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8 - 7. 질투는 나의 힘(98)
“저는 단순한 ‘아가씨’가 아니에요. 제국 황가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란 말입니다. 당신 따위가 ‘아가씨’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하.”
“설마, 당신도 용의 이름이 우습나요?”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이곳은 전장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암흑교단에 소속된 괴물로, 황가의 위명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 앞에서 제 집안 내력을 읊는다?
죽여 달라고 시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인은 화가 나다 못해 기가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용의 이름이 우습냐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제 눈앞에 있는 건방진 꼬마 마법사 하나는 우습네요. 주제 파악이 덜 된 것 같아서.”
“주제 파악이라…….”
소녀는 그 말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 많이 들어본 소리라는 듯.
황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질렸어요. 그런 거.”
한 손까지 팔랑이며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황녀의 모습은 실로 귀엽고 건방져서.
가까스로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여인을 도발하기에는 충분했다. 빠득, 이를 악물고 여인이 다시금 솟구치기 직전.
툭, 하고.
소녀가 손아귀에 숨기고 있던 돌멩이가 하나 더 떨어졌다. 결국 인내의 한계를 맞이한 여인은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썅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크흐, 끄아아아아아악!”
또 다시 뇌전(雷電).
마치 새들이 숲에서 일제히 날개를 펼치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박쥐 마인은 또 다시 제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는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 푸르른 뇌광 사이로 비치는 광경이란.
소녀가 비명을 내지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꺄으, 꺄아아아아악! 도와 주세요, 이안 경!”
으드득.
여인의 눈동자가 강렬한 살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마수의 본성이 뇌를 잠식하고 있던 마당이었다.
이처럼 노골적인 도발에 당하고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심지어 저 한심한 꼴은 뭐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는 당당히 훈계하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을 쳐?
“꼴사납기는……!”
울분에 가득 찬 여인이 몸뚱어리가 곧장 일으켜졌다. 아직 잔류 전하의 영향으로 운신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여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저 시건방진 황녀를 찢어 버리고, 용의 피를 취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열쇠였다. 여인은 다시 한 번 날개를 펄럭이며 도약하고, 척추를 뒤틀며 대기를 가른다.
탕, 하고 공중을 밟고 쏘아지자마자 터져 나오는 기파.
날카로운 파공성에 뒤이어 찢긴 대기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 척추를 비틀 때면 몰라도, 이미 회전을 시작한 여인의 몸뚱어리는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갈갈이 찢겨 흩날린다.
초를 몇 번이나 쪼개도 모자란 찰나의 시간.
어느덧 허공에서 정지한 여인의 귓가에 익숙한 소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툭, 툭, 툭.
마력으로 이루어진 청백색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 나무와 나무 사이, 수풀과 수풀 사이에 흐트러진 실낱들이 지저분했다. 그것은 황녀가 남긴 발자국이나 다름없었다.
뒤를 쫓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유용한 단서였다.
이쯤 되면 굳이 시야도 필요 없었다. 여인은 음향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을 향해 고속으로 낙하를 시작했다.
서걱, 하고 토막 나는 나무들.
그 뒤에는, 납작 엎드린 소녀가 부들부들 떨며 공포를 감내하고 있었다.
비명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헛된 발악이었다. 여인은 이전과 같이 사뿐히 땅을 디뎠고, 황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핏빛의 창을 던졌다.
푹, 하고 허벅지를 관통하는 날붙이는 섬뜩할 만큼 부드럽게 지면을 파고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통증에 익숙하지 않은 황녀는, 다시금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크으, 끄으… 아아아아아아악!”
“오늘만 두 번째던가요?”
그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면서 한 걸음을 내딛는 여인은 다소 평정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싱긋, 미소를 머금는 얼굴에서 귀족의 품격이 얼핏 내비치는 듯했다.
그래봐야 그 살의가 들끓는 눈동자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여인은 미소와 증오라는 상반된 낯빛을 한 채 나긋한 어조를 이어갔다.
“알고 있어요, 제 딸과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무얼, 그래봤자 일방적인 싸움이었을 테지만. 멀리서 피 냄새를 맡고 알았답니다. 우리 딸이, 당신의 팔다리를 망가트렸다는 사실을.”
황녀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이를 악문 채로, 그 자그마한 몸뚱어리를 부들부들 떨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비명을 참아내려는 발악이었다.
괴물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또 다시 핏빛의 송곳이 소녀의 남은 다리를 관통한 것을 보면.
“아으, 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좋아요, 좋아요. 이게 용의 울음소리인가? 푸흐… 난데없이, ‘용’이라니.”
