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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596)화 (596/649)

Chapter 596 - 7. 질투는 나의 힘(96)

허공에는 별처럼 많은 기억들이 떠다녔다.

다치고, 무너지고, 쓰러지고, 절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검을 쥐어야 하는 사내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묘한 흠입력을 갖추고 있어서, 나와 ‘엘시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사내의 기억을 감상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는 한창 목숨을 건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 테니까.

“제대로 보이기는 합니까?”

“아니.”

즉답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나,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야 제대로 보이고 있다면 이렇게 얌전히 있을 리가 없겠지.

기억 속에는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관계의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엘시 선배’가 보다 어른스러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 원본이 엘시 선배인 이상 무슨 반응을 보일지도 뻔했다.

사실 나도 모든 기억이 보이는 것은 아니기도 했고.

몇몇 영상은 흐릿한 잔영처럼 비칠 뿐이었다. 특히 어느 기억은, 흐릿한 화상마저 비치지 않을 정도였다.

유독 짙은 슬픔이 느껴지는 회상이었는데.

엘시 선배라고 해서 사내의 기억을 모두 열람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내 추측은 곧이어 증명되었다.

“자세한 화상은 보이지 않아. 아마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대략적인 감정은 전해져. 무척이나 슬프고, 아프고… 그럼에도 일어나야 한다는 그 의무감이, 절망적일 정도로.”

그렇게 감상을 읊는 소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몽롱해 보이기도 했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사별한 연인의 기억이었다. 그의 삶이 이토록 가시밭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의 마음이 어떨지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아서.

나는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무언(無言)이야말로 최고의 언어가 될 때가 있었으니까.

“나는 왜 저 옆에 서지 못했을까.”

짤막한 의문.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머뭇거리던 나는 어설픈 위로를 토해냈다.

“선배가 없었다면, 그의 싸움도 끝났을 겁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왜 나는… 저 옆에서, 저렇게나 아파하는데……!”

울컥, 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여인의 고개가 푹 꺾였다. 목소리에 뒤섞이는 물기와 흐느끼는 음색,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남겨진 자.

사내는 그토록 고독하고 힘든 싸움을 이어갔지만,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이들의 마음도 편안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떠나보낸 자.

엘시 선배의 눈가에서 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진심으로 분하다는 듯, 자그마한 주먹이 제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왜… 흐끅, 저 곁에서, 안아 주지도 못해. 위로해 주지도 못해. 하다못해 수고했다고, 조금만 쉬어도 된다고… 그렇게, 그렇게라도 말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절절한 감정이 담긴 호소였다.

그렇게 흐느끼는 소녀의 몰골은, 너무나 처량해 보였던지라.

나는 무심코 손을 뻗고 말았다.

“선배…….”

“손대지 마!”

탁, 하고 얼얼할 만치 내 손을 강하게 뿌리치는 여인의 팔.

헐떡이며 울음을 억누르는 소녀의 눈가가 여전히 붉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결코 내게 의지하지는 않았다.

“……네가 위로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일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조심스레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재차 입술을 달싹이는 여인의 낯이 퍽 쓸쓸했다.

“나는 이미 늦었어.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이렇게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해… 하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괴로울 텐데도.

과연 그 심정을 헤아리는 날이 올까.

나는 결코 그러한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어서 가.”

울음을 꾹꾹 누르고 내뱉은 한 마디.

소녀는 어느새 검지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은 쭉 이어지고, 갈수록 비좁아지는 통로의 끝에 희미한 빛이 비친다.

“네가 가야 할 곳으로… 그리고, 너희의 세상을 지켜.”

내 발이 주춤주춤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소녀를 일별하기 직전.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뒤를 돌아 외쳤다.

“꼭 행복하게 만들게요!”

소녀의 멀뚱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았디만, 그 푸른 눈동자에 비치는 의문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재차 약속해야 했다.

“제 ‘엘시 선배’!”

그러자 소녀는 일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모자 챙을 꾹 잡아당겼다.

“뭐래, 병신이…….”

내 길은 그렇게 이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낯선 기억들이 눈과 귀를 간지럽혔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소녀의 이야기였다.

[엘시, 세상은 나약한 자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너도 라이넬라 가문의 일원인 이상, 이를 꼭 명심하거라.]

