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7 - 7. 질투는 나의 힘(97)
박쥐는 소녀를 쫓고 있었다. 벌써 몇 분이나 이어졌는지도 모를 추격전이었다.
아니, 몇 시간인가?
이안을 비롯한 일행이 흡혈귀의 결계 내부로 진입한 지가 벌써 한참이었다. 박쥐, 그러니까 ‘흡혈귀’의 여동생이자 세리아의 어머니는 자연스레 의문을 품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일까.
왜 나는 저 자그마한 소녀를 붙잡지 못하는가. 가녀린 팔다리는 손으로 쥐면 으스러질 듯하고, 새하얀 목덜미는 송곳니로 꿰뚫는 순간 달콤한 분수를 뿜어낼 듯한데.
그러나 닿지 않는다.
마인의 신체 능력은 인류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악신과 계약한 대가로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육체를 손에 넣는 것이다.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고, 맨손으로 철판마저 우그러뜨리는.
따라서 여인이 아직까지 황녀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은 기묘했다. 단순히 각력만 따져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몇 분도 되지 않아 추격전이 종료됐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지루한 술래잡기가 이어지고 있는 까닭은, 그래.
박쥐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떠한 예감이 바이올린의 활처럼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악!”
언제나와 같이 순진해빠진 비명.
하지만 이변은 그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탕!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청백색의 구체가 매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제법 날카로운 파공성이 여인의 귀를 움찔토록 했다.
그래봐야 애송이 마법사의 일발일 뿐이었다.
얻어맞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하필 그 탄환이 노리고 있는 신체 부위가 문제였다.
날개의 피막.
가장 연약하고 얇은 부위. 아무리 재생을 할 수 있더라도, 운신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물론 피해낸다는 선택지도 존재했다.
박쥐 마수의 힘을 지닌 여인의 감각은 지극히 예민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을 비롯해 동물적인 직감까지 탄환의 궤도를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여인은 함부로 뛰어오를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내달리던 탄환의 궤도가, 느닷없이 꺾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여인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괴물은 일순 멈춰 서 손톱으로 마탄을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캉!
그것으로 끝.
박쥐 마인의 손톱에 부딪힌 마탄은 불똥을 튀기며 소멸했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위력이었지만, 그새 황녀가 여인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제야 괴물은 히죽 미소를 머금었다.
“……오호라.”
과연, 큰 소리 칠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단 말이지.
사실 여인과 황녀 사이의 격차가 현격하기는 했다. 만일 이안에 의해 온몸이 토막 나는 수준의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여인은 진작 황녀를 갈갈이 찢어버렸을 터였다.
아무리 견제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무력은 모든 자잘한 변수를 압도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황녀는 꽤 영리한 선택을 했다.
제 몸뚱어리뿐만 아니라, 뒤에 세리아까지 달고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세리아라도 놔두었다면 그 피를 빨아먹고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더불어 피 냄새는 여인의 본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내려앉으며, 눈동자에 맺힌 핏빛 광망이 섬뜩하도록 빛난다.
먹고 싶다.
용의 피, 딸의 피.
모든 것을.
조급증은 이성을 지운다. 그리고 여인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강자였으니까.
머리를 굴리고, 책략을 짜는 것은 약자의 몫이었다. 강자는 보다 간단한 해결책을 택할 권리가 있었다.
“조금 아프지만, 무리를 해보도록 할까…….”
모든 문제의 근원은 피를 빨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니,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끝내 피를 마실 수만 있다면 여인의 승리였다.
이러한 판단을 끝마친 여인의 날개가 나풀거리며 흩날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지면을 살짝 밀어내듯이 도약하고, 불어닥치기 시작하는 강풍.
바람을 탄 여인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황녀가 나름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지만, 그래봐야 땅을 딛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늘을 나는 짐승과는 그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물론 여인이라고 해서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나무들이 무성히 자란 숲속이었고, 그다지 높은 고도까지 오르지 못한 날짐승을 가로막을 장해물들은 무수했으니까.
그래봐야 잠깐의 수고를 곁들이면 그만이었지만.
우드득, 하고.
여인이 척추를 비틀자 송곳처럼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내 여인의 몸뚱어리가 지나가는 모든 곳에 위치한 나뭇가지들이 처참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파공성마저 제대로 일지 않는 고속의 이동.
