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4 - 7. 질투는 나의 힘(94)
그곳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흡혈귀가 서 있었다. 양옆으로 손을 뻗은 채로.
그것도 대마녀와 엘시 사이에.
흡혈귀의 손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인지, 핏빛의 촉수들이 대마녀와 엘시를 구속하고 있었다. 이미 이전에도 보았던 적이 있던 마법이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낯은 여전히 무감정하기만 했다. 이를 본 흡혈귀는 더욱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이 둘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
“’혈주술(血呪術)’이군.”
사내의 확신을 담은 단언에, 흡혈귀의 입이 일순 다물어졌다.
살짝 의아한 낯빛을 하던 그녀의 입가에 곧 삐뚠 호선이 걸렸다. 도리어 설명하기는 편해졌다는 듯.
“……알고 있나 보지?”
“암흑교단이 주로 사용하는 마법 중 하나지. 대량의 혈액이 필요하지만, 암흑교단이야 짐승이든 인간이든 갈아 넣기를 서슴지 않으니까.”
“그럼 내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겠네?”
사내는 여전히 무신경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낯빛이었다.
흡혈귀는 그 건방진 태도에 일순 이를 악물었다가, 이내 억지로 얼굴을 폈다.
주도권은 이미 잡았지 않은가. 굳이 다급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방금 전에는 방심한 탓에 당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 일대의 피는 내 조종을 받고 있다고. 심지어는, 이 두 여자의 몸속에 있는 피까지도.”
“흐으, 으으으으…….”
이를 증명하듯이 붙들린 두 여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까지도, 사내의 낯빛은 건조하기만 했다.
오직 눈빛만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을 뿐.
흡혈귀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겠어?! 이 여자들의 혈관 속을 돌고 있는 피가 내 제어 하에 있는 한, 당신이 날 건드는 순간 이 둘의 목숨은 없다고!”
“우, 우리는……!”
바로 그때였다.
대마녀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실눈이라도 뜬 채 폐부를 자낸 것은.
“우리는 괜찮으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을… 끄흐으윽!”
“닥쳐.”
흡혈귀는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그렇게 대마녀를 윽박 질렀다.
그 눈동자에는 짙은 살의가 어려 있었다. 만일 사내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진작 대마녀의 목숨을 빼앗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어쨌든 사내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단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살려두고 있을 뿐이라는 티가 팍팍 내는 태도였다.
이를 보고도 사내의 목소리는 평탄하기만 했다.
“제어권이 네 손 안에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
그 반문에 흡혈귀는 하, 하고 비웃음을 깨물었다. 이윽고 흡혈귀는 살심과 복수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만만한 협박을 이어갔다.
“그래, 하지만 혈주술을 다루지 않는 한 타인의 피를 제어할 수는……!”
주르륵, 하고.
어딘가에서 핏물이 흘러 넘치는 소리가 흡혈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라, 하고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그 진원지를 쫓았다.
핏빛의 촉수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단숨에, 한 줌의 핏물로 화(化)해서.
대마녀와 엘시의 몸이 동시에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흡혈귀는 더욱더 아연해진 시선을 사내에게로 향했다.
저벅, 저벅.
사내는 어느덧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말라 올린 흡혈귀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단지 걸음을 옮겼을 뿐. 흡혈귀는 혹시나 싶어 몇 번이나 손가락을 퉁겨 보았지만, 두 여인의 혈액이 역류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흡혈귀는 이윽고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혈주술은 암흑교단의 비술이야. 악신과 계약을 맺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다고…….”
저벅, 저벅.
걸음은 막힘없이 내딛어진다.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는 흡혈귀와는 달리.
“그럴 리가, 아무리 비전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기초적인 조건마저 무시할 수는 없어… 아니, 한 인간의 몸에 그렇게 많은 심상을 우겨 넣을 수 있는 건가? 고작, 고작 인간 따위의 몸에?”
홀로 중얼중얼 추론을 이어가던 흡혈귀와 사내의 거리가 점차 좁혀진다.
흡혈귀가 아무리 뒷걸음질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궁지에 몰린 여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사내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단지 피로한 걸음을 자꾸만 옮겼을 뿐.
여인의 발악이 이어졌다.
