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6 - 7. 질투는 나의 힘(86)
기괴한 풍경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세상에는 낙조처럼 내려앉은 핏빛의 윤곽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사물을 구분케 하는 유일한 경계선이었다.
더불어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는 시체들은 어떠한가.
하나같이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그 생김새 또한 유사해서, 동일한 인물이 수만 번에 달하는 죽음을 당했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그래서 나는 함부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시체가 발에 채이는 느낌이 섬뜩했을뿐더러, 내 앞에 선 적이 풍기는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던 탓이었다.
‘흡혈귀’.
일전에 마주한 적이 있던 상대였다. 그때는 다소 풋풋한 인상을 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 다시 마주친 흡혈귀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순수하다기보다는 나긋한 느낌.
또한 성숙하고, 여유로우며, 아름답다는 감상이 차례대로 시신경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불어 그 가녀린 외모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위기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바람에 꺾일 꽃을 보는 심정이라고 할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자는 규격 외의 괴물이다. 내 본능이,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지 않은가.
죽는다.
식은땀 한 방울과 함께 떠오른 문장이었다.
대마녀도, 엘시 선배도 저 자의 자그마한 흥미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괜히 자극했다가는,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둘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흡혈귀가 당장 나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일까.
여인은 도리어 반갑다는 듯 살풋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많이 놀랐니? 아무래도, 내 ‘조각’ 중 하나를 만난 적이 있는 듯한데.”
“……’조각’?”
나는 그 수상쩍은 어휘에 말꼬리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각’이라니.
내가 만났던 ‘흡혈귀’는 고작해야 전력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흡혈귀는 몇 개의 조각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흡혈귀는 의외로 친절한 성격인 듯했다. 최소한 나의 의문에 답해 주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대마녀를 패대기 칠 만큼은.
“꺄윽!”
대마녀가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자, 이윽고 핏빛의 사슬이 대마녀의 자그마한 몸뚱어리를 칭칭 감아 버렸다.
여러모로 철두철미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못난 동생이 입고 있는 껍데기가 보이니? ‘의체’라 불리는 물건이지. 인간의 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 말이야.”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느끼며, 천천히 흡혈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일단 대마녀가 흡혈귀의 손에서 풀려났다는 점이 중요했다. 나는 몰라도, 대마녀라면 저 괴물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였다.
또한 내게는 비장의 수가 남아 있기도 했다.
시간 정지.
아무리 전설적인 괴물이더라도, 멈춘 시간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다. ‘성자’나 ‘검공’조차도 많은 제약을 받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으니.
아주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그새 대마녀를 구하고, 협공을 한다면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흡혈귀가 이를 모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든 말든 여인은 느긋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본래는 내가 연구하고 있던 기술이었단다. 도중에 못난 동생이 끼어들어 내 발상을 훔쳐 가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가짜는 가짜일 뿐… 결국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혼의 그릇’을 완성시킨 거야.”
“이 수많은 시체들이 전부 의체입니까?”
“그래, 내 혼을 담은 그릇들이지. 비록 내 본체는 움직일 수 없다지만, 내 혼과 힘을 담은 조각들을 하나씩 밖으로 빼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 짝, 하고 맞부딪히는 손바닥.
대답은 뻔했다. 지금 내 눈앞에 선 존재야말로, 그 해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결계를 빠져나온 건가.
비유컨대 ‘흡혈귀’라는 덩어리를 작게 쪼개어 나누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촘촘한 그물망이더라도, 빈틈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만일 그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충분히 작아질 수만 있다면야.
다만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지점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흡혈귀’를 닮은 의체가 이처럼 많다는 점이 그랬다.
무려 수백이나 되는 의체였다.
대마녀가 검공에게 언급하지 않았던가. 의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수백이나 되는 의체를 비밀리에 제조할 수 있었는지.
흡혈귀는 이러한 의문마저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사실, 의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 그 점이 유일한 난관이었지만… 나는 곧 새로운 결론에 생각이 닿고 말았단다.”
“……미친년.”
쿨럭, 하고 핏물을 한 줌 뱉어내면서.
대마녀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연두색 눈동자가 증오와 공포를 담고 있었다.
“의체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자원이 필요한 까닭은, 혼을 담기 위해서는 육체를 정밀히 재현해야 하기 때문이야. 최소한 진짜배기 육체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아무런 대가 없이 그만한 물건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흡혈귀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쯧쯧 찼다.
진심으로 대마녀의 사고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윽고 흡혈귀가 손을 한 번 퉁기자, 내 앞에 쓰러져 있던 시체들의 낯가죽이 하나둘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변형’이라 불러야 하리라.
흡혈귀을 닮아 있던 시체들은 하나같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닌 공통점이라고는, 은발과 청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이는 어느 혈족이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 가면서 육체를 만들어야 하지? 이미 존재하는 육체를 활용하면 되는데.”
