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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87)화 (587/649)

Chapter 587 - 7. 질투는 나의 힘(87)

내가 멈추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는 것.

당연히 흡혈귀로서는 상정 외의 사태일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시간 정지’와 같은 강력한 기술은 무한정으로 사용이 불가능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하이 익스퍼트 따위가 아니라 ‘마스터’라는 호칭을 받았겠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가능한 기적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신경 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흡혈귀가 넋이 나간 사이, 몇 번이나 더 손도끼를 휘둘렀을까.

이윽고 쨍그랑, 하는 소음과 함께 빛의 입자가 흩날렸다.

핏빛의 사슬이 깨져 나갔다는 증거였다.

그때까지도 흡혈귀는 할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나를 유심히 살피는 푸른 눈동자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만이 엿보였다.

이는 가까스로 풀려난 대마녀도 다르지 않았다.

“너, 어떻게… 아니, 괜찮은 건 맞냐? 첫째야?”

대마녀의 걱정은 지당했다. 그만큼이나 내 상태는 겉보기에도 심각해 보였으니까.

내게는 주변 사람의 반응을 살필 겨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다. 혹사 당한 뇌와 폐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생생해지는 광경이 존재했다.

뇌의 주름 사이사이를 헤집는, 낯선 사내의 기억.

머릿속의 혈관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투두둑, 하고 눈의 실핏줄이 터지며 시야가 옅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르면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끙끙거리는 신음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흡혈귀는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대가 없는 힘은 없지. ‘거래’를 했구나?”

대마녀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흡혈귀가 고민에 잠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대마녀는 내 앞을 일부러 막아섰다. 무력화된 나를 지키기 위한 시도로 보였다.

정작 흡혈귀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못난 동생아, 아직도 모르겠니? 네가 본신의 힘을 끌어오지 않는 이상, 나를 이길 수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이라도 본체를 불러오는 건 어떨까?”

“그새 네 본체는 결계를 빠져나갈 테고?”

으득으득 이를 갈며 내뱉은 반문에, 흡혈귀는 짤막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대마녀의 등 뒤로 수십 개의 알 수 없는 도형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혼을 조각냈다지만, 혼이 덩어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심이 필요해. 그러니 네가 최대한 끌어 올 수 있는 힘은 삼할 정도?”

“그 정도로도 충분해.”

그렇게 흡혈귀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주먹으로 허벅지를 마구 두드렸다. 슬슬 전투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내 예상대로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콰지직, 하고 불과 바람, 전하가 일시에 뒤섞이며 빛줄기를 만들었다. 무려 다섯 개의 원소가 모인 마법이었다.

그 폭발력은 상상할 수도 없으리라.

하지만 이곳은 흡혈귀의 결계 내부였다.

쾅!

흡혈귀가 단지 손짓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반이 뒤집히고, 하늘에 균열이 일며, 대마녀가 애써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대마녀가 핏물을 울컥 뱉어낸 것은 물론이었다.

이것이 결계 바깥에서도 느껴지던 지진의 원인인가.

“……너 같은 도둑년에게, 벌을 주기에는 말이지!”

그러면서 흡혈귀가 다시금 손날을 내리긋기 직전.

휘청이며 몸을 일으킨 나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었다.

오러의 과도한 사용은 혈도에 지독한 무리를 주었다. 흘러넘치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내 눈에서는 은빛의 전하가 파직거리며 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내 몸은 멋대로 땅을 박차고 내달린다.

말 그대로 무의식.

이미 내 의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느덧 나는 흡혈귀의 앞에서,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은빛의 오러를 흩뿌리고 있었다.

‘해(解)’의 묘리.

하지만 상대는 전설적인 마인이었다.

쾅, 하는 폭음이 공간을 때리며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홀로 탄생한 운동량이 나를 덮치는 감각은 생경하다 못해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일렁이던 공간의 왜곡이 거두어진 자리에, 색채를 되찾은 흡혈귀가 짜증 어린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귀찮게……!”

그리고 다시 한 번 폭음.

인위적으로 일으킨 폭발은 아니었다. 단지 흡혈귀가 손으로 검면을 때렸을 뿐인데, 팔의 뼈가 부러질 듯한 압박이 전해졌다.

그러한 위험에도 내가 검을 놓지 않은 까닭.

그것은 반격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푸슉, 하고.

핏물이 튀기자 흡혈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덧 그 어깨에는 자그마한 관통상이 나 있었다.

‘해(解)’로 흩어놓았던 오러를 ‘결(結)’로 뭉쳐 단숨에 쏘아낸 결과였다.