[바보야? 당연히 네가 약하니까 괴롭힘을 당하는 거지. 모르겠어? 하다못해 개들도 약한 개를 물어뜯는다고.]

[누나, 누나아… 개, 개들이… 히이이익! 사, 살려 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거쳐.

[개처럼 살아야 한다고?]

[좋아, 원하는 대로 개가 돼 줄게… 라이넬라 가문의 투견? 멋지네.]

몇 년 전의 기억을 지나고.

[……엘시, 개죽음이다.]

[푸흐, 아하하… ‘개죽음’이라고?]

[멍멍!]

몇 달 전의 기억을 통과해서.

[이 지팡이를 받거라.]

[네 인생을 살아라, 엘시… 라이넬라답게.]

[그 늙다리도 날 죽이지 못하는데… 네까짓 게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애완견?]

끝내 기억은 최근에 다다른다.

눈앞에 자그마한 등이 나타난 곳에서 걸음이 멎었다. 소녀는, 웅크린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닥에 칠흑의 막대를 떨군 채로.

“무서워, 무서워… 흐끅, 무섭다고오…….”

나는 인간의 강함에 대해 생각했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절망하고.

그럼에도 몸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보았던 사내의 기억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던가. 몇 번이나 망가지고 피범벅이 되어서, 끝내 검을 잡던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오히려 말하자면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처럼 강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인류의 명운이 걸려 있다느니, 세상을 구해 달라느니 해봐야 그 무게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혹은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리던가.

강하지 못한 인간 하나가 울고 있었다. 온 대륙의 운명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자그마한 소녀가.

“나는,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삼촌 같이 위대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이, 이제 싫어.”

덜덜 떨면서, 여인은 제 머리를 감싸쥐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나, 나 말고. 그래! 나 말고도 강한 사람들이라면 잔뜩 있잖아! 나 대신, 누군가가 세상을 구하면……!”

“안 됩니다.”

“흐갸악……?!”

내 느닷없는 단언에 엎어져 있던 소녀의 몸이 펄쩍 뛰어 올랐다.

인기척조차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몸을 뒤로 질질 끄는 폼이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다.

소녀는 눈가에 이슬이 맺힌 꼴로 소리를 내질렀다.

“너, 너… 뭐야! 지난번에 쫓겨났던 그놈이잖아?!”

“왜 하필 ‘그놈’입니까. 너무 성의 없는 호칭인데.”

“……흥, 어쩌라고?”

소녀는 그렇게 팔짱을 끼며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코웃음을 치며 볼을 부풀리는 꼴이, 꽤나 퉁명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또 나를 데려가려고 온 모양인데, 헛수고 하지 마… 나는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 앙?”

끝에 붙인 말소리는 나름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시도인 듯했다. 그래봐야 물기에 젖은 눈꼬리 탓에 딱히 무서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살짝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엘시 선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소녀는 고집스럽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돌아가지 않으려는 건데요?”

“아앙? 내 말 못 들었어? 애초에, 내가 왜 그딴 고생을 자처해야 하는데? 아프고 힘들기만 하잖아!”

“세상을 구해야죠.”

“그까짓 세상, 흥. 알아서들 구하라지.”

그러면서 소녀는 혀를 살짝 빼물고 베에- 하고 나를 놀리기까지.

이전과 같은 대화 양상이었다. 사실, 그때는 이것이 최선인 줄만 알았다.

세상을 구해야 하니까.

이러한 대의명분에 모두가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리라 생각했다. 내 동료들은, 내가 이끄는 사람들은 다들 이 전제에 동의하고 있다고 착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들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여태껏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눈치 채지 못했다. 나와 나란히 달려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

세리아도, 셀린도, 심지어는 엘시 선배도.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못해서, 나는 애써 그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엘시 선배’의 말이 실로 옳았다.

병신 새끼.

왜 그동안 모르고 있었을까.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이제 슬슬 헛짓거리 그만하고…….”

“제가 알던 엘시 선배는.”

말문을 토막 내서, 나는 그렇게 재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애써 강한 척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겁도 많고 소심한 주제에, 소리만 시끄럽고… 솔직히 귀찮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내 담백한 고백에 엘시 선배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아졌다. 그러자 낮게 깔리는 소녀의 목소리.

“이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지만 아니잖아요.”