“아무리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넘어서는 안 될 금도가 있어……!”
“나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뿐이야.”
대마녀의 피 끓는 호소에 답하는 흡혈귀의 어조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나는 그제야 이 수많은 시체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흡혈귀의 혈족들.
그들이 지니고 있던 힘의 원천은, 사실 흡혈귀의 혼을 조금씩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아이들은 힘을 원했고, 그래서 내 힘을 조금 나누어준 거야. 그러다 내 혼에게 받는 영향이 너무 커지면 종종 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흡혈귀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발밑의 시체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가 보았던 ‘흡혈귀’도 그렇게 착각에 빠져 있던 혈족 중 하나였을까.
나는 조용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딱히 피가 끓거나 할 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문득 이러한 물음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라 생각하던데.”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흡혈귀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는 재차 새어 나오는 의문을 이어갔다.
“당신의 혈족들 말이야. 당신을 ‘어머니’라고 불렀어.”
“아아.”
훗, 하고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미소를 머금는 여인.
심장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내 가슴은 잔잔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아이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던데… 네가 한 짓이니? 안타깝구나, 그 아이들만 있었다면 좀 더 많은 힘을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끝.
수십에 달하는 ‘아이들’을 잃은 감상은, 고작해야 그 정도가 전부였다.
적어도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용한 도구를 잃어서 안타깝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문득 여태껏 죽여 왔던 적들을 떠올렸다.
길포드, 레오릭, 그리고 흡혈귀의 혈족들까지.
실로 허무한 삶들이 아니던가.
암흑교단과 계약한 이들의 말로는 대개 이랬다.
세상에게 버림받아 매달리지만, 결국에는 암흑교단에게도 버림받는 불우한 운명.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실감하고 말았다.
역시, 암흑교단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다.
“후후, 그래도 괜찮아. 본신의 힘 중 삼분지일 정도는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어차피 본체가 아닌 이상 이보다 더 출력을 높일 수는 없지. 이제야 증명의 때가 찾아왔구나.”
이제 흡혈귀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었는지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단지 깊은 감회를 담은 시선으로 대마녀를 내려다 보았을 뿐.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온 대륙에 알릴 날이!”
그러면서 흡혈귀가 서서히 손을 치켜들었을 찰나.
팍, 하고 빛줄기가 내달린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는 질주였다. 바닷속을 쏘다니는 칼치처럼, 멈춘 세계 속을 유영하는 내 몸놀림은 재빨랐다.
다만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살짝 모자랐을 뿐.
텅, 하고 정지한 시간으로부터 내 몸이 퉁겨져 나온다. 일그러진 시공에서 빠져 나온 내 눈앞에는, 어느덧 대마녀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정작 대마녀를 동여맨 핏빛의 사슬을 풀어내지는 못했으니까.
내가 헐떡이며 지친 기색을 보이자, 흡혈귀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내 기습에도 당황한 기색 따위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내 한계 따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알고 있단다, 꼬마야. 네가 많이 지쳐 있다는 사실… 그동안 온갖 수를 다 써서, 불가능하다고 불리는 업적을 세워 왔다고 들었지. 대단하구나, 훌륭해!”
짝짝짝.
그렇게 손뼉을 치는 흡혈귀로부터 나를 제지할 기미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도리어 해보라면 해보라는 듯한 자신감만이 엿보일 따름이었다.
내 사나운 시선이 여인을 향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말이야, 그동안은 운이 좋았을 뿐이잖아…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러면서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
동시에 대마녀의 입에서 괴로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마녀를 옭아맨 사슬이 더욱 강하게 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끄으, 으으으윽……!”
“참고로 그 사슬은 ‘대마법사’라 불리는 이들도 해제할 수 없단다. 그만큼 복잡한 술식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지칠 대로 지친 햇병아리 하이 익스퍼트가 아무리 애를 써봐야…….”
바로 그때.
캉, 하고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중첩해서 울려 퍼졌다. 못해도 수십 번,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도였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상반신을 굽힌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내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연 수백 년을 살아 온 노괴답다고 해야 할까.
흡혈귀는 곧바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 챘다.
“후후. 시간을 멈춘 뒤 타격점을 최대한 하나로 모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이제 얼마나 더 시간을 멈출 수 있을지…….”
캉, 캉, 캉!
캉, 캉, 캉!
하지만 흡혈귀의 여유로운 말투는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수십 번의 도끼질이 핏빛 사슬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별빛을 흩뿌리는 내 손도끼는 조금씩 핏빛의 사슬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흡혈귀의 미간이 좁아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녀 정도나 되는 괴물이 깨닫지 못할 리가 없겠지.
내가 시간을 멈추고 쏟아내는 도끼질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슨 짓을…….”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