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3 - 7. 질투는 나의 힘(93)
새하얀 빛이 가라앉은 하늘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박살 난 결계의 상단이 수정 가루처럼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텅 빈 천공(穿孔)은 순백의 도화지와 같은 속살을 드러냈고, 중천에 떠 있던 핏빛 달은 반파되어 비스듬히 기울었다.
단 일격.
사내의 발걸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움푹 패인 대지의 중앙에는 힘없이 엎어진 흡혈귀가 자리하고 있었고, 구덩이의 주변으로는 ‘탐욕’이 불러 들였던 괴물들이 산산조각 나 널리 흩어져 있었다.
그 주인인 ‘탐욕’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형체조차 알 수 없이 터져 나간 제 오른팔의 빈 자리를 움켜쥔 채,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으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이 참상을 빚어낸 장본인만이 알 수 있으리라.
나머지가 목도한 장면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빛이 번쩍였다.
그것이 끝.
이후에는 터벅터벅 구덩이를 걸어 나오는 사내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흡혈귀를 등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독한 피로를 담고 있었다.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눈빛,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몸뚱어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폭발은 강렬했다.
결계 내부에서 그 여파를 피해 갈 수 있었던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대마녀와 엘시를 옭아매고 있던 핏빛 촉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쓰러진 대마녀의 입에서 옅은 신음과 함께 묘한 소리가 흐른다.
“처, 첫째야…….”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사내의 몸이 흠칫 굳었다.
이윽고 우두커니 대마녀를 향하는 금빛 눈동자.
그의 낯빛에 처음으로 ‘망설임’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살짝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시야에 대마녀를 담았다가.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머뭇거리면서, 그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름 아닌 대마녀를 향해서.
저벅저벅 옮기는 걸음걸이가 어딘가 어색했다. 사내의 낯빛부터, 그 태도까지 모두.
오랜만에 부모를 찾아온 탕아가 이랬으리라.
어느덧 그의 걸음이 대마녀의 앞에서 멎었다. 대마녀의 눈동자에는, 옅은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내가, 내가 미안하구나… 못난 스승이, 너를 혼자 둔 탓에…….”
누구한테 하는 사죄일까.
사내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무릎을 굽히고, 아주 천천히 대마녀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을 찰나.
“용서 못해……!”
쾅, 하고 악에 받친 주먹질이 지면을 강타했다.
사내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피로에 잠긴 금빛 눈동자가 배후를 향한다. 그 끝에는, 외팔이 소녀가 하나 엎드려 있었다.
사실 ‘외팔이’라는 표현은 부정확했다.
왜냐하면 소녀의 텅 빈 어깻죽지로부터, 핏빛의 실들이 흘러 나와 팔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팔을 잃은 통증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탐욕’의 금빛 눈동자가 살의로 활활 타올랐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해하고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야? 이까짓 고통, 이보다 더한 고문! 이미 수백, 수천 번은 받아 온 나라고!”
“그런가.”
사내의 무성의한 답변과 함께, 소녀의 몸이 비틀비틀 바로 선다.
잃어 버렸던 팔은 이미 재생이 끝난 뒤였다. 부르르 몸을 떨며 분노를 참아 낸 여인의 두 손가락이 마주쳤다.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자 최후의 광채를 발하는 핏빛의 달.
섬뜩한 달빛을 받은 괴물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불공정한 거래 끝에, 영혼마저 저당 잡힌 불행한 희생양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탐욕’이 이끄는 얼굴 없는 괴한들이었다.
크에에에에에엑-!
그 가래 섞인 울부짖음은 얼핏 듣기로 비명 같이 들리기도 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리 칠죄성의 힘을 온전히 다루지는 못한다지만, 우리는 칠죄성이야. 인간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인간이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담백한 대답에, 소녀는 더욱 분개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가 적의로 번들거린다. 주인의 의지를 읽은 괴물들이 슬금슬금 사내를 포위하고 있었다.
“……좋아. 말해 주기 싫다, 이거지? 그야 천천히 들으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보다, 우리 오빠는 어떻게 된 거야?”
“글쎄.”
“당장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다음 순간.
촤르륵, 하고 하늘에 떠 있던 핏빛의 달이 풀어 헤쳐졌다. 순식간에 그 부피를 줄여 가던 달은 어느새 수만, 수십만 가닥의 실이 되어 천공을 뒤덮어 버렸다.
아마도 이것이 ‘탐욕’이 낼 수 있는 전력이리라.
심지어 소녀는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유독 밝은 빛을 뿜는 핏빛의 실 몇 가닥을 제 몸에 꽂아 넣었다.
푹푹.
이윽고 소녀의 척추에 내리꽂힌 실이 혈관처럼 맥동하기 시작했다. 선홍빛 빛무리를 끊임없이 소녀의 몸에 주입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걸? ‘칠죄성’은 인간 따위와 질적으로 달라… 머리를 잃고, 심장을 찔리면 죽는 연약한 육체 따위는 없다고. 오메로스의 은혜가 있는 한 무한히 살아나! 이제 알겠어, 당신이 얼마나 승산 없는 싸움을 걸어왔는지?!”
“승산 없는 싸움이라…….”
소녀의 날 선 협박에도 사내의 낯빛에 이는 변화는 없었다.
그럴수록 소녀는 더욱 흥분한 기색을 보일 따름이었다.
“우리 오빠를 돌려내!”
“괴물에게도 오빠가 있을 수 있나?”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몸의 주인, 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 줄 유일무이한 사랑!”
