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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0)화 (600/649)

Chapter 600 - 7. 질투는 나의 힘(100)

하나의 세계가 흔들린다.

수천 번의 칼질, 수만 번의 폭발에도 굳건하던 결계였다. 상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절대자들의 충돌에도 끝내 무너져 내리지 않던 술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칠흑의 대지가 조각나 붕괴하고, 그 자리를 흙과 풀이 채우기 시작한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암막이 걷히며 달과 별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결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흡혈귀’ 또한 대자연의 껍데기를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정형의 자연재해처럼 군림하던 존재는, 그 불사성을 잃고 대지 위로 추락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채로.

처음에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전력은 파악이 끝났을 텐데……!”

“낯짝 한 번 보기 힘들어, ‘질투’.”

무감정한 음색이었으나, 그 내용이 노골적인 조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만했다.

흡혈귀의 살기 어린 시선이 그 진원지를 향했다. 지독히도 피로한 눈빛을 한 사내 하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래, 너구나.

흡혈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변수를 계산했다. 수백 년을 묵은 은원을 해소하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당연히 대충 할 리가 없었고, 의체를 준비하고 영혼을 쪼개 혈족에 옮겨 담던 기간만 하더라도 수십 년에 달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도 존재했다.

‘이안 페르쿠스’라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꼬맹이가 불나방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존재는 점점 더 흡혈귀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북부 유르디나 가문의 비밀이 들킨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흡혈귀는 엘프들의 사교를 지원하는 대신, 대량의 제물을 수혈 받아 왔다.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해 주던 뒷배경이 바로 유르디나 가문의 가주였다.

하지만 이안 페르쿠스가 북부로 향한 이후,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이제야 계획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을 다스려 계획을 몇 번이나 점검했다. 델피렘께서도 그 노고를 알아 주셨는지, ‘탐욕’이라는 지원군까지 붙여 주시기까지 했다.

비록 설득을 위해 다소의 희생은 필요했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뿐이었다.

그 외의 결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모조리 지워 버렸으니까.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흡혈귀는 증오를 담아 외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만’……!”

“내가?”

아무런 고저조차 없는 반문.

흡혈귀는 그 몰골이 참으로 뻔뻔스럽다고 느꼈다. 이가 으득으득 갈릴 만큼.

“그래, 너 하나밖에 없어… 느닷없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 계획은 순항 중이었다고! 이제야 수백 년 전의 원한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을 들고 있던 손을 편안히 늘어트렸다.

얼핏 비치는 허점만 수십 개가 넘는다. 흡혈귀는 일순 그 빈틈을 찌를까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저 속임수에 몇 번을 당했던가.

사내는 존재 자체로 완성된 흉기나 다름없었다. 날붙이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것이 사람을 해치는 도구라는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저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다가가면 베일 뿐이다.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기에, 저토록 살인에 특화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일 만큼.

정작 사내는 흡혈귀가 무슨 짓을 하든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고작해야, 너와 몇 번 놀아준 정도?”

“헛소리,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나야 모르지.”

일말의 열기조차 없는 담백한 대답.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흡혈귀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 계획이 망가질 리가 없었으므로.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칠죄성의 수좌이자, 신과 대등하기를 꿈꾸는 자.

광인(狂人)들의 발상에 의해 탄생한 혼종 괴물이 바로 그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이름하여 ‘오만’.

끝내 추락할 운명의 죄수 따위가, 설마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나타날 줄이야.

흡혈귀의 악물어진 잇새로 달구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치미 떼지 마, ‘오만’… 너밖에 없잖아.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만한 힘이라면 ‘완성’에 가까워졌을 텐데, 아직까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은 뭐지?”

“글쎄.”

“날 죽이지 못한다고 했지? 설마 그게 네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인가?”

“내가 말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눠도 도돌이표.

사내와 흡혈귀의 문답은 성립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흡혈귀가 일방적으로 질문을 퍼부을 뿐이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그 감정만큼이나 의욕도 희박해 보였다. 더 이상의 물음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흡혈귀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중요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저 사내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다. 아무리 칠죄성 중 최강이라 불리는 ‘오만’이라 하더라도, 불살(不殺)이라는 조건을 안고 싸우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여 주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

흡혈귀는 철두철미한 여인이었다. 결계의 핵이 모조리 파괴될 가능성마저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설마 이를 진짜로 실행에 옮겨야 할 줄 몰랐을 뿐이지.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흡혈귀의 분노는 각별했다.

흐, 하고 일그러지는 입꼬리.

“좋아,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오만’…….”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핏빛의 안개가 번져 나간다. 지나치게 높은 농도 탓에, 본래 무색무취여야 할 마력 입장에서 색과 향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이 저릿할 만큼 강렬한 살의의 냄새.

사내의 눈빛이 눈치 채기 힘들 만큼 살짝 가라앉았다. 희미하긴 하지만, 옅은 경계의 기색마저 비칠 정도였다.

여태까지와 명백히 다르다.

어느덧 핏빛의 안개 속에 파묻힌 여인의 눈동자는 푸른 불꽃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 몸뚱어리의 윤곽선마저 감춘 채로.

화르륵, 타오르는 살의가 조명처럼 번뜩인다.

“결계의 핵을 파괴한 건 칭찬해 줄게. 내 여동생은 그 누구보다 내 피를 많이 받은 아이거든. 다시 말해, 내 영혼도 제일 많이 지니고 있었단 뜻이지…….”

“최후의 발악인가.”

“’최후’일지 어떨지는… 두고 봐야 알지 않겠어?!”

바로 그 직후.

팍, 하고 연기로 이루어진 주먹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비록 그 규모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속도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일순 이를 가로막은 사내의 몸이 붕 떠오를 정도로.

