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1 - 7. 질투는 나의 힘(101)
흡혈귀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처음에 ‘시간 정지’는 어디까지나 ‘꼬맹이’, 즉 저 괴물이 아닌 인격의 심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내는 그 심상의 힘을 다루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심상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풍경, 하나의 마음이 하나의 풍경을 지닌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광경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온 세상이 운동량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다만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이상의 위압감을 가지고 서서히 만물을 좀먹어 가고 있을 뿐.
지직, 거리며 풍경이 흩어진다. 그 틈새로 얼핏 비치던 메마른 대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수천 구의 시신들이 장엄한 진혼식을 예고했을 때.
흡혈귀는 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광증으로 푸른 눈동자를 불태우면서.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 그 꼬맹이의 심상은, ‘시간 정지’ 따위가 아니었어… 그건 네 심상을 빌려 쓴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마치 네가 온 대륙의 비전들을 제 영혼에 우겨 넣었듯이…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마력이나 끌어올려.”
여인의 호기심에 답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냉담하기만 했다.
차가운 검극이 서서히 맞은편을 겨누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풉, 큭…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하!”
그 노골적인 도발에, 흡혈귀는 실로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만인가.
수백 년 전, 제 영혼과 가문의 식솔들을 제물로 바쳐 칠죄성 중 일좌를 차지했다. 그 이후로 그녀를 설레게 할 호적수는 오직 하나뿐이라 생각했는데.
이처럼 예상하지도 못했던 존재를 마주치고, 궁지에 몰리고, 계획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온힘을 다해 싸워야 할 적수는, 언제나 자극을 주니까.
우드드드드득!
덜덜 떨리던 대지가 갈라지며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흡혈귀가 뿜어내는 막대한 기파를 견디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그 존재만으로 하나의 이적이라 할 수 있는 절대자들.
단지 그중 둘이 격돌을 앞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세상을 긴장케 하기에는 충분했다.
“좋아, ‘오만’…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전력을 다해 응해 주어야겠지… 고작해야 본신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힘이지만, 누더기 따위를 상대할 정도는 될 테니.”
“조언 하나만 하지.”
고저조차 없는 평탄한 목소리로, 사내는 그렇게 말문을 텄다.
일말의 긴장조차 느껴지지 않는 낯빛이었다.
“네 본체가 오더라도 목숨을 건지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내가 일곱 걸음을 내딛기 전에 끝내는 편이 좋을 거야.”
“아주 자신만만한데? 그만한 절기라면, 당연히 이름도 있겠지?”
“칠보칠절(七步七絕).”
흥, 하고 흡혈귀는 코웃음을 치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고귀한 귀족의 결투에는 기품이 있어야 하는 법.
아무리 상대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누더기 같은 인간이더라도, 전력을 다하는 이상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춰 줄 예정이었다.
“과연, ‘오만’답게 광오(狂傲))한 이름이야… 일곱 걸음에 일곱 절예(絕藝)를 담았다라?”
그리고 으득, 하고 어금기나 서로 맞물리는 소리.
여인은 투기로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 한 번 해봐!”
모처럼의 호의를 마다할 사내가 아니었다.
잎새 위의 물방울처럼 아슬아슬한 균형의 끝.
사내가 걸음을 내딛었고, 온 세상의 풍경이 일변한다.
단 한 걸음.
고작해야 시작을 알리는 몸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일보를 마주한 순간, 흡혈귀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사내의 경고가 허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죽는다.
일순 뇌리를 가득 채우는 그 미래에, 흡혈귀가 온몸에 마력을 일으켰을 찰나.
탕, 하고.
자그마한 빛줄기가 흡혈귀의 가슴을 관통했다. 어라, 하는 사이 벌어진 사태였다.
흡혈귀의 시선이 서서히 등 뒤를 향한다. 그곳에는, 여태껏 잊고 있었던 존재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대마녀.
단지 검지로 흡혈귀를 겨누었을 뿐이었지만, 그 가느다란 빛줄기에는 오행의 이치가 숨어 있었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소형 결계의 균형을 깨트릴 만큼.
괴물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이, 썅년이……!”
그것이 끝.
사내로부터 느껴지던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땅을 박찬 사내의 검이 둔기처럼 휘둘러졌다.
쾅!
폭음과 함께 여인의 몸이 저 멀리 쏘아진다. 더는 인과를 비틀 수 없으니, 유효타를 허용하는 건 필연이었다.
급히 핏빛의 막으로 몸을 보호한 흡혈귀는 생각했다.
속았구나.
애초에 상대는 제 전력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흡혈귀와 전투를 벌일 때도 죽이지는 못한다는 조건 하에서 움직이던 ‘오만’이었다.