연달아 내뱉어지는 단언, 엘시 선배는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말을 기다려 줄 틈은 없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가문의 뜻 대신 제 신념을 따를 줄도 아는 사람이었고요. 지키고 싶잖아요?”

“무슨, 헛소리를… 말했잖아! 나는, 세상 따위……!”

“소중한 사람.”

턱, 하고,

소녀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넋이 나간 눈동자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나, 나는 그런 사람 없어.”

엘시 선배는 시선을 홱 돌리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채로.

“정말입니까?”

“그, 그, 그렇다잖아! 그러니까 얼른 꺼져, 내가 돌아갈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돌아갑시다.”

“도대체, 내가 왜……!”

소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슬쩍 몸을 일으켰다. 나와 소녀의 거리가 좁혀지고, 거친 숨소리가 겹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고.

그렇게 나는 살짝 소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톡, 하는 감각조차 없었다.

입을 맞추었는지, 혹은 이를 부딪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 시야에 담기는, 부릅뜬 푸른 눈동자를 보고 대략적으로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제대로 했구나.

퍽, 하고 명치를 강타하는 충격이 느껴진 것은 그 직후였다.

나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보다도 먼저, 엘시 선배가 나를 덮치듯이 올라탔을 뿐이지.

자그마한 손이 내 멱살을 붙들고 흔들었다. 소녀의 얼굴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져 김이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엘시 선배다운 반응이라서.

“이, 이… 개새끼야! 너, 지금 소녀의 입술을 멋대로 훔쳤……!”

“사랑하니까.”

나는 옅은 웃음을 삼키며, 그렇게 말했다.

“후, 훔쳤……!”

“너무 늦었죠, 엘시 선배… 아니, 엘시.”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한다.

영롱한 호수를 닮은 동공이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내 뺨을 날릴듯이 치켜들었던 주먹의 고도가 살짝 낮아지고, 내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는 살짝 힘이 빠진다.

“훔…….”

“돌아가자, 엘시.”

그러면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울먹이는 소녀의 어깨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소녀의 몸이 딸려 나오며 내 가슴 위에 포개어진다.

훌쩍이는 소리, 원망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를 들으며, 내 손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이었다.

“야, 이… 흐끅, 나쁜 새끼야…….”

“그래, 그래.”

“내, 내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는데… 네 여동생이라는 년은 완전 미친년이지, 삼촌은 죽어 버렸지… 그런데 내가 그 역할을 이어받으라고? 말도 안 되잖아… 너, 너 때문에 그 고생을 또 해야 돼?”

“그래, 그래.”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늘어놓는 넋두리는 아닐 터였다.

나는 짤막한 말을 반복하면서, 그저 엘시 선배의 보드라운 무게감을 만끽했다.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소녀는 크흥, 하고 울음을 다스리며 말했다.

“……돌아가면 약혼하는 거다.”

부인을 두고, 약혼이라.

천신께서 진노할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세상의 명운이 달린 일인데.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엘시 선배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제 돌아갑시다.”

비로소 퍼즐이 하나 맞춰졌다.

“우리들의 세상으로.”

남이 아닌,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세상을 구하기 위한 퍼즐.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

결계의 외부, 아카데미의 남쪽 숲.

그곳에서는 살 떨리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꺄,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쫓기는 이는, 암청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그 눈가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며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내달리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상반신을 굽히고, 팔짝 뛰며 일일이 틀어박히는 핏빛의 창을 피해내는 솜씨가 대단했다.

특이하게도 소녀의 등 뒤에는 여인 하나가 푸른 실에 묶여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검사의 눈동자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듯 우중충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자.

“피, 피, 피… 피를 내놔아아아아악!”

한때는 고아한 미모를 뽐냈으나, 이제는 거대한 박쥐나 다름없는 생김새를 한 괴물이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는 그녀가 얼마나 다급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툭, 툭, 툭.

세리아가 끌려가며 통통 튀길 때마다 청백색의 실이 하나둘씩 끊어져 나갔다. 그 실들은 바위나 나뭇가지에 걸리며 소녀의 행적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암청빛 머리카락의 소녀, 그러니까 황녀는 더욱 소리 높여 비명을 내질렀다.

제 손에 남은 수수께끼의 돌을 꽉 움켜쥐면서.

“꺄, 꺄아아아아아악! 도와줘요, 이안 경!”

추격전은 한동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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