“그 검술, 들은 적 있어… 천검산에 은거하는 칼귀신들! ‘소드 서클(Sword Circle)’의 오의구나! 그리고 방금 전에 ‘탐욕’을 쓰러트릴 때 썼던 무술은, 성국의 비전 유술! 심지어 용혈 문자는 다섯 개에, 이번에는 혈주술까지 다룬다고?!”
숫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어조였다.
여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불가능해!”
사내는, 또 한 걸음.
“불가능하다고! ‘만에 하나’ 같은 소리가 아니야… 모든 비전을 품은 존재? 그딴 건 공상이야! 한 인간은 그토록 많은 비전을 받아들일 수 없어… 심상이 불안정해진다고! 그 이전에 망가지거나 폭주해야 한단 말이야!”
흥분이 극에 달한 여인의 눈동자에서 실핏줄이 터진다.
그럼에도 사내는 말없이, 그저 걸음만을.
한 걸음, 두 걸음.
“그딴 게 가능했다면 우리 암흑교단이 진작에 시도해 봤겠지! 하지만, 수천 번을 시도했어도 그건 불가……!”
이윽고 탁, 하고.
사내의 발걸음이 흡혈귀의 눈앞에서 멎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뒷걸음질을 치던 것마저 잊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을 따름이었다.
“부, 불가… 불가능… 했었지. 그래, 단 하나를 제외하면…….”
사내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털썩, 하고 흡혈귀가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때까지.
여인의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불안, 불신, 그리고 까닭 없이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웃음.
난데없는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여인은 주저앉은 채 제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푸흐, 크흐…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설마, 설마…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고도 견디다 못해서.
여인의 손이 땅을 내리치고, 발을 구르고, 그대로 널브러져 몸을 비틀며 웃음을 짜내다가.
이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을 무렵에야, 흡혈귀는 가느다란 검지로 제 눈꼬리를 훔쳤다.
이윽고 여인의 낯에 매달리는 처연한 미소.
“수백 년 전에 뿌린 씨앗이… 너도, 우리와 동류였구나.”
사내는 아직도 말이 없었다.
*
정신이 무의식 속을 부유한다.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기억들이 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낯선 감정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우면서도, 잔혹하리만치 아픈 추억들.
내 몸이 가라앉을수록 점점 더 많은 장면들이 뇌리를 가득 메운다.
운다.
싸운다. 피 흘리고, 전진하며 온 세상을 죽일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래도 안 되나?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절망인지, 분노인지.
까닭 모를 열기가 가슴 깊숙한 곳을 달구었다. 그 감정은 너무나 뜨거워서, 호수 같던 사내의 심장은 이내 메마르고 불타버려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아직 내게는 너무 이른 기억이다.
지독히도 아프고 힘들었다. 사내가 스쳐 지나간 세월이란, 이토록 가시밭길이었던가.
발이 너덜너덜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럼에도 나아가야 했던 길.
그렇게 나는 헐떡이면서 눈을 떴다.
텅 빈 허공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는, 깨진 균열만이 주위를 메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나같이 사내의 기억을 비추는 균열들이.
나는 멍하니, 몸을 일으키려다가.
이윽고 이곳에 위치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이 텅 빈 공간의 중앙에는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깔모자 탓에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등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는 했다.
일순 망설이다가, 나는 이내 천천히 소녀를 향해 다가섰다.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저앉은 자세로 보아, 아마도 오랜 시간을 이러고 있었으리라.
나는 그 아련한 낯빛을 보고 금세 그 정체를 유추해 냈다.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
기나긴 정적을 지키고 있던 소녀는, 내 인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내가 죽은 후에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나는 일부러 감상을 얹지는 않았다.
다만 말없이 그 옆에 서서,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어느 화상을 보더라도 피범벅이었다. 그 사내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아프고, 힘들게.”
착각일까.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촉촉하게 느껴진 것은.
우리는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기로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랬을 터였다.
*
“……안녕, ‘오만’. 델피렘께 인사는 드렸어?”
흡혈귀가 눈웃음을 치며 건넨 인사에, 사내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뗐다.
“하나만 알려 주지.”
바로 그 직후.
소리조차 없는 검격이 여인의 목을 관통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머리.
이제 전해질 리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제일 싫어.”
그렇게 읊조린 사내는, 유독 피로한 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