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9 - 7. 질투는 나의 힘(89)
“아하, 아하하하하! 뭐야, 오빠. 고작 그 정도로 삐져 있던 거야?”
“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까지 망가진 몸뚱어리, 내가 아니었다면 회복시키지도 못했을걸?”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팔을 쓰다듬는 손길.
묘하게 선정적인 눈빛을 하면서, 소녀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어쩌면, 이제 그 아루스의 창녀도 무리일지도?”
“함부로 말하지 마.”
나는 탁, 하고 그 손을 쳐내며 으르렁댔다.
“그래서, 대답은 뭐야. 우리는 한편인 거야?”
“으응, 걱정도 많아라. 그야 당연하지.”
소녀는 마음이 상하지도 않는지,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옆에 바로 섰다.
그리고 팍, 하고 두 손에 출현하는 핏빛의 채찍.
“오해하지 마, 나라고 오빠와 함께 싸우고 싶지 않았겠어? 다만, 내가 나서기 애매했던 이유는…….”
그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비석처럼 지면으로부터 거울들이 치솟는다. 방금 전 흡혈귀의 일격으로 모조리 박살나 버린 수십 개의 거울보다도 더 많은 숫자였다.
이윽고 백광을 일곱 빛깔로 쪼개는 반사면으로부터 낯선 풍경들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는 여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두운 방, 그러다 후드를 푼 눌러 쓴 누군가가 찾아오고.
불타는 저택과 대수림, 일주일이 넘도록 이어진 혈전, 끝내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흡혈귀’까지.
수많은 영상들이 일제히 재생되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많은 소리는, 도리어 그들의 실체를 정보의 바다 속에 파묻어 버렸다.
내 미간이 좁아지자 고막을 적시는 목소리가 있었다. ‘탐욕’의 부연설명이었다.
“지금 ‘경계’의 힘을 불러오고 있는 거야. ‘경계’는 일종의 집단 무의식이나 다름없어서, 반드시 저렇게 기억들이 섞여들게 되거든.”
“저 거울이 ‘경계’의 힘을 빌려오는 매개가 되는 건가?”
“후후, 맞아. 다만 저 여자가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나 또한 ‘경계’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점이지.”
이를 입증하듯, 소녀가 핏빛 채찍으로 지면을 한 번 내리치자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우우우우우-!
아무것도 없는 지면으로부터 얼굴 없는 괴물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을 찢고 올라오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더불어 찬연히 빛나는 핏빛의 달은 또 어떤가.
과거의 악몽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었다.
“또 저 불쌍한 사람들을…….”
“오빠를 위해서라면, 수백이든 수천이든 희생시킬 수 있어! 어때, 감동적이지?”
나름 애정 표현이라고 눈을 찡긋거리기까지.
더 말해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부의 말은 짧았다.
“……가자.”
“좋아! 가짜 따위가 아니라, 진짜 여동생의 힘을 보여줄 테니 잘 보라고!”
그렇게 서로의 무장을 들고, 땅을 박차려던 찰나.
“잠깐!”
편광과 달빛을 가르고, 흡혈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절박했는지 나와 소녀가 움찔, 하며 몸을 굳혔을 정도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흡혈귀는 더욱더 목청을 높였다.
“’탐욕’… 이제 그만! 장난은 그만해, 진짜 우리끼리 다툴 셈이냐?!”
흡혈귀가 이마를 짚으며 외친 말에도, 소녀는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왜 안 되겠어? 네가 먼저 우리 오빠를 노렸잖아…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감히 내 것을.”
“주면 되잖아!”
단 한 마디.
견디다 못해 외친 흡혈귀의 그 선언이, 일대를 정적에 잠기게 만들었다.
소녀의 눈이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늘어졌다.
흡혈귀는 못 당하겠다는 듯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진짜, 미친년… 바라는 게 고작 그거 하나였어? 델피렘 님께 이야기를 듣긴 했다만…….”
“어머, 델피렘 님이 귀띔까지 해주셨단 말이야? 괜히 쑥쓰럽네.”
“이렇게 큰 일을 너 혼자 벌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델피렘 님께서, 우리 둘이 다투는 걸 그대로 방치하실 리도 없고.”
요약하자면, 너도 노리고 있던 바가 아니냐는 소리였다.
어째 대화가 진행될수록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는 이제 팔짱까지 낀 채 고민에 잠긴 소녀를 향해, 한숨 섞인 물음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한편이라고 했지? 진짜배기 여동생의 힘을 보여 준다며.”
“으음, 으으음… 흐으으으음…….”
대답은 한참 동안이나 되돌아오지 않았다.
팔짱을 낀 소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침음을 삼키면서, 그러기를 얼마쯤.
다시금 눈을 뜬 소녀의 입가에는 호선이 매달려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가.
“……그걸 진짜 믿었어? 리아 킥!”
그러자마자 콱, 하고.
내 명치를 짓누르는 발길질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아, 역시나.
암흑교단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는데…….
그래도, 뭐.
다행이었다.
이제야 끝이 날 것 같아서.
내 몸이 허공을 가르며, 저 멀리 날아가 땅바닥을 굴렀다. 찢어질 듯한 파공성마저 일 정도의 일격.
의식이 암전한다.
**
전투의 끝.
허무할 만큼 뻔한 결말이었다. 암흑교단의 칠죄성 둘이 맞붙다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니 인류 측은 형편없이 패해 버렸다.
