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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92)화 (592/649)

Chapter 592 - 7. 질투는 나의 힘(92)

핏빛 달이 비추는 대지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한때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전설적인 마인도, 대륙의 막후에서 암약하며 음모를 꾸미는 상인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어째서?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식은땀만 또르륵 흘릴 뿐이었다. 인류를 멸망까지 몰고 갈 정예 중의 정예, 태초의 죄악을 품은 가장 위대한 일곱 별.

‘칠죄성(七罪星)’ 중 둘이나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 전력으로 패배를 상정하는 편이 더 우스울 지경이었다.

상대가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만 아니라면야.

아니, 가능성이 존재하기는 했다. 이미 ‘흡혈귀’는 제 조각의 기억에서 하나의 기묘한 광경을 보았던 뒤였다.

무려 ‘검공’과 일대일로 전투를 벌이던 사내의 모습.

비상식적인 이야기였다. 어떠한 비술을 동원하더라도, 그토록 갑작스레 실력이 증진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온갖 비술을 탐독한 흡혈귀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내심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다.

혹시나 저 사내가 다시 한 번 굴지의 실력자로 돌변할까 봐. 어떻게든 변수를 줄이기 위해 ‘탐욕’과 동맹까지 맺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마주한 ‘사내’는, 그래.

“어서 덤비라고 했을 텐데…….”

‘천재지변’이다.

소매를 정리하며 읊조리는 사내의 낯빛은 태연하기만 했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감정이 삭제되었다는 말이 적절할지도 몰랐다.

다름 아닌 ‘칠죄성’ 둘을 앞두고서.

도리어 얼어붙은 쪽은 흡혈귀와 ‘탐욕’이었다. 두 사람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긴장이 서린 눈빛으로 사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비? 대비?

해일과 폭풍 앞에 인간이 무엇을 대비할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대자연의 분노가 지나가기만을 엎드려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피해를 줄일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

상대는 그 정도의 실력자였다. 마치 백지 위에 올려 둔 무게추처럼, 단지 존재만으로 온 세상에 무게감을 더하는 존재.

사내는 그 사실을 어김없이 증명해 냈다.

“호의를 거절하겠다면, 좋아. 앞으로 3초만 더 기다려 주지. 셋…….”

지직, 지지직.

메마른 목소리가 숫자를 세자마자 일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치 잡음이라도 낀 듯이, 풍경이 뒤죽박죽 뒤섞이며 일순 낯선 세상을 선보였다.

광활한 황야.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낙조와 시체뿐이었다.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죽음이 건조한 대지에 핏빛을 더했다.

그래봐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이를 목도한 이들은 하나같이 흠칫 몸을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결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흡혈귀의 충격이 극심했다.

‘심상(心像)……?’

‘심상’이란 말 그대로 마음(心)의 풍경(像)이다. 경지가 오를수록 이러한 심상은 더욱 공고해지며,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해진 심상은 곧 현실의 법칙마저 왜곡하기도 한다.

그것이 ‘하이 익스퍼트’, 혹은 ‘대마법사’라 불리는 존재들이 우러름을 받는 이유이기도 했고.

하지만 만일, 심상이 그보다 더 강해진다면?

심상이 현실을 침식하기 시작한다.

바로 지금처럼.

“둘……”

흡혈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지 않은 소식은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점.

흡혈귀의 결계는 일종의 심상이나 다름없었다. ‘경계’의 힘을 불러들여, 현실의 법칙을 왜곡하고 제멋대로 주무르는 장소였으니까.

말하자면 주술과 제물로 강제로 강화한 심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처럼 공들여 쌓아 온 세계가, 일순 압도당하다니.

과연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령 저 사내가 마스터라 하더라도 불가능할 텐데.

하지만 흡혈귀에게 더 이상 고민할 여유는 남아있지 못했다. 사내가 베푼 자비가 끝나 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하…….”

“어떻게!”

본능처럼 내지른 발악이었다.

흡혈귀는 뇌리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의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몸이 그렇게 회복될 수 있지? 분명 재기불능이었을 텐데!”

“맞아!”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탐욕’의 가세였다.

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낯빛으로 외쳤다.

“그 몸은, 더는 재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나도 편법으로 되살렸단 말이야!”

“그리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지? 그 꼬마와는, 느낌부터…….”

“우리 오빠를 돌려줘!”

먼저 눈이 뒤집힌 쪽은 ‘탐욕’이었다.

제 오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에 핏발이 서더니, 곧장 핏빛의 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 숫자는 가히 셀 수도 없을 정도.