얼굴 없는 괴한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며 도약할 준비를 마친다. 하늘을 뒤덮은 핏빛의 실들이 촤르륵 교차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활로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사내는 무심한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러든 말든 ‘탐옥’은 온힘을 짜내 소리를 내질렀다. 핏발 선 눈동자가 소녀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내 오빠야, 이 나쁜 자식아아악!”
핏빛의 하늘로부터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핏빛의 비구름이 좁은 대지를 향해 내리꽂히는 내리는 광경은, 마치 핏물이 용이 되어 대지를 덮치는 듯했다. 그 위력을 이겨내지 못한 결계의 하부가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지상은 또 어떤가.
그곳에는 수백 체에 달하는 얼굴 없는 괴한들이 일제히 사내를 덮쳐 들고 있었다. 핏빛의 폭포수에 휩쓸려 탈락하는 괴물도 더러 존재했지만, 그들의 두려움은 단지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쓰러져도 몇 번이고 일어나는 불사성.
죽음조차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는, 안식 없는 존재들의 비명 소리가 폭음과 함께 사방에서 비산했다.
단 1초.
차라리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난이 일어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무자비한 포화는 상대를 가리지 않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마녀와 엘시 또한 목숨이 위험할 판이었다.
칠죄성의 진노는 매서웠다. 제 아무리 진정한 힘을 일깨우지는 못했다지만, 세상의 법칙을 비틀 수 있는 존재의 전력이었다.
당연히 일개 인간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일 이 사내를 ‘일개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이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였지만.
이변은 곧장 발생했다.
‘어라……?’
소녀는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리조차 없는 일섬(一閃).
은하수가 어둠밖에 없는 세상에 은빛의 지평선을 그렸다. 그 앞을 가로막던 장해물들은, 모조리 반토막이 나 스러질 뿐.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핏빛 실도, 몇 번이고 몸을 일으키며 달려들던 얼굴 없는 괴한들도,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지휘하던 소녀조차도.
절반으로 갈린 세상 속을 그림자가 내달린다.
‘탐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에 나설 수 없었다. 허리를 중심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뉜 상태였으므로.
그럼에도 소녀는 죽지 않는다.
핏빛의 실이 어느덧 분리된 몸뚱어리를 하나로 잇고 있었다. 단지 사내 또한 그새 소녀의 눈앞까지 다가왔을 뿐.
검은 없었다. 주먹이 이제 막 이어진 소녀의 명치를 짓눌렀다.
꾸욱, 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싶을 찰나.
쿵!
“끄으, 꺄흑……!”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막대한 충격파가 명치를 중심으로 온몸을 헤집었다. 전류를 띤 벌레들이 삽시간에 몸을 갉아먹고 되돌아오는 듯한 끔찍한 감각.
산조차 무너트리는 일격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도 한들, 붕산격(崩山擊)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소녀의 몸이 통째로 터져 나간 내막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몸뚱어리가 상대적으로 멀쩡한 괴물 몇몇이 사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이제 막 수복해 가는 소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작렬하는 업어치기.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막대한 운동량이 소녀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일대를 메우고 있던 얼굴 없는 괴한들이 폭심지를 중심으로 하늘 위로 날아갈 만큼 강력한 위력.
결계의 하부가 움푹 패이고, 소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핏물만을 질질 흘렸다. 텅 빈 눈을 한 소녀의 코와 귀에서 박살난 뇌수가 뒤섞인 혈액이 줄줄 흘려 내렸다.
이쯤 되니 핏빛의 실도 소녀의 몸을 즉각적으로 재생시키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녀의 무의식적인 공포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봐야 했다.
어차피 재생해도 또 다시 고통을 겪을 뿐이었으니까.
쿨럭, 하고 소녀의 입에서 한 줌의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듯한데…….”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소녀의 육신이 급히 회복한다.
끄으,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도 소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땅을 짚었다. 엎어진 채 사내를 올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에는, 낯선 감정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두려움.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라, 소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재간이 없었다.
사내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서서히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소녀와 눈높이가 맞을 찰나,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비틀어 쥐었다.
“꺄으, 아아악! 아, 아파……!”
“내가 널 죽이지 못해서 이러는 줄 아나?”
무심하다 못해 서늘히가까지 한 목소리.
소녀의 금빛 눈동자에 어린 공포가 깊어졌다. 히끅, 하고 헛딸국질을 하는 그 눈가에는 옅은 물기마저 맺혀 있을 정도였다.
“단지 널 죽이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야. 네 처분은 애송이의 몫이니까.”
“애, 애송이… 설마, 우리 오빠? 너, 너! 우리 오빠를 어떻게… 꺄흑?!”
쿵, 하고.
사내의 주먹이 다시 한 번 소녀의 명치를 강타했다. 핏물을 한 웅큼 뱉어낸 소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칠죄성이 아니었다면, 벌써 네 번은 넘게 죽었으리라.
내부의 장기가 모조리 터져 나간 소녀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사내는 반쯤 시체가 되다시피 한 소녀의 몸뚱어리를 망설임 없이 내던졌다.
철푸덕.
쓰레기처럼 나동그라진 소녀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사내는 헛웃음을 삼켰다.
“’오빠’라… 하, 다가올 제 미래도 모르고.”
그러면서 사내는 슬쩍 몸을 돌렸다. 소녀가 한동안은 회복되지 않으리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곳에 남은 칠죄성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움직이지 마!”
발악처럼 내지른 소리.
사내의 메마른 눈동자가 슬쩍 그 진원지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