물론 사내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그의 손이 벼락같이 출수하며 날카로운 검의 궤적을 남겼으나, 은빛의 안개는 허공을 가를 따름이었다.

기묘한 현상을 마주한 사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든 말든, 여인은 핏빛 안개에서 뛰쳐 나와 허공에 뜬 사내의 상단을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격.

쿵, 하고 묵직한 소음과 함께 찢겨 나간 대기가 마구잡이로 터져 나갔다. 고막을 긁어내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함께, 지반에 깊숙이 처박히는 사내의 몸뚱어리.

솟구치는 흙먼지와 갈라지는 대지가 그 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작 지면에 충돌하는 순간까지, 사내는 검격을 내질렀지만 말이다.

수백 줄기의 검광이 내달린다.

빛줄기의 포화는 가히 그물망과도 같았다.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실선들.

하지만 이마저도 닿지 않는다.

은빛 궤적에 닿을 때마다 흡혈귀의 몸은 안개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끝내 사내가 추락한 자리에서 하늘을 꿰뚫는 일섬(一閃)이 그어질 때까지, 흡혈귀가 땅에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팟, 하고 빛과 안개가 어우러진다. 사내를 노리고 쏟아져 내리던 핏빛의 강우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처럼 바스라졌다.

흡혈귀가 우아한 자세로 착지를 마쳤을 때,

사내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뒤였다. 그의 무신경한 시선이 슬쩍 여인을 향한다.

“결계를 소형화 해서 유지하고 있는 건가? 또 인과를 비틀고 있는 듯한데.”

“바로 맞췄어, ‘오만’… 어때, 또 용혈 문자를 써보겠어?”

사내는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더욱더 짙어지는 흡혈귀의 비틀린 미소.

괴물은 새파란 웃음을 토해냈다.

“푸흐, 아하, 아하하하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감히 인간 따위가 용의 힘을 몇 번이나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어. 심지어 다섯 개나 되는 문자를! 내 결계를 반파시키는 정도가 한계였던 거지?!”

“스스로를 핵으로 삼아 반파된 결계를 재구성했군.”

사내의 담담한 추측에도 여인은 명쾌한 해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흔들림 없는 금빛 눈동자가 사내의 확신을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흡혈귀의 낯빛이 더욱 일그러졌다.

“……너희가 내 여동생을 죽여 준 덕에 말이지!”

또 다시 폭음.

여인이 땅을 박찼을 뿐인데, 모래 먼지와 함께 대지가 쩌적 갈라지며 계곡이 생겨났다. 사내는 검면을 들어 또 다시 방어를 시도했지만, 한계는 여전했다.

반격이 불가능하다니.

그래서야 일방적으로 밀리는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자신만만했던 까닭도 이에 있었으리라.

흡혈귀는 더욱 열기 띤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무래도 강하다고 해도, 고작해야 아무 비전이나 갖다 박은 혼종일 뿐!”

핏빛의 손톱이 물 흐르듯 사내의 몸을 탐한다. 그럴 때마다 칼날이 그 앞을 가로막기는 했으나, 흡혈귀를 춤을 추듯 그 속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끝내는 회전력을 더해 콱, 하고 검면에 틀어박히는 발차기.

미처 상쇄시키지 못한 충격파가 사내의 등 뒤로 파공성을 터트렸다. 사내의 몸이 자연스레 두어 걸음 물러나자, 여인은 또 다시 달려들어 공세를 계속했다.

폭음과 불꽃이 터져 나온다.

폭발을 준비 중인 활화산처럼.

“기술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니 심상과 심상이 맞부딪히면,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대적이 불가능한 거야!”

카각, 하고.

사내의 칼날이 교차하는 손톱에 가로막혀 불쾌한 소음을 일으켰다. 힘의 교착 상태 속에서, 사내는 여전히 메마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빌린 심상은 어차피 복제품에 불과하지…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야.”

“누더기처럼 초라한 발악이지.”

흡혈귀는 사나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단언했다.

“부족한 재능과 넘치는 독기…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존재만이, 그토록 불균형한 재능을 지닐 수 있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받았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잃은 거야?!”

“셀 수도 없이.”

“그래서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참가한 건가?!”

전진, 그러다 후진.

칼과 손톱이 제 위치를 바꿔 가며 힘의 균형을 맞춘다. 그럴 때마다 불꽃과 함께 소음이 튀기고, 사내와 여인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가 없는 힘은 없어, ‘오만’… 네 추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거야. 신화를 봤다면 알겠지, ‘오만’의 죄를 지은 자가 어떤 끝을 맞이하는지!”

“그럼 너도 알겠군. ‘질투’의 죄를 저지른 자가 어떤 끝을 맞이하는지도.”

이윽고 파열.

한동안 이어졌던 균형이 깨져 나가며, 맹렬한 불꽃을 터트렸다. 이내 찰나를 찰나로 쪼갠 공방이 이어지고 두 사람은 두어 걸음 뒤로.

어느덧 싸늘할 만치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으득, 하고 악물어진 잇새 사이로 흐릿한 부정이 새어 나온다.

“……나는 달라.”

“어련하실까… 그리고, ‘누더기처럼 초라한 발악’이라고 했나?”

조소인지도 모를 흐릿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점의 후위를 점하는 디딤발.

그때였다.

소란스럽던 주위가 일제히 정적에 잠긴 것은.

요사스러운 빛으로 사내를 노리던 피의 안개가 가라앉고, 손톱을 서로 맞부딪히며 다음 공방을 준비하던 흡혈귀의 몸이 흠칫 멎었다.

“발악, 발악… 맞는 말이야. 그런데 누더기도 한없이 기워 붙이다 보니,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게 있더군.”

그리고 세상은 서서히 색조를 잃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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