사뿐사뿐 걸음을 옮긴 여인이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이제 저항 능력을 상실한 황녀는, 핏발이 선 눈으로 여인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여인은 살포시 미소를 머금더니.
짝, 하고.
“……건방지게.”
손바닥으로 소녀의 뺨을 강타했다. 어찌나 강하게 후려쳤던지, 황녀의 상반신이 지면 위로 철푸덕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그러자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
그럼에도 황녀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고개를 치켜들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짜악!
콱, 하고 황녀의 머리가 흙무더기에 처박힌다. 뺨이 얼얼하다 못해 이가 몇 개 뽑혀 나갈 만큼의 위력이었다.
이제 황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단지 신음하고 있을 뿐.
여인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야 좀 어울리는 꼴이 됐네요, 황녀 전하… 저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여자를 참 좋아해요.”
“흐으, 흐으…….”
“나름 머리를 굴린 모양인데, 그 비장의 수단… 돌멩이였던가? 그마저도 남의 힘을 빌린 것뿐이었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우쭐해하지… 짜증나게.”
푹, 하고 내리꽂히는 송곳과 함께 터져 나오는 핏줄기.
이번에는 오른팔이었다. 황녀는 남은 손으로 꿰뚫린 부위를 지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으며 피와 신음을 삼켰다.
터져 나온 핏방울이 여인의 낯가죽을 적셨다.
그 몇 방울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인이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에는.
“아아, 달콤해라… 진작 이랬으면 좋았잖아요? 제 신세에 걸맞게, 피만 바쳤더라도 이처럼 아픈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불쌍한 황녀 전하. 하기야, 저도 소문을 듣긴 했어요. 한동안 아카데미에서 숨어 지냈으니까요.”
“……다, 다.”
“제 딸과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죠? 불쌍해라… 이제야 겨우 알았을 텐데. 사랑이란, 쟁취하는 것.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이는 멀리서 ‘질투’나 하는 수밖에…….”
“닥쳐.”
헐떡이는 숨소리에서 쇠 냄새가 난다.
핏물이 올라오고 있는 증거였다. 이미 체력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 버린 소녀의 폐부에서는, 옅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살면서 이토록 열심히 달려 본 적이 있던가?
그리고 오늘처럼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있던가?
단언할 수 있었다.
없었다. 그래서, 시엔은 난생 처음으로 제 감정을 토해냈다.
“너 따위가, 감히 내 마음을 짐작이나 하겠어?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목 졸라 죽을 뻔했던 나야. 평생 인간을 의심하고 미워해 왔다고. 배신당하는 게 무서워서, 그리고 버림 받는 게 무서워서……!”
“어련하실까.”
여인은 코웃음을 치면서, 서서히 손을 치켜들었다.
이제 대화는 끝.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웠다. 한동안 피주머니로 쓰다가, 델피렘 님께 이 소녀를 바치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
혹시 다음 칠죄성은 내가 되지 않으려나?
이따위 생각을 하면서, 여인은 서서히 손을 내리 그었다.
“그러니까, 평생 ‘질투’만 하는 거에요. 영원히.”
그리고 바로 그때.
느닷없이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여인의 감각과 본능이 한껏 곤두서서 일대의 체감 시간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어라.
코웃음을 치며 닫혔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뜨인다. 살짝 열린 시야 사이로, 어떠한 광경이 틀어박혔다.
황녀의 남은 손 하나.
지금까지는 몸을 지탱하는 용도라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지가 꿰뚫리는 통증은 보통이 아니었다.
당연히 남은 손으로 지혈을 할 법도 한데, 황녀는 애써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도대체 왜?
그 정답이 공개되고 있었다. 희미한 청백색 빛으로서.
촤르륵.
그 희미한 소리가 고막을 건드린 순간, 박쥐 마인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도약했다.
촤르르르르르르륵!
그물이 솟구친다.
온 사방에 널려 있던 청백색의 실낱들이, 여태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세리아를 묶고 있던 끈에서 튕겨 나왔던 실들이었다.
도저히 빠져 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치밀한 함정.
그럼에도, 흡혈귀는 헛웃음을 삼킬 따름이었다.
“하, 마지막까지 잘도……!”
빠져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강행 돌파를 하면 그만이었다. 이처럼 얇디 얇은 실 따위, 회전력을 더하면 얼마든지 찢어발길 수 있었다.
우드득, 하고 여인이 척추를 비틀었을 찰나.
여인의 시야에 또 다시 기묘한 광경이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