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5 - 7. 질투는 나의 힘(95)
태초에 빛이 있었다.
그 빛으로부터 '아루스'께서 잉태되셨으니, 이것이 세상의 시작이다. 또한 아루스께서 탄생한 자리로부터 빛이 사라지거늘, 처음으로 어둠이 나타나더라.
그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바로 '오메로스'니라.
천지가 창조될 적에, 오메로스는 아루스 대신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진흙 덩어리뿐이요, 오직 아루스께서 숨결을 불어넣어야만 비로소 생명이 되었도다.
그리하여 오메로스가 아루스를 시기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나니.
거짓된 혀로 아루스를 속여 눈과 간을 하늘에 빼다 박았는데, 그것이 각각 달과 해가 되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 아루스께서 그 악랄한 속셈을 눈치 채고 그를 천상에서 추방하건대, 그때 오메로스가 이를 갈며 외치기를.
“세상이 빛으로 시작되었으니, 그 끝은 어둠이 되리라!”
오메로스가 사라진 천지는 평화로워 낙원과 같았다. 전쟁도, 병마도, 죽음도 없었으며 모든 생명이 아루스의 뜻에 따라 뛰어놀았다.
하지만 어느 날 처음으로 낙원에 의문을 품은 이가 생기니, 그의 이름은 ‘델피렘’.
불경한 자는 생각했다.
‘이것이 진정한 낙원이란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신 같이 생각하며, 신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아루스의 율법을 버리고 인간의 율법을 만들고자 감히 청하였다.
이것이 인류의 최초이자 으뜸 가는 죄악이다.
‘오만’한 자들은 의지하는 이 없이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신과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인류는 필연적으로 고독해졌다.
그러다 때때로 제 삶을 홀로 감당할 수 없는 때가 오기도 했으니.
이로써 첫 번째 죽음인 ‘자살(者殺)’이 탄생했도다.
*
툭, 하고 여인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른다.
기품 있는 외모에 걸맞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그 목을 떨군 사내는, 지친 한숨을 푹 내쉬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사내는 그대로 뒤돌아 서려다가, 이윽고 멈칫하며 시선을 아래로.
어둠밖에 없는 결계의 내부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바닥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그래서 그 새하얀 미소가 더욱 돋보였다.
사내를 조롱하는, 혹은 동정하는 그 비틀린 호선이.
금빛 눈동자에 희미한 불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 ’오만’이라…….”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사내의 낯빛이 살짝 일그러졌다.
감정을 일절 내비치지 않던 평소의 모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내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마저도 찰나에 불과할 따름이었지만.
사내는 이내 표정에 떠오른 감정의 파문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아직은 사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고, 모든 임무를 완수한 뒤에야 일말의 승산이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미련을 떨쳐내고 걸음을 옮겨야 할 차례였다.
살짝 사내의 옷자락을 붙드는 손길만 아니었다면.
무감정한 금빛 눈동자가 곧장 그 인력의 원인을 훑었다. 사실 이곳에서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인물은 얼마 없었으므로, 그 정체는 명확했다.
대마녀.
얼핏 보기에는 자그마한 소녀에 불과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내의 차가운 눈길이 닿자마자, 그 시선이 얼음이라도 된다는 양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방금 전에 ‘오만’이라고…….”
가까스로 짜낸 목소리는 그렇게 조심스러웠다.
슬쩍 사내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마치 겁 먹은 소동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천하의 대마녀가 누군가를 두려워 할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강자를 앞둔 약자의 태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언가 잔뜩 화가 난 연인을 대하는 여자의 모습이라고 할까.
낯선 분위기에 압도된 느낌이었다. 정작 사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 하지만…….”
“어차피 원해서 떠맡은 자리도 아닙니다.”
더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단호한 어조.
그러자 대마녀는 더욱 풀이 죽어 버렸다. 그렇게 대마녀가 울적한 낯을 한 채 침묵을 지키기를 얼마쯤.
결국 사내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 말도 없이 등을 돌리고 있던 시간이 거짓말이라도 된다는 듯.
“……사정이 있었습니다. 결코 인류를 배신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 전에도, 앞으로도 저는 인류의 검이자 방패입니다.”
대마녀는 이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내늗 더더욱 멋대로 구는 혀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의심하셔도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최소한 이 시간대의 ‘이안’한테는 영향이 덜 미치도록…….”
“걱정하는 거야.”
본래의 사내였다면, 무어라 대답했을까.
바로 코웃음을 치며 단박에 끊어냈으리라. 우리가 언제 본 적이나 있는 사이였냐면서.
과거는 과거고, 미래는 미래다.
사내는 이 구분을 단 한 번도 잊어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왜 하필.
이곳이 경계이기 때문인지.
묵묵하던 사내의 시선이 슬그머니 각도를 조정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바로 그때.