수천, 수만 가닥의 핏빛 실이 칼날이 되어 질풍처럼 몰아쳤다. 대지는 물론이고, 바람마저 엉망진창으로 찢겨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터져 나오는 지반을 긁어대며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흙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 망정이지, 만일 결계의 외부였다면 일대는 비산하는 흙먼지로 눈을 뜰 수 없었으리라.

사각사각사각사각!

끝없이 몰아치는 죽음의 선율에 빈틈은 없었다. 핏빛의 현은 제 먹잇감의 비명과 핏물을 더하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전조조차 없이 가해진 일격이라고는 믿기 힘든 위력.

이것이 바로 칠죄성이 지닌 진정한 힘이었다. 저 폭풍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가는, 아무리 위대한 마스터라고 한들 곤혹을 겪을 수밖에 없으리라.

최소한 ‘탐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착각이 깨져 나갈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득, 하고.

핏빛의 선율이 한순간에 멈춰 버렸다. 사내의 손이 뻗어 나와, 수천 가닥의 실을 모조리 쥐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순 공간에 구멍이 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에 실들이 휩쓸려 나가듯, 수천 가닥의 실들은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사내의 손에 모여 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아차’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어라?”

소녀는 낑낑대며 어떻게든 실의 제어권을 찾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팔에 힘을 주고 잡아당겨도, 핏빛의 선들이 꼼짝하는 일은 없었다.

수천 가닥이 넘는 실이, 전부.

난생 처음 겪는 사태에 소녀의 금빛 눈동자에 세찬 지진이 일었다. 그 고막을 울리는 것은, 무심하기만 한 목소리.

“……하나, 끝.”

그리고 폭발.

소녀의 금빛 눈동자가 망연히 허공을 훑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시간만이 둔중히 흐르고 있었다.

어라, 뭐지.

황금빛 동공이 서서히 제 팔 어림을 향했다. 그곳에는, 손부터 팔까지 터져 나가 텅 빈 어깻죽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명료했다.

실이 폭발한 것이다.

사내가 쥐고 있던 핏빛의 실은, 그 끄트머리부터 모조리 터져 나가며 끝내 연결돼 있던 소녀의 팔까지 날려 버렸다. 그 사실을 깨우친 뒤에야 소녀의 시간이 본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통각까지도.

처절한 울부짖음이 뒤이어 울려 퍼졌다.

“아, 으아, 아… 으,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통증을 이겨내지 못한 소녀의 몸이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는다. 그 처절한 몰골을 보며, 흡혈귀는 입술을 짓씹었다.

압도.

지금 흡혈귀의 뇌리를 채우는 감상은 그토록 짧고 명료했다. 암흑교단 내에서도 광증으로는 수위권에 드는 ‘탐욕’이 순식간에 당해 버렸다.

이제는 어떻게 할까, 라는 자문조차도 사치였다.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는 이를 악물고 손아귀를 쥐었다.

우우우웅-!

핏빛 달만이 홀로 빛나는 공간이 파문을 일으켰다. 원형의 파장은 서서히 좁아지며 흡혈귀의 주먹 쥔 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공간이 왜곡되고, 흡혈귀를 중심으로 풍경이 일그러진다.

그때까지도 사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진 소녀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고 있을 따름이었다.

분명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텐데도.

무시하는 건가?

흡혈귀는 분한 마음에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여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일대의 제어권은 흡혈귀가 쥐고 있었으니까.

한계까지 끌어모은 파장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부르르 떨렸다. 흡혈귀는 망설임 없이 이를 해방했다.

콰광!

지금껏 일어났던 지진은 장난이라는 양.

폭음과 함께 결계 내부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용오름처럼 솟구친 힘의 격류가 노리는 바는 명확했다.

아직까지도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사내.

지축이 뒤틀리는 충격이었다. 이를 압축하고 압축한 결과물이 어떨지는,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하필 상대가 사내만 아니었다면.

처음으로 사내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 슨……!”

텅,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이 기점이었다. 흡혈귀는 넋이 나가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고, 사내와 그녀 사이에는 어느덧 깨져 나간 공간의 파편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사내가 한 짓은 간단했다.

솟구치는 힘의 파도를, 검면으로 쳐낸다.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힘의 방향이 비틀려 버렸다. 사내를 향하던 막대한 운동량은 도리어 흡혈귀를 꿰뚫는 광선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하나 있었다.

흡혈귀의 결계는, 인과관계를 뒤틀어 흡혈귀를 보호한다. 자잘한 부상이라면 몰라도 치명상을 입을 만한 사태는 무엇이든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힘의 여파마저 이겨내지는 못해서.