눈 깜짝할 사이에, 여인은 낯익은 광경을 발 아래에 두게 되었다. 청백색의 실에 묶여 끌려가는 세리아와, 그녀가 땅을 퉁길 때마다 툭툭 끊겨 흩날리는 실낱까지.
목표가 가까이 있다는 증거였다. 여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상을 삽시간에 훑어 내렸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오는 암청빛 머리카락의 소녀. 여인은 망설임 없이 바람을 일으켰다.
핏빛의 가시들이 빗줄기처럼 틀어박힌다.
파바바바박!
“으, 끄으윽… 아, 아팟…….!”
느닷없이 내리꽂힌 일격에 황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 날랜 몸놀림으로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으나, 그래봐야 수십 개나 되는 송곳을 모조리 피해낼 수는 없었다.
발 뒷꿈치를 긁힌 소녀의 무릎이 팍, 하고 땅에 틀어박히는 소리.
하품이 나올 만큼 일방적인 공방이었다.
박쥐의 모습을 한 여인은, 그제야 우아하게 땅을 즈려밟았다. 소음조차 일지 않는 나긋한 착지였다.
“너무 멍청한 선택을 했네요, 아가씨. 얌전히 그 남자의 뒤에 숨어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흐으, 끄으.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릴 때마다 달콤한 피 냄새가 풍겼다. 여인은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황녀의 발 뒤꿈치로부터 배어 나오는 핏방울을 응시했다.
그래, 저것이다.
‘용의 피’.
아루스의 총애를 받았던 지상의 관리자들, 모든 신비의 종주. 오래 전 델피렘은 그들을 제물로 이 세상에 끔찍한 죄악들을 풀어놓았다.
다시 말해, 용은 암흑교단에 있어서도 힘의 근원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당장 세리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몸에 섞인 ‘흡혈귀’의 피는 절반에 지나지 않지만, 단지 용의 피를 섭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강인해 질 수 있었는지.
그 정도로 많은 잠재력을 지닌 혈액이었다. 만일 순혈인 자신이 저 피를 마시게 된다면?
본능과 욕망이 뒤섞인 여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세리아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미 여인의 목적은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오직 저 소녀의 피를 빨리라.
여인이 머금은 호선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 잘못된 선택을 한 대가를 치르셔야겠죠?”
그렇게 욕망을 끝내 이기지 못한 여인의 몸뚱어리가 땅을 박차고 쏘아진 찰나.
“……’아가씨’라고요?”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그리고 반전.
어라, 하는 사이에 여인의 시야가 뒤집혔다. 그야말로 전조도 없는 이상현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를 파악하기도 전에, 수백 줄기의 뇌전이 내리꽂혔다.
폭음과 명멸.
빛과 열의 폭풍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을 달군다. 여인은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혈관을 타고 저릿저릿 흐르는 전류는 일종의 바늘과 같았다. 얇고 창백한 피부 아래로 핏빛이 번져 나가고, 여인은 그에 비례하는 통증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끄으, 무, 크으… 무슨……!”
여인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허공에서 빛을 내뿜으며, 서서히 바스라지는 돌멩이가 하나.
실핏줄이 터져 나간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러고 보니, 저 물건을 본 기억이 났다.
고깔 모자를 쓰고 있던 그 꼬마 마법사.
그녀가 황녀에게 전해 준 물건이었다. 무슨 물건일까 싶었는데, 설마 이러한 기물일 줄이야.
마법을 새겨 넣은 물건은 가치가 상당했다. 비록 1회용에 불과할지라도, 이만한 위력을 가진 주문을 각인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요했을 텐데.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상대도 비장의 수단쯤은 갖추고 있었겠지.
하지만 한참이나 이르다.
입술을 짓씹자, 옅은 핏물이 새어 나오며 여인의 정신을 일깨웠다. 팍, 하고 덜덜 떨리는 손을 지면에 처박는 괴물의 눈빛은 악에 받쳐 있었다.
“꼬맹이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당신도 한때 제국의 귀족이었다면, 알고 있겠죠.”
그러나 분노를 삼키고 있던 여인을 맞이하는 것은, 황녀의 뚱딴지 같은 소리였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어이가 없어 멈칫한 여인의 앞에서 소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싸늘한 눈빛이, 마치 아랫것을 훈계하는 귀족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건방지게도.
여인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