난데없이 피보라가 불어 닥쳤다. 흡혈귀의 시체를 중심으로 휘몰아 치던 돌개바람은 이내 회오리바람이 되었고, 이는 곧 일대를 뒤덮을 폭풍이 되어 매서운 울음을 토해냈다.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음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 안에는, 괴로워하는 영혼의 비명이 섞여 있기도 했다.
우우우우우우-!
이윽고 하늘과 땅을 쩌렁쩌렁 울리는 비웃음 소리.
“아하하하하!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푸흡, 아하하하하하하하!”
사내는 그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대마녀를 옆구리에 끼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대마녀는 어라, 하는 사이 금새 사내의 팔에 억류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질주.
다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사내는 얼떨떨해하는 대마녀에게 단 한 마디만을 전했다.
“칠죄성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흡혈귀의 본체는 대수림에 있을 텐데?!”
바람 소리를 가르기 위해 대마녀는 한껏 폐부를 쥐어 짜야 했다. 그러든 말든, 피보라는 폭우처럼 핏방울을 떨구며 사내와 대마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묘하게도 흡혈귀를 닮은 형상을 이루며.
그야말로 폭풍이 인격체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소리 높여 토해내는 웃음마저 바람 소리를 닮아 있을 정도였다.
“너도 알고 있겠지, ‘오만’… 네 끝이 어떤 꼴인지! 제 심상을 가지지 못해서, 남의 것들로 덕지덕지 기워 붙인 초라한 ‘마스터’ 따위, 오래 가지 못해! 신의 자리를 탐내는 자의 끝은 언제나 같으니까!”
그와 함께 쏘아지는 핏물의 칼날들.
바람을 타고 날아 온 혈액은 고도로 압축되어 고체와 차이가 없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절삭력만 따지자면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숨에 쏟아지는 칼날만 수십에서 수백 개.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이만한 숫자의 칼날을 매번 쳐내기는 힘들었다.
단지 사내의 강함이 그 범위를 아득히 초과하고 있을 뿐이지.
사내는 이쯤이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곧장 한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하늘에 흩뿌려지는 별빛들.
은하수가, 핏빛의 폭풍을 가르며 쏟아져 내린다.
“본체야 그렇겠죠. 하지만 저 괴물의 의체는 영혼을 조각 내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3할에 불과하지만, 제 힘을 되찾은 이상 불사성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봐야겠죠.”
“그럼 결계를 파괴해야겠구만!”
금세 사내의 설명을 이해한 대마녀는 그렇게 되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그러자 공중으로부터 사내를 덮치려던 피보라의 형상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너절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결계의 핵은 아직 외부에 남아 있어! 설마 이 결계를 탈출할 셈인가? 그럼 저 여자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
“그러는 척만 할 겁니다. 저 여자가 완전히 회복하면, 굉장히 귀찮은 일이 될 테니까.”
사내와 대마녀의 대화는 길지 못했다. 좀 더 깊은 이야기가 오고 가기 전에, 흡혈귀의 웃음소리가 소낙비처럼 고막을 덮쳤던 탓이었다.
“가짜, 가짜, 가짜… 네 운명을 끝내주마! ‘오만’의 죄에게 예정된 최후, 추락을……!”
회오리치던 피보라가 일제히 강물을 이르더니, 이내 철퍽거리며 땅바닥을 쓸어 버렸다. 끈적거리는 입을 한도까지 벌린 무정형의 괴물은, 그야말로 추레한 마물에 가까웠다.
사내가 느닷없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충고 하나 하겠는데…….”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회전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방향 전환, 그리고 한 발을 내딛는 그 자세는 검술 교본에 실린 그림이라 해도 좋을 만큼 깔끔했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검극으로 상대를 겨눈다.
그 몸집마저 짐작이 않는 거체의 정점. 그곳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을 향해서.
이윽고 일검(一劍).
검을 치켜들고, 내리긋는 단순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러온 파장은, 단순한 칼질의 결과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했다.
팍!
그 이상의 소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대지를 뒤엎은 핏빛의 괴물이, 통째로 짓눌려 온몸에서 피 분수를 뿜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태산과도 같은 압력이 으스러지는 모양새.
흡혈귀는 제대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가, 가… 짜… 끄, 으에……!”
“개연성만 충분했어도, 넌 이미 내 손에 죽었다. 귀찮은 짓 따위는 필요도 없었어.”
사내의 냉엄한 경고에도 흡혈귀는 섣불리 반응하지 못했다. 아무리 불사의 괴물이라도, 온몸이 으스러진 마당이었다. 재생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화들짝 놀란 쪽은 대마녀였다.
“죽이지 못한다고?!”
“네,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게 제 한계에요.”
사내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대마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기대, 절망, 그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기까지.
너무 사내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만큼이나 사내가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인 탓도 있었지만.
대마녀는 한층 무기력해진 음색으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제가 아닌 사람들이 해야죠.”
그러면서 사내의 눈이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향했다. 그 끝에는, 고깔 모자를 쓴 소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빛은 어딘가 아련해 보이기도 해서.
대마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실로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