.

다시 땅을 딛은 대마녀의 발밑에서 핏빛의 시체가 질퍽였다.

그럼에도 전투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 아직이야!”

흡혈귀가 울부짖을 때마다 피가 날 선 움직임을 보인다.

때로는 폭탄처럼 터져 나가고, 수만 발의 화살이 되어 폭우를 쏟아 붓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채찍처럼 춤을 추는 날붙이가 되기도 했다.

대마녀의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대마녀의 낯빛에는 피로가 더해졌다. 눈밑에 거뭇한 자국이 드러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앙을 몇 번이나 불러낸 끝에.

대마녀는 흡혈귀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증오와 원독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한 여인을.

“어떻게!”

“본체가 아니면, 고작 이 정도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악다구니를 쓰는 흡혈귀를 앞두고, 대마녀는 그렇게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그러자 흡혈귀의 눈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투둑, 투둑 터져 나온 실핏줄이 여인의 분노를 말해 주고 있었다.

대마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스스로 쌓아 올린 실력이 아니라면, 한계는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너는 ‘경계’를 볼 줄만 아는 듯한데.”

“……그게 무슨 소리야?”

“계약으로 얻은 힘은 불완전하다는 소리지. ‘경계’를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나오는 힘을 이용할 줄도 알지만… 그저 그뿐. 진짜배기 마스터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해.”

흡혈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손이 꼼지락거릴 때마다 핏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마녀의 빈틈을 찾았다. 하지만, 여태껏 모든 공격을 파훼해 왔던 대마녀가 아닌가.

당연히 쉽사리 빈틈을 내줄 리가 없었다.

도리어 제 손에 서서히 마력을 집중시켰을 뿐.

이미 전세는 넘어간 뒤였다.

“다시 말해, ‘경계’를 전장으로 삼은 네 잘못이란 거지.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를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마스터뿐이야.”

“나도 본체의 힘이 있었다면……!”

“하지만 지금은 없지.”

그러면서 대마녀는 서서히 손을 들여올렸다.

흡혈귀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보일 터였다. 저 손이 아래로 그어지면, 흡혈귀의 목숨은 없다.

대마녀는 오랜 인연의 종지부를 앞두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래서, 결국 이 꼴……!”

바로 그때.

“꺄, 꺄아아아아아아악!”

팍, 하고 핏물로 이루어진 팔이 잠시나마 대마녀의 손목을 틀어막았다. 흡혈귀는 그새 몸을 일으켜, 헐레벌떡 내달려 도주를 개시하고 있었다.

대마녀는 그 몰골을 보며 칫, 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추한 꼴을……!”

이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 하고 결계의 내부가 세차게 흔들린다. 그러더니 하늘과 땅이 움푹 패이며 새까만 동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의 붕괴 전조.

외부에서 결계의 핵을 타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로 흡혈귀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겠으나, 지금만큼은 달랐다.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자 흡혈귀는 망설임 없이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마녀의 마법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대마녀에게 선택지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급히 땅을 박차고 내달려, 흡혈귀의 뒤를 따라 구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하지만 대마녀는 알지 못했다.

그 까마득한 동공의 아래에서, 무슨 광경을 목도하게 될지.

“끄, 어어…….”

우득, 하고.

흡혈귀의 목뼈가 부러진다. 너무나 간단히 벌어진 일이라, 대마녀는 일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넋을 놓아야 했다.

뭐지?

어둑한 주위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서는 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다만 그 안을 거니는 인물과 사물의 형상만큼은 분명했다.

모순적이었지만, 이조차도 경계가 지닌 기묘한 특징 중 하나이리라.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

시체, 시체, 시체.

텅 빈 눈동자를 한 시체들이 결계의 바닥에 수도 없이 깔려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마녀가 이처럼 놀랄 까닭은 없었다.

이곳은 흡혈귀의 본거지다.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마녀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든 시체들이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흡혈귀’의 모습을.

흠칫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여인의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사륵사륵.

옷자락이 마찰하는 소리조차 고아한 여인이었다. 어둠의 틈새로, 수백 수천의 시체로 이루어진 왕좌 위에서 걸어 내려오는 존재의 인물화는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대마녀조차 일순 숨을 죽일 정도로.

우득, 우드득.

여인의 무게를 받아내는 시체의 뼈가 박살나는 소음이 불쾌한 음율을 연출했다.

“이제야 찾아왔구나. 조금 지루했단다, 새로운 장난감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무슨 짓을.”

마른침을 삼키면서, 대마녀는 그렇게 입술을 달싹였다.

여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직전에 상대한 ‘흡혈귀’ 따위와는 격이 다른 마력이었다.

마치, 그래.

‘흡혈귀’의 본체를 보는 것처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자 여인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짓이냐니? 언제나와 같이, 연구를 하고 있었단다. 이 언니가 무슨 난제를 풀고 싶어했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니?”

“그건 이미 내가…….”

“아니.”

싱긋 입가로 호선을 그리며, 여인은 대마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건 불완전해. 하지만 나는 달라. 기어코 수백 년의 걸친 연구 끝에, 완성시킬 수 있었지.”

그리고 공기가 떨리기 시작한다.

대마녀의 본능이 강렬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솜털이 쭈뼛 서고, 숨이 막힐 듯 마력이 밀집되며, 그 가운데서 아무런 변함 없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

진정한 ‘흡혈귀’는 상냥한 음색으로 속삭였다.

대마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바로 그 목소리로.

“……보여줄까?”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나기 단 몇 초 전.

두 자매의 대화였다.

**

나는 온힘을 다해 내달리고 있었다. 따로 방향을 정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울림이 잦아지고 있었으니까.

남쪽 숲의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폭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그 폭발의 중심지가 어떤 꼴일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엘시 선배가 앞서 갔다는 점이었다.

나는 결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나와 달라서, 마법에 무지한 나라도 결계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처치를 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내 기대가 옳았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일그러지고 깨져 나간 공간.

단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왜곡이, 숲 한복판에 일어나 있었다. 그 안으로 통하는 구멍과 함께.

처음부터 존재하던 통로라 해도 믿을 만큼 절묘한 위치였다.

그렇게 감사하며, 내가 결계 내부로 발을 내딛은 직후.

“케엑, 켁……..”

내 눈앞에는, 흡혈귀의 손아귀에 붙들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대마녀와.

“도, 도망… 흐그으윽?!”

으스러진 팔다리로 내게 기어오려다가, 핏빛의 말뚝에 발목을 잡힌 엘시 선배가 보이고 있었다.

“……어머.”

지독히도 아름다운 외모를 한 여인과 함께.

‘흡혈귀’였다. 다만,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는 더욱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님이 하나 더 찾아왔구나. 이제, 네가 마지막이겠지?”

그녀는 가슴이 떨릴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느끼며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한참이나.

수백 년 전, 온 대륙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던 괴물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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