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8 - 7. 질투는 나의 힘(88)
협공(挾攻)은 의외로 오랜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다.
전장은 삶과 날붙이가 오가는 장소였다. 조무래기도 아니고, 고도로 숙련된 살인자들의 대결에서는 자그마한 빈틈조차 생사를 가를 정도였다.
하물며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는 상대와 함께 무기를 휘두르다니.
자칫하다가는 서로의 진로를 방해할 위험이 컸다. 그리고 이처럼 촌각에 불과한 망설임마저 목숨을 앗아가는 곳이, 바로 전장 아니던가.
그래서 의외였다.
나와 소녀의 손발이 놀랍도록 자연스레 맞물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톱니바퀴가 합을 맞추듯, 소녀는 내 공세를 예견하다시피 보조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신의 힘 또한 출중한 그녀였다.
호흡까지 잘 맞기 시작하니, 합격(合擊)의 효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흡혈귀’조차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였다.
내달리는 은빛의 궤적을 뒤따르는 핏빛의 실선.
흡혈귀는 왼손으로 내 검을 쳐냈으나, 뒤이어 날아온 핏빛의 실에 팔이 묶이고 말았다. 이를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검로를 틀어 재차 일격을 가했다.
텅 빈 왼쪽 어깨를 향해서.
물론 흡혈귀가 내게 순순히 당해줄 턱이 없었다. 오른손이 내 검을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다리를 타고 기어 오르는 핏빛의 실 탓에 급히 손을 떼야 했지만.
어느덧 흡혈귀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이, 것들이 쌍으로……!”
쾅!
은발의 여인이 이를 악물며 팔을 거칠게 휘두르자, 몸을 묶고 있던 핏빛의 실낱들이 삽시간에 터져 나갔다. 더불어 결계를 통째로 뒤흔드는 폭음까지.
대마녀가 고전했던 기술이었다.
본래라면 나도 그 충격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동그라져 땅을 굴러야 정상이었다.
내 곁에 소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말이다.
툭, 하고.
거미줄처럼 펼쳐진 핏빛의 실들이 교차하며 내 몸을 부드럽게 받아 주었다. 이 실들의 주인인 소녀는 이미 허공에 몸을 뉘이고 하품을 하는 여유마저 보여주고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채 돌아 누운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한여름의 해먹 위에서 낮잠을 청하기라도 할 듯한 모양새였다.
이내 비릿한 미소와 함께,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머, ‘질투’… 생각보다 고전하는데? 설마 결계의 힘까지 빌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델피렘 님께서 실망하시겠어.”
“입 닥쳐.”
으득으득 이를 갈며 씹어 뱉은 소리.
흡혈귀는 흙이라도 묻었다는 양 손을 탁탁 털어냈다. 그 손목에 옅은 홍조가 비치고 있었다.
아마도 무리해서 팔을 휘두른 대가이리라.
그래봐야,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아물어 버릴 상처였지만 말이다.
나는 참 불공평한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핏빛 달만이 눈치 없이 밝은 곳이었다.
언젠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침 두 여인이 다음으로 올린 화제가 그와 연관되어 있었다.
“내 본체만 불러올 수 있었어도, 너희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칠죄종의 힘조차 제대로 각성하지 못했으면서!”
“하지만 당신 결계에 간섭할 실력 정도는 되지. 자, 봐. 저 하늘에 뜬 멋진 달을.”
그러면서 소녀는 슬쩍 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고혹적인 미소를 보였다. 핏빛의 달이 조명처럼 소녀의 매력적인 외모에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델피렘 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지… 저 달이 떠 있는 이상, 당신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흥.”
흡혈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얼핏 보기에는 웃기지도 말라는 의미로 보였으나, 그 눈빛에 어린 감정은 좀 더 불쾌함에 가까웠다.
반박은 할 수 없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저 달을 본 적이 있었다. 저 소녀와 처음으로 대적했던 날이었으리라.
지하 공동에 떠올라 있던 핏빛의 달.
아마도 저것이 소녀가 다루는 힘의 원천인 듯했다.
내가 새로운 정보를 가슴에 새기고 있자, 흡혈귀는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재차 소녀를 추궁했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거지? 하루이틀 정도로, 그렇게까지 손발이 잘 맞을 리가 없는데.”
“으응? 그야 당연하잖아. 나와 오빠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였으니까.”
짝, 하고 두 손을 모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어둠에 잠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순 소녀를 중심으로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착각.
여전히 홀로 딴 세상에서 살아가는 듯한 여자였다. 하기야, 대개의 광인(狂人)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었으니.