흡혈귀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며, 한 웅큼의 핏물을 게워냈다. 입가에 묻은 핏물을 훔쳐내는 흡혈귀의 눈동자에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의문, 경악, 공포, 그리고 경외.

아무리 본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일방적으로 밀린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암흑교단에 입교한 뒤에는 두 번째일까.

첫 번째는, 그래.

흡혈귀는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름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감히 ‘델피렘’ 님을 떠올리다니.

무슨 불경한 생각을.

공포를 지우기 위함일까.

흡혈귀는 헛웃음을 지으려다가, 이내 최후통첩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푸흐, 아하, 아하하핫! 너, 너는… 후후, 너는 어차피 날 이기지 못해……!”

우뚝, 하고.

사내의 걸음걸이가 처음으로 멎었다. 그의 우묵한 눈길이 흡혈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섬뜩한 눈동자였다.

이처럼 무감정한 눈동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흡혈귀는 내심 치를 떨면서도, 더욱 확신에 찬 어조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보여?! 네 반격은, 내게 닿지도 못했어… 이 일대는 내 제어 아래에 있거든.”

“그래서?”

“인간 따위는 결코 날 해할 수 없다는 소리지!”

흡혈귀의 눈동자는 어느덧 불길처럼 타고 있었다.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쥔 그녀의 모습은, 자부심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알겠어?! 이곳의 인과관계는 내 손 안에 있다고… 세상을 이루는 다섯 원소가 내 제어 아래에 있단 말이야! 인간 따위는 결코, 결코 이 주술을 파훼할 수 없지… 만일, 전설 속의 용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흡혈귀는 열기 띤 눈동자를 사내 너머로 옮겼다.

그곳에는, 머리를 움켜쥔 채 신음을 흘리는 대마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통을 호소하면서도 사내에게서 눈을 절대 떼지 않는 여인이.

이를 목도한 흡혈귀의 입에 서늘한 호선이 맺혔다.

“……그래, 이제 알겠어. 저게 네 마지막 희망이었구나?”

이윽고 콱, 하고.

대마녀의 온몸을 핏빛의 촉수가 휘감았다. 대마녀가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뒤틀었지만, 이미 힘의 격차는 너무 명확해진 뒤였다.

온몸이 으스러지는 통증에 비명이 터져 나온다.

“으으, 끄윽, 꺄아아아아악!”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흡혈귀는 혹시 모를 변수를 모두 제거하겠다는 듯, 핏발이 선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아직 남아 있는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니면, 아니면 저 꼬맹이?!”

또 다시 터져 나오는 비명.

다음 희생양은 엘시였다. 두통을 호소하며,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던 엘시 또한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핏빛의 촉수는 곧장 자그마한 소녀의 사지를 결박해 버렸다.

그래, 이제야 끝.

모든 가능성을 봉쇄한 흡혈귀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승기에 도취된 그녀는, 그제야 시선을 사내에게로 향했다.

과연 사내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절망에 물든 얼굴? 혹은, 분해서 견딜 수 없다던가?

흡혈귀는 발악처럼 성대를 쥐어 짜내려 했다. 끝내 지우지 못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승리를 선언하기 위해서.

“너는, 네까짓 인간놈은… 오메로스의 총애를 받는 나를, 절대 이길 수 없……!”

사내의 등 뒤에 떠오른 불가해한 문자만 아니었다면.

그 빛깔마저 찬연했다.

붉은색, 푸른색, 연녹색, 황금색, 고동색.

색색들이 빛나는 문자들은 그 생김새마저 제각각이었다. 흡혈귀는 그 글씨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한때는 마도의 길을 걸었던 여인이었다.

저 문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저 글자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었다.

더듬거리며 여인의 입술이 달싹인다.

“요, 용혈 문자… 하지만, 어떻게 다섯 개나……?”

“인류를 너무 얕봤구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섯 개의 문자들이 일제히 진동하며 서서히 회전을 시작한다. 온 세상의 빛이 명멸하며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걸음.

흡혈귀는 뒷걸음질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사내는 흡혈귀의 목전에 당도해 있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내는 늘 그렇듯 고저 없이 어조로 물었다.

“……마지막 희망이 누구냐고 물었나?”

털썩, 흡혈귀의 무릎이 자연히 굽혀진다.

미물이 신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을 맞이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묻는 사내의 황금빛 동공은,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져 있었으므로.

사내는 마지막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흡혈귀의 귓가에 직접 속삭이기 위해서였다.

드물게도 이를 악문 채로, 너절한 살의를 담아서.

“바로 나야.”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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