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1 - 7. 질투는 나의 힘(91)
끝없는 황야는 시체와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날의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엠마를 찾아가 마취약을 부탁했고,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이곳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한낱 인간의 정신 안에 이처럼 광활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 장소를 오고 갔으나, 나는 이 황야의 끝을 본 적이 없었다.
넋을 놓고 해질녘의 지평선을 바라보기를 얼마쯤.
황야의 흙만큼이나 건조한 음색이 내 귓가를 사각였다.
“너무 궁금해하지 마라.”
나는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렇듯 피로한 눈빛을 한 사내가 검 한 자루를 품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갑옷과 해진 망토. ‘고철’과 비견해도 이상하지 않은 무장이었으나, 그 태생의 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마도 솜씨 좋은 장인이 제련한 물건이리라.
어째서 복식이 달라졌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벌어지는 현상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으니까.
대신 나는 얼빠진 반문을 내뱉고 말았다.
“……무엇을?”
“저 너머.”
사내가 걸음을 내딛자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문득 깊이를 더했다.
“이 공간의 끝에는 무의식이 펼쳐져 있다. 네가 보기엔 아직 이른 곳이야.”
“당신은 마치 저 너머를 알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너도 볼 수 있을 거야. 언젠가, 네가 마스터가 된다면… 네가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을.”
또 무어라 몇 가지 질문을 던지려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쓸데없는 선문답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한정적이었으니까.
결심을 굳힌 내 입이 다짜고짜 본론을 토해냈다.
“날 도와줄 수 있나?”
그러자 흘깃 나를 향하는 금빛 동공.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얕디 얕은 코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헛소리를…….”
“도와줘.”
내 반응이 의외였을까.
메마른 웃음을 터트리던 사내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의아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어. 어떻게든, 상대가 예상하지 못할 비장의 패를 꺼내야 해.”
“나는 이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애송아…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슬쩍 내 간절한 눈빛을 피하면서, 사내는 그렇게 읊조렸다.
“네 세계에 무한정 개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과율도 제대로 쌓이지 않았는데, 커다란 사건을 비틀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지난번에는 아니었잖아.”
또 다시 침묵.
사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략 짐작이 가는지, 일부러 답을 피했다. 그래봐야 내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성자와 대결할 때, 일부러 사건에 개입하기를 꺼렸지? 마지막에 성자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그때 아껴둔 인과율이, 분명 남아있을 텐데.”
“성자는 애초에 널 죽일 생각이 아니었어. 또, 내가 성자에게 승리한다고 해서 인류의 전력이 약화되거나 강화될 염려도 없고.”
내 주장을 더는 들어주기 힘들었는지, 사내는 드디어 제대로 된 반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또한 답답했으리라.
이 사건에는 다름 아닌 사내의 ‘사매’와 ‘스승’까지 얽혀 있었으니까. 그동안 보아 온 사건보다 관심이 더 갔으면 더 가지,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사내는 자진해서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보아야 할 테지.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 상대는 암흑교단의 칠죄성이야. 전쟁이 시작됐을 때, 흡혈귀의 손아귀에 몇이나 되는 생명이 스러졌는 줄 아나? 그런데 내가 만일, 그 여자를 죽인다면…….”
“설령 ‘경계’라고 해도?”
그러나 사내의 기나긴 사연이 모두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느닷없이 뱉어진 내 말이 사내의 침묵을 종용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금빛 눈동자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당신이 말했잖아. 이곳은 시간의 경계라고… 하지만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이기도 하고. 흡혈귀의 결계 내부로 진입하면서, 내가 뭘 봤는지 알아?”
사내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낯빛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말라붙은 우물과 같았고, 얼굴은 파도를 잊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불타는 대수림… 깨져 나간 공간 사이에서 기억들이 부유하고 있었어. 마치 이곳처럼.”
“……근거는 그게 끝이냐?”
“무엇보다 내가 ‘경계’를 몰라볼 리가 없잖아.”
우묵히 나를 응시하는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도 이제 ‘하이 익스퍼트’니까.”
그러자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흡혈귀의 결계와 ‘경계’의 유사성은 이미 설명을 들은 바가 있었다. 결계 속에서 흡혈귀와 전투를 벌였을 때, 대마녀가 몸소 설명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하이 익스퍼트’였고, ‘경계’를 넘은 적이 있었다. 그 미증유의 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했다. 그만큼이나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내 말 자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이제야 막 ‘하이 익스퍼트’에 입문한 주제에… 그래, 네 말이 맞아. 애송아.”
여태까지의 침묵이 이해 가지 않을 만큼 시원스러운 인정이었다.
나는 무심코 반색하며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래도 힘들다는 거야.”
다만 이어지는 말은 담백하고 명료해서, 이제는 내 입이 다물어질 차례였다.
얼이 빠진 나를 앞에 두고 사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 사건에 걸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모르겠나? ‘흡혈귀’뿐만 아니야. ‘대마녀’의 목숨까지 달려 있다고. 네 말처럼 아껴 둔 인과율을 전부 소진하고, ‘경계’의 내부를 파고든다 해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가능은 해.”
저벅저벅, 황야를 즈려밟는 발소리.
사내는 나를 등진 채 평탄한 어조를 내뱉었다.
“대신, 네가 후회하겠지만.”
도리어 평이해서 더욱 무서운 말이었다.
나는 사내의 경고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아무리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도, 상대는 ‘나’였다. 당연히 그만한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저버리지는 못했지만.
당장 주어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로서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회를 해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애송아.”
탈력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감정이 없다 못해 텅 빈 음색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다시 보니 사내의 시선이 비스듬했다.
아래로, 아래로.
그의 심상 속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향해.
“너는 대가 없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나?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내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 때처럼?”
“그래. 시체 거인을 상대했던 날에도, 분명 네게 경고했었지.”
사내의 시선이 다시금 뒤를 향했다. 흘깃 나를 응시하는 그 황금빛 눈동자는, 깊이 가라앉아 있어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경고였다.
그동안은 잊고 지냈는데, 어째서 오늘만큼은 그 말이 유독 서늘하게 다가오는 걸까.
“아무것도 버리지 않을 수는 없어, 애송아.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래도 내 힘을 빌려야겠냐?”
나는 한참이나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입술을 뗐다가, 닫았다가.
몇 번이고 고뇌했다. 내가 과연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
사실 사내의 말은 틀린 면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사내의 힘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사내의 말처럼 내가 대가를 치를 날도 언젠가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도와줘.”
결국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내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드넓은 황야를 향해 제 시선을 돌렸다.
“그만큼 지키고 싶나?”
“당신이 그래 보여서.”
말없이 황야를 바라보던 사내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 나를 뒤돌아 보았다. 그래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재차 설명해야 했다.
“이제는 지킬 수 있잖아.”
“나는…….”
“그러면 지켜.”
무어라 반박을 하려던 사내는, 결국 조용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나도, 내가 구해야 할 사람을 구하러 갈 테니까.”
그렇게 내가 말을 마쳤을 때였다.
“……다시 말하지만, 한계는 있다.”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다만 언제나와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유의할 사항을 전했을 뿐.
“결국은 네가 해야 해.”
“알고 있어, 나도…….”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그것이 마지막.
나와 사내는, 서로의 길을 향해 엇갈려 나아가기로 했다.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사내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만족해야 했으므로.
하지만 해냈다.
나는 멀어지는 정신으로, 멋대로 몸을 일으키는 육신을 보며 확신했다.
아주 잠깐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고.
사내는 몸조차 제대로 풀지 않고 말했다.
“덤벼. 시간 없으니까.”
그것이 오늘 베풀어 줄 유일한 자비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