소녀는 진심으로 감격에 복받쳐 말했다.
“이건,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가 되라고 정해놓은 신의 뜻이 아닐까? 아아, 오메로스 만세! 이처럼 멋진 반려를 예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기고 있네… 보나마나, 매일 제 오빠를 관음하다 보니 검술까지 눈에 익은 거겠지. 너 같은 이상성욕자야 뻔하잖아?”
흡혈귀의 노골적인 조롱에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는 ‘탐욕’의 눈초리는 얼핏 보기에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소녀가 저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내게는 더 무서웠지만.
두 미치광이의 대화는 이제야 끝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사랑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야, ‘질투’? 평생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당연하겠지만!”
“그까짓 감정에 매달릴 까닭이 어디 있지? 내 인생의 목표는 오래 전부터 하나뿐이었는데.”
“하앙.”
알 만하다는 듯,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볼래? ‘사랑의 힘’ 말이야.”
슬슬 두 사람끼리 자존심 대결이라도 벌일 모양새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는 허탈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멋대로 떠들길래 한 마디 하는데, 나는 암흑교단의 끄나풀 따위와 ‘사랑’은커녕…….”
“오빠, 달려!”
물론 내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텅, 하는 소리와 지금껏 내가 파묻혀 있던 핏빛의 실들이 나를 퉁겨 냈기 때문이었다.
탄성을 더한 질주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를 체험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본능처럼 땅을 밟은 내 앞에는,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는 흡혈귀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들고 있던 검 끝을 좌하단으로 떨어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다음으로 이어질 기술은 금사검(金獅劍).
단숨에 일곱 줄기의 검격이 상하로 그어진다. 맞물리는 이빨과도 같은 이 궤적이야말로, 유르디나를 북부의 맹주로 만든 일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설 속의 마인이었다.
그까짓 기술이야, 얼마든지 파훼할 수 있겠지.
그 사지를 노리는 수백 다발의 실선만 없었다면 말이다.
콰득, 콰득, 콰득!
마치 살이 아니라 단단한 나무를 베는 듯한 감각이었다. 일곱 번의 검격 중 흡혈귀의 살갗에 틀어박힌 것은 단 셋, 그마저도 절단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흡혈귀는 이를 상당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분기탱천해서 목에 핏대를 세우는 꼴이, 얼핏 보기에도 그래 보였으니까.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지……!”
이윽고 일섬(一閃).
핏빛의 선이 허공을 종단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절단하는 피의 절취선이 일순간에 내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해 버렸다.
파바바바바박!
선홍색 실선들이 터져 나가는 소음이 섬뜩하다. 마지막 순간, 결(結)의 묘리를 활용해 검면을 세웠지만 내장까지 뒤흔드는 그 충격마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커헉, 하고 한 줌의 핏물을 토해내고.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설상가상으로 내 짐덩어리는 하나가 더 있었다.
“꺄아~”
누가 보아도 가식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내 품으로 몸을 던지는 소녀가 하나.
‘탐욕’이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는 몸으로 망설임 없이 내 품에 안겼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를 받아내기는 했지만, 이제 막 내장에 충격이 가해진 나로서는 황당한 마음뿐이었다.
이 여자가 또 왜 이래?
수수께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일명 ‘공주님 안기’라는 자세로 내 품에 안긴 소녀가, 얼굴을 부비적대며 달콤한 숨결을 토해냈기 때문이었다.
“아아, 깜짝 놀라서 떨어질 뻔했어.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다, 냄새 좋… 아윽?!”
나는 그 말을 듣다 말고 소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고꾸라진 소녀의 존재감 넘치는 엉덩이가 하늘 위로 치켜들어졌다. 그래봐야, 곧바로 몸을 일으켜 버렸지만.
소녀는 제 이마를 쓰다듬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높였다.
“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우리는 한편이잖아!”
“한편 맞아?”
소녀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진 것은 그때였다.
허를 찔린 기색은 아니었다. 다만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물었을 뿐.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자꾸 보조만 하는 거지? 네가 전면에 나서면, 훨씬 더 편해질 텐데.”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내 의문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흡혈귀는 우리에게 굳이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도 없이 실 위에 누워만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시답잖은 말싸움으로 시간을 때웠을 따름이지.
그러니 내 의문은 정당했다. 또 한편으로는 여태껏 구르고 구른 몸을 쉬게 할 명분을 찾고 싶기도 했고.
어느 쪽이든 내게는 이득이었다.
‘탐욕’이 배신자든, 아니든.
내 말에 소녀는 푸흐, 하고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