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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3)화 (603/649)

Chapter 603 - 7. 질투는 나의 힘(103)

‘당혹감’, 아마도 그렇게 불러야 하리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왜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듯이.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찰나의 눈빛이 많은 것을 전달하기도 한다. 사내의 눈동자에 맺힌 감정이 함의하는 바는 하나였다.

불가능.

그야 당연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사내의 전투를 십분지일조차 모방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지금의 나로서는.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두 사람을 지킬 정도만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돼.”

사내의 금빛 동공이 움푹 깊어졌다.

소용돌이 치는 생각들이 반사광처럼 비치다 사라진다. 침묵, 침묵, 그리고 침묵.

그가 입을 열 때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전보다 좀 더 가라앉은 음색이었다.

“애송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 육체는 네 것이 아니야. ‘경계’ 속에서 내 심상으로 구현된 몸뚱어리에 불과하다고. 네가 다시 돌아가면 몸이라도 제대로 가눌 수 있을 것 같아?”

매우 현실적인 반문이었다.

내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다. ‘경계’라는 특수한 조건에 맞추어, 사내의 심상으로 만들어 낸 최적의 신체가 내 망가진 몸뚱어리를 대체했을 뿐.

다시 내가 돌아간다면?

이제야 막 ‘경계’에 진입한 나였다. 내게 사내와 같이 단단한 심상이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사내의 물음은, 달리 말해 이러한 뜻이기도 했다.

‘네 목숨이나 걱정해라.’

사실 전황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다.

나는 사내가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부러 몸을 혹사시켰다. 그래야만 사내의 심상이 내 육체를 대체하기 쉬울 테니까. 심지어 약물까지 복용하지 않았던가.

이는 사내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나도, 너도 할 만큼 했어.”

“그럼 이제 나는 무얼 하면 좋지?”

또 다시 침묵.

사내는 즉답하는 법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 양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서는 여전히 속내를 잃어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렇듯 홀로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눈을 떠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감사라도 해야 하나? 엘시 선배랑, 대마녀께서 어떻게든 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애송아…….”

“엘시 선배는 무섭다고 했어.”

나는 헐떡이며 말을 덧붙였다.

사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 내가 만나야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엘시 선배뿐만이 아니야… 모두가 그랬겠지. 너무나 무거운 짐이잖아. 느닷없이 세상을 구하라니, 그게 말이나 돼? 세리아도, 셀린도 그랬던 거야……!”

“어차피 언젠가는 짊어졌어야 할 짐이야.”

“아니, 너무 일렀어.”

확언.

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사내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내 눈앞에는 어떠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울면서 내 품에 안기던 엘시 선배.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실에 갇혀, 스스로를 저주하던 내 소꿉친구.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고 넋을 잃어 버린 사랑스러운 후배까지.

전란을 앞둔 세상이 만든 단상이었다. 혹은, 내가.

어느덧 악물어진 잇새로 달구어진 숨결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서, 정작 내 옆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거야… 하지만 이제 아니야.”

그러면서 나는 홀로 다짐하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곁에 있어줘야 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희생은 불가피하다.”

결심, 그리고 이에 맞서는 단언.

사내의 어조는 내 결의마큼이나 단단하고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무감정한 낯빛으로 제 상처투성이 교훈을 읊어댔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네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고?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와서, 봐라. 네가 무얼 지키고 구해 왔는지.”

그러면서 사내가 하늘을 눈짓하자, 다시 한 번 하늘의 풍광이 일변한다.

무수한 기억들이었다.

내장을 쏟고 쓰러진 소녀.

드넓은 평원을 뒤덮은 살점의 나무들.

황야에 웅크린 채 숨을 내쉬는 거체의 산맥, 눈밭을 쓸어 넘기며 몰아치는 살덩어리의 해일과 더불어 여우 꼬리를 가진 배신자까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장면들이 깨진 거울 조각처럼 창공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보이지 않는 장면마저 있을 정도였다.

“……’인류’.”

짤막한 한 마디가 내 가슴을 묵직히 내리눌렀다.

입술을 달싹이는 사내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그 눈빛만큼은 형형하기 짝이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

“대의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아무것도 잃지 않고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그따위 억지가 통할 만큼 이 세상이 만만해 보이나? 이미 네 손에 죽어 간 생명도 몇 명이나 있을 텐데.”

반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었다.

나는 욱, 하는 마음에 입술을 달싹이려다 닫았다. ‘내 손에 죽어 간 생명’이라, 그래. 이 또한 희생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한들 그들 또한 나름의 사정과 논리가 있었다. 만일 그들까지 구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

이 또한 희생이라면 희생이리라.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이, 어린아이의 억지에 가깝다는 사실쯤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내가 하면 되잖아.”

내 읊조림에 실린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재확인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달구어진 목소리가 재차 토해진다.

“내가 더 희생하면 돼… 여태껏 그래왔듯이!”

“재차 말하지만, 아무리 너 혼자 희생해 봐야 한계가 있다고…….”

“……해내야만 해.”

그러면서 나와 눈을 마주친 사내의 몸짓이 우뚝 멎었다.

그의 망막 위로 핏발 선 금빛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따로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다름 아닌, 내가.”

굳고 너절한 어조였다. 군데군데 파먹힌 감정의 자국을 눅눅한 습기로 때운.

“엘시 선배를 구하고 싶어. 아니, 셀린도, 세리아도… 다들 너무 아프기만 했잖아.”

더는 논쟁이나 설득도 아니었다.

단순한 호소로 전락한 나의 언어에, 사내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입술을 붙이고 떼기를 반복했을 뿐.

끝내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저 둘만으로는 안 돼… 내가, 내가 해내야만 해. 어떻게든……!”

“……애송아.”

한숨 섞인 한 마디였다.

바위에 걸터 앉아 있던 사내의 몸이 서서히 일으켜졌다. 나를 묵직이 응시하는 사내의 시선은 건조하기만 했다. 한여름의 뙤약볕만큼이나.

그가 검을 허리춤에 갈무리하며 한 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네가 싫다. 그동안은 까닭을 모르고 있었어… 아직 그토록 지킬 것이 많이 남은, 네가 못내 부러운가 싶었을 정도였지.”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내의 걸음걸이는 느긋하면서도 정적이었다. 그가 땅을 즈려밟는 소리가 하나의 운율을 형성할 만큼.

이윽고 나와 사내의 거리는 지척.

바로 눈앞에서 본 사내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감하기만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에 씻겨 굴곡을 잃어버린 바위가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 알겠다. 네가 왜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차가운 불꽃이 타오른다.

사내의 금빛 눈동자였다. 강렬한 존재감이, 사내의 눈동자를 유일한 광원으로 만들고 있었다.

“너는 나야.”

그 한 마디에 담긴 감정은, 글쎄.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농축되어 있어 함부로 표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움찔 몸을 떨며 한 걸음을 물러섰을 뿐.

사내는 재차 토해냈다.

“너는, