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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2)화 (602/649)

Chapter 602 - 7. 질투는 나의 힘(102)

오랜 시간 기절해 있던 소녀가 깨어 났다.

흡혈귀와의 결전을 앞둔 지금, 이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희소식이어야 했다. ‘경계’를 찢고 뇌신의 힘을 다루는 ‘대마법사’의 존재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흡혈귀는 제 힘의 반절밖에 내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물론 상대는 온 대륙을 불태울 뻔한 전설 속의 괴물이었다. 그 반절에 이르는 힘만으로도 ‘대마녀’를 일방적으로 압도할 정도는 되었으나, 이제는 결계의 보조마저 잃어 버린 판국이었다.

마침내 끝없이 이어지던 대치를 끝낼 기회가 왔다.

누구라도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실로 길었던 전투였고, 자그마한 변수 하나하나가 쌓여 승패를 가릴 개연성은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의 천사는 아직 저울을 거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소녀를 돌려준 대신, 일행 최대의 전력을 앗아가 버렸으니.

대마녀는 허공에 빛의 문자를 새기며 악을 내질렀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그렇게 사형제지간은 가족과 같다고 말했거늘! 내가 패륜아를 키웠구나……!”

“무슨 헛소리를, 꼬마… 아니, 어르신!”

엘시 또한 칠흑의 막대를 쥔 채 다급히 달려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중에 말을 높인 까닭은 순전히 대마녀의 술식이 상상 이상으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이는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법.

일종의 생존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엘시는 그 짧은 찰나에 대마녀의 진정한 정체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합류한다. 절대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으니까.

칠흑의 막대가 붓처럼 빛의 궤적을 그린다. 새파란 뇌광이 대마녀가 그려 놓은 도화지 위를 물들이자, 곧장 폭격처럼  내리꽂히는 핏빛의 장창.

쾅, 쾅, 쾅!

폭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마력의 잔흔들이 빛무리처럼 흩날렸다. 멀리서 보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테지만, 전장에서 볼 때 이보다 섬뜩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몇 겹이나 중첩해 놓은 방어막이 찢겨 나간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신체 능력이 변변찮은 마법사들에게 있어,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패는 최후의 방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깨져 나간다면?

상대를 감당하기 버겁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도주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테지만, 이곳은 출구조차 없는 결계 내부.

얌전히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이성조차 되찾지 못한 두 여인이 힘을 합치기 위해 이보다 적절한 명분은 없었다.

기하학적인 도형 위에, 또 하나의 기하학적인 도형이 얹어진다.

‘경계’ 속에서 대마법사에 오른 엘시가 술식을 짜는 속도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함께하고 있는 협력자는 마도의 끝을 보았다는 여인이었다.

그러니 방패가 점점 더 두꺼워져야 정상이리라.

만일 적이 ‘흡혈귀’만 아니었다면.

대마녀의 낯빛이 더욱 초조해졌다.

“이대로는, 못 버티는데… 첫째는?!”

그렇게 외치는 대마녀의 눈동자에서는 복합적인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걱정, 불안, 고심.

쓰러진 사내는 명백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지금이라도 흡혈귀가 마음을 바꿔 사내의 목숨을 끊으려 든다면, 막을 수단이 많지 않았다.

어쩌면 무리를 해야 할지도.

그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 감정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최후의 수는 남아있다.

대수림 일대와 남부 열왕국의 안전을 포기하고, 대마녀의 본체를 이곳에 불러오는 것이다.

마스터의 힘은 위대하다. 전력을 되찾은 ‘흡혈귀’라 하더라도, 수백 년 전의 일전에서 패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대마녀의 몸은 흡혈귀를 가두는 결계의 핵이기도 했다.

대마녀가 본체를 호출하면, 흡혈귀는 그 틈을 타 제 본체를 빼돌리겠지.

그럼 모든 것이 끝이었다.

제한 없이 칠죄성의 권능을 사용하는 흡혈귀는 재앙 그 자체였다. 이는 불바다가 된 남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대마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결단을 망설일 정도로.

그러자 소녀는 충격파에 휩쓸려 날아갈 듯한 고깔모자를 꾹 붙든 채로, 소리를 높여 외쳤다.

“……기다리라고 했어요! 돌아온다고!”

대마녀의 눈동자에 일순 의혹이 어렸다.

도대체 어디서?

직전까지 기절해 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언제 사내와 그러한 약속을 나누었는지, 대마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대마녀의 목젖을 때리고 흘러 나온 의문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만신창이가 돼서 쓰러졌다가, 느닷없이 또 다른 인격이 빙의하고.

이제 다시 감전까지 당해 혼절한 마당이 아닌가. 아무리 겉으로는 신체가 멀쩡해 보인다 한들, 그 내부마저 그대로일 리는 없었다.

그야말로 ‘어떻게’.