그만한 힘을 지닌 존재가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
당연히 평생을 갈고 닦은 최고의 비기를 함부로 내보일 턱은 없었다.
그럴수록 소모해야 할 대가는 커질 테니까!
처음부터 흡혈귀의 온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한 잔수작에 불과했다. 이를 깨달은 흡혈귀는, 몇 번이나 땅 위를 구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너, 이 도둑년이이이이익……!”
핏발 선 눈이 대마녀를 향하자 흡혈귀의 손끝에서 핏빛 안개가 뻗어 나왔다.
이전에도 보았다시피 그 속력은 가히 아광속, 감히 반응할 틈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사내조차 큰 기술을 취소한 대가로 한 숨을 돌리고 있을 터.
노리는 것은 못해도 치명상이었다.
묵은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 마지막까지 아껴 놓으려 했건만.
이처럼 제 복을 걷어찬단 말인가.
흡혈귀는 그렇게 한탄하며 두 발을 땅에 박았다. 뒤로 구르던 몸뚱어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그 직후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울컥 올라온 것은.
당연히 이는 대마녀의 몸뚱어리가 관통당하는 소리여야 했지만, 어째서일까.
흡혈귀는 제 종아리를 관통하는 벼락의 송곳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일순 이해가 가지 않아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전하에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쿵, 하고 지면에 틀어박히는 무릎.
그래봐야 자그마한 부상에 불과했다. 흡혈귀는 마인이었고, 이까짓 부상쯤은 눈 깜짝할 새 치료할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하나뿐.
도대체 누가?
어느덧 핏빛의 안개는 뇌전의 사슬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세상을 떠돌 적 이러한 마법을 쓰는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의문은 길지 않았다.
휘리릭, 탁.
일순 정적이 내려앉은 대지 위에 규칙적인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막대 하나가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다가, 다시 손아귀에 붙잡히며 내는 소리,
흡혈귀, 대마녀, 그리고 사내의 눈이 자연스레 그 진원지를 향했다.
“이게 뭐야? 오랜만에 일어났더니, 주위는 온통 난장판에… 주인님 낯짝을 한 놈이 하나, 처음 보는 꼬마 계집이 하나, 그리고 피를 다루는 괴물까지… 하아.”
자그마한 소녀가 서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 머리만한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며, 어깨를 툭 떨구는 그 행색은 가냘프다 못해 무기력해 보일 정도였다. 한숨 섞인 한탄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진짜,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너, 뭐야.”
모두를 대신해 내뱉은 의문이었다.
흡혈귀가 얼이 빠져 흘린 목소리에, 그제야 소녀의 시선이 슬쩍 여인을 향했다.
챙의 그늘조차 그 영롱한 눈동자를 가리지는 못했다. 푸른 눈동자는 깊고 고요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옅은 광채를 발하면서.
이는 어느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보이는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나? 내 이름은, 엘시 라이넬라.”
소녀가 칠흑의 막대를 기습적으로 뻗은 것은 그때였다.
하늘이 갈라진다. 미처 무언가 대응을 보이기도 애매한 시점.
수백 줄기의 벼락이 그 틈새로부터 내리꽂혔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재앙이 폭우처럼 대지를 난자했고, 흡혈귀는 매캐한 폭연 사이로 하나의 광경을 보았다.
벼락으로 이루어진 거인.
아니, ‘고래’인가.
그 거체는 시시각각 형상을 뒤바꿔 가고 있었다. 가장 강하고, 거대하며, 압도적인 존재로.
흡혈귀는 난데없는 기습에 온몸의 마력을 일으켰다.
“위대한 대마법사, 레이놀드 라이넬라의 조카이자…….”
그리고, 쾅!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잠재울 만큼 압도적인 전하의 폭풍이 대지를 뒤엎었다. 수백, 수천 줄기의 뇌전이 하나의 손으로 화해 하나의 목표를 노리는 장면은 경이롭기까지 할 정도였다.
대지가 폭심을 중심으로 움푹 꺼진다. 흡혈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털썩.
그 짤막한 소음과 함께, 사내의 몸뚱어리가 마른 짚단처럼 대지에 쓰러진다.
그렇다. 애초에 소녀는 흡혈귀를 노리고 마법을 시전한 것이 아니었다.
목표는 오직 사내 하나.
그 결과, 사내는 힘없이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였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이의 허망한 최후였다. 당연히 흡혈귀는 허탈한 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고, 그 끝에서 소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금 고깔모자의 챙을 푹 눌러쓰면서.
“이안 페르쿠스의 약혼자이자, 애완견이야… 멍멍!”
친절하게 강아지 흉내까지 내주는 소녀를 보며, 흡혈귀는 생각했다.
라이넬라 가문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절대 입양해선 안 되겠다고.
주인을 무는 개는, 아무리 귀여워도 사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