앞으로 대륙에서 벌어질 싸움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았다. 인간 따위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암흑교단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흡혈귀의 낯빛은 밝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말하자면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쪽이 알맞을 정도였다.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인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맞은편에서 사뿐사뿐 걸어오는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어, ‘탐욕’.”
“별 말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지. 특히 우리 오빠를 내게 주겠다는 그 ‘약속’ 말이야.”
흥얼거리며 맞받아치는 말 하나하나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흡혈귀는 울컥, 하는 마음에 무어라 따지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싸움은 끝났고, 거래도 끝난 뒤였다. 다름 아닌 델피렘이 중재한 싸움이었으니, 천하의 흡혈귀라 하더라도 이를 어길 수는 없었다.
단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애원했을 뿐.
“그래도, 잠깐은… 아주 잠깐은 빌려줄 수 있지? 저 남자, ‘용의 피’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흐응, 걱정 마셔.”
흡혈귀의 부탁에 소녀는 제 가슴을 활짝 폈다. 마치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양,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그 정도는 빌려줄 테니까. 잠깐 다투기는 했어도, 우리는 동료잖아? 오빠의 피 정도는, 뭐… 한 모금 정도는?”
그렇게 우쭐대면서 나눠 준다는 게 피 한 모금이라니.
흡혈귀는 허탈한 웃음을 머금을 뻔했으나, 곧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저 여자가 미쳤다는 사실은 암흑교단의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보다는 먼저, 오랜 숙원을 청산해야겠지.
흡혈귀의 푸른 눈동자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빛을 품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저 멀리, 엉금엉금 기어 이안에게 다가 선 대마녀에게로.
대마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다급한 음색에서 옅은 물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처, 첫째야… 첫째야, 첫째야! 괜찮으냐? 어서, 어서 일어나서… 너희들이라도 도망을……!”
참으로 벌레 같은 꼴이로다.
흡혈귀의 감상은 그 정도가 끝이었다. 고작해야 젊은 인간 수컷에게 빠져, 저렇게 울먹이면서 땅을 기는 몰골이라니.
이래서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흡혈귀가 질투하고, 파멸시키고 싶었던 여인은 좀 더.
좀 더 강하고 멋진 모습이었을 텐데.
하지만 그 의지 하나만은 칭찬해 줄 만했다.
아직까지도 흡혈귀의 본체를 풀어 주지 않기 위해, 제 본체의 힘을 불러내고 있지 않았으니까.
물론 쓸데없는 고집이기는 했다.
이곳에서 대마녀가 죽으면 모두 소용없는 짓이 될 테니까.
흡혈귀의 시선이 슬쩍 ‘탐욕’을 향하자, 소녀는 눈치껏 대답을 내놓았다.
“죽이지는 않았어. 우리 오빠는, 소중하니까… 나머지는 내 알 바 아니고.”
“흥, 그래야지. 복수는 내 몫이어야 하니까.”
“참, 강아지 한 마리는 되도록 살려둬. 마당에서 키우고 싶거든. 잘 훈련시키면, 착한 강아지가 되지 않을까?”
‘강아지’라.
흡혈귀는 그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강아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데.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남은 인간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마법사였는데.
그 모습을 떠올린 흡혈귀는 무심코 혀를 쯧쯧 차고 말았다.
암흑교단의 칠죄성이 손수 ‘훈련’에 나선다라.
인간성의 파편이라도 간직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저 말을 듣자하니, 진짜로 개처럼 만들어 버릴 심산으로 보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흡혈귀가 신경 쓸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패자의 운명은 승자가 결정한다. 전리품을 어찌 쓰든 간에, 그것은 ‘탐욕’의 마음에 달려 있었으니까.
그렇게 탐욕이 말없이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
흠칫, 하고 걸음걸이를 이어가려던 흡혈귀의 몸이 멎었다.
비단 흡혈귀뿐만이 아니었다. 여유로운 자태로 상황을 관망하던 ‘탐욕’이나, 울먹이며 땅을 기고 있던 대마녀 또한 눈을 부릅뜨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일어서고 있었다.
비틀비틀, 위태롭지만.
분명히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동공마저 풀려 초점마저 소실된 눈동자로, 헐떡이는 숨소리조차 가라앉히지 못하면서.
누가 보아도 비현실적인 광경.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흡혈귀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손을 휘두르려 들었다.
그보다 먼저 ‘탐욕’이 비명을 내지르지만 않았다면.
“아, 안 돼!”
그 다급한 만류에 흡혈귀의 미간이 구겨졌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음색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더, 더 몸이 망가지면 진짜 죽어버릴 수도 있어!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게 살려두기만 했다고!”
“나중에 고치면 되잖아?”
“안 돼, 그동안 회복을 너무 남용했어! 방금 전에 팔다리를 재생시킬 때도, 무려 100인 분의 영혼이 필요했단 말이야!”
흡혈귀는 하아, 하고 한숨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끝까지 귀찮게 만드는 사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내는 기어코 몸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이 없던 대마녀는, 그제야 울고불며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려 들었다.
“도, 도망… 어서 둘째를 데리고 도망치거라, 첫째야! 이곳은 내가 어떻게든……!”
하지만 그 손이 무언가를 쥐는 일은 없었다.
질풍.
눈치 채고 보면, 대마녀의 앞머리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라, 하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신속한 질주였다.
가히 빛의 속도와 준한다고 해야 할까.
이만한 속력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시간을 멈추는 것.
어느덧 흡혈귀는 눈을 부릅뜬 채, 느닷없이 등장한 사내의 명치에 손날을 꽂아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