이 모양이 됐음에도, 이 지경으로 망가지고 다쳤음에도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 비관적인 전망을 앞둔 소녀의 반응은 담백했다.

“……어떻게든.”

이를 바짝 악물고, 온몸의 혈도가 찢어져라 마력을 회전시킨다. 심장에 응결된 고리들이 미친듯이 회전하며 새로운 술식을 짜내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 차원.

여태껏 몇 번이나 겪어 왔던 진일보였지만, 새로운 미지수를 방정식에 추가한 술식은 어마어마한 양의 식과 해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준하는 출력까지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 경지를 바란다. 이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닿을 수 있는 자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경계’의 어둠에, 꽁꽁 숨겨두었던 내면의 욕망에 잡아먹혀 버리니까.

본래라면 엘시 또한 닿지 못할 경지였겠지. 그러나 미아가 된 소녀를 굳이 찾아 나선 사내가 하나 있어서, 그녀는 이 자리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남자다.

“어떻게든, 돌아오겠죠… 약혼자를 이 위험한 곳에 던져놨는데.”

그러니 믿는 수밖에.

각오를 다짐과 동시에 마력의 방패가 깨져 나가고, 폭발에 휩쓸린 소녀의 몸뚱어리가 땅을 굴렀다. 평온히 엎어진 사내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다만 그 밑에서 피가 흐르고 있을 뿐.

깨진 약병이 사내의 혈관을 파고들고 있었다.

**

눈을 뜨면, 낯선 풍경이 부상한다.

혼몽한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흐린다. 모래사장에 그은 빗금처럼, 발걸음이 나아갈 때마다 이성이 흐릿해졌다.

기억, 기억, 기억.

내가 왜 이렇게 됐더라?

멀거니 서서 반추하자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적갈빛 머리카락의 여인.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왜 얼굴이 가려져 있을까.

“이안, 각성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몸이 치유되는 건 아니야.”

야무진 목소리의 당부였다.

끝내 걱정을 떨쳐 버리지는 못했는지, 약을 건네며 내 손을 한참이나 잡고 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아무리 강력한 각성제라도, 중상을 입은 환자를 되살릴 수는 없어. 단지 잠깐만 정신을 차릴 뿐이고… 만일 네 몸 상태가 그보다 심각하다면, 정신을 차리더라도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의식은 있으나 뇌가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상태.

몽유병 같은 건가. 아마도 그러한 감상을 품었던 것 같다.

“……무리하지 마, 제발.”

끝내 그렇게 말을 맺는 여인의 음색은 촉촉하기 그지없었다.

참으로 엉뚱하게도.

나는 이 여인의 낯을 보고 싶어졌다. 심장 깊숙한 곳에 감정의 씨앗을 심어두기라도 했는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인에 관한 기억들을 뒤적거렸다.

며칠 전, 한 달 전, 그리고 몇 달 전.

종래에는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날까지.

정녕 이것이 끝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었다. 분명히 좀 더 있을 텐데…….

그렇게 내가 멍하니 의식의 수평선 아래로 잠길 찰나.

“꿈은 어땠지?”

건조한 음색이 고막을 때리고, 흐릿하던 세계가 단숨에 색채를 되찾는다.

대지는 사내의 목소리만큼이나 메말랐다. 그 위에 불쾌한 색감을 덧칠하는 것은, 무수히도 많은 시체들뿐.

황야였다.

어떠한 인간이 이러한 풍경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황량한.

나는 그 위를 딛고 서 있었다.

까마귀 울음소리마저 울리지 않는 세상 속, 사내의 목소리는 하나의 돌멩이처럼 느껴졌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유일한 변인.

“목표는 다 이루었나? 이제 만족했는지 모르겠군.”

내 시선이 서서히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렇듯 피로한 눈빛을 한 사내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제 검을 품에 안은 채로.

“이제 떠날 시간이다.”

그러면서 사내는 하늘 위를 눈짓했다. 아무것도 없이 맑기만 한 하늘이었다.

삭막한 풍광을 도화지 삼은 금빛 눈동자는 얼핏 반딧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서 꺼져, 이제부터는 내 소관이 아니니까.”

여전히 싸가지 없는 말투였다.

아니, 어쩌면 옛 인연과의 전투가 그를 흥분케 했을지도.

그럼에도 일부러 정신을 차리도록 찾아오다니, 일처리 하나는 믿음직한 남자였다. 말마따나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내 눈이 자연스레 하늘 위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텅 비어 있던 그곳에는, 바깥의 기억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종일관 사내가 우위를 점하는 장면들.

그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묻고 말았다.

“나도 저렇게 싸울 수 있나?”

짤막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돌아올 때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략 몇 초 정도, 침묵을 지키던 사내의 입술 사이로 낯선 감정이 토해졌다.

“……뭐?”

지당한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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