말하자면, 도도히 흐르던 강물이 좁은 물길을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그 관통력은 여타의 기술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삼할의 힘을 되찾은 흡혈귀조차 관통상을 허용할 정도였으니, 그 위력을 짐작해 볼 만하리라.

물론 안타까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본래 흡혈귀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내 예상대로 흡혈귀의 어깨에 난 상처는 놀라울 만큼 급속도로 아물어 버렸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어느덧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그 다음은 흡혈귀의 차례였다.

흡혈귀의 완력을 이겨내지 못한 내 검은 퉁겨 나간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흡혈귀의 주먹과 발이 차례로 내 팔과 다리를 강타하는 미래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콰득, 으득.

신체 부위가 뼈째로 으깨져 뜯어져 나가는 감각을 아는가?

평생 모르는 편이 좋았을 느낌이었다. 나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왼팔과 오른다리를 잃고 너덜거리는 살점을 움켜쥐었다.

그래봐야 팔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하체의 출혈을 막지는 못했지만.

등 뒤에서 대마녀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첫째야! 크윽……!”

그와 함께 하늘 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다시 떠올랐으나, 결과는 늘 같았다.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자 하늘이 사라진다.

과장이나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지 않아도 칠흑 같은 어둠밖에 없던 하늘이었지만, 그것이 공간째로 뜯겨 나가는 광경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손아귀로 종잇장처럼 공간을 뜯어가는 느낌.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또 하나의 어둠이었다.

그나마 이전보다는 시각적으로 좀 더 낫긴 했다. 새로 만들어진 하늘에는, 핏빛의 달이 떠 있었으니까.

선홍빛 달빛이 선연했다. 섬뜩한 조명을 받은 흡혈귀는, 다소 짜증스러워 보였다.

“둘이라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과연 전황은 좋지 않았다.

나는 명백한 전투불능이었고, 대마녀도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러다 쓰러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신음을 흘리는 엘시 선배는 언제 정신을 차릴지도 미지수.

이곳에서 걸음을 내딛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발소리조차 없이, 사뿐히.

서서히 내게 다가오는 흡혈귀의 눈동자에는 흐릿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슬쩍 제 어깨어림을 내려다 보는 눈으로 보아 하니, 내게서 한 방 먹었단 사실이 꽤 분한 모양이었다.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진다. 숨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고, 출혈량이 많아질수록 내 정신은 혼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격은 인상 깊었어… 내 못난 동생이 한창 잘 나갔을 때가 떠오르더구나.”

그래서 더더욱 용서할 수 없지만.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도 같았다. 이미 혼절하기 직전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흡혈귀의 손이 서서히 치켜올려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하는 것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었으니까.

이제야.

이제야 끝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찰나.

“무슨……!”

흡혈귀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척추를 뜨겁게 달구는 통증.

서서히 감기던 눈꺼풀이 자동으로 열릴 정도였다.

“이게, 뭔… 끄으,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에 묻힌 공간 속에 무수히 많은 핏빛의 실들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견고한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는 그 실선은, 나와 흡혈귀에게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 등줄기를 파고든 핏빛의 실이 맥동할 때마다, 작열감이 느껴진다. 그 통증이 불러온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팔다리가 재생된다.

신성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기적이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제물 정도로는, 더는 내 몸뚱어리를 치료할 수 없을 터인데.

반면 흡혈귀와 연결된 핏빛 실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흡혈귀의 몸을 칭칭 동여매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도록.

이처럼 기이한 힘을 다루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겠지.

이내 흡혈귀의 입에서 증오로 가득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탐욕'……!”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탁,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 하나가 우아한 착지 자세를 선보였다. 살짝 무릎을 굽히며 충격을 상쇄하고, 양팔을 펼치며 예법을 차리듯.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얼핏 눈에 띄었다.

더불어 아슬아슬한 노출 수위를 보이는 칠흑의 법복까지도.

소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노래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폐쇄적인 암실에서, 남녀가 단 둘이 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라? 좋지 않지, 좋지 않아… 여동생으로서 결단코 반대야!”

“제 오빠와 흘레붙길 원하는 미친년이……!”

흡혈귀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이를 갈았으나, 소녀의 마음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도리어 소녀는 몸을 일으키며 한 쪽 눈을 찡긋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다름 아닌, 나를 향해.

“자, 오빠를 사랑하는 여동생이 왔어! 이제 안심해! 오빠는 내 것이 될 때까지, 절대 망가져서는 안 되니까!”

여전히 정신이 혼미해지는 대사였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릴까 하다가, 끝내 한숨을 내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래, 싸우기는 해야지.

그것이 ‘계약’이니까.

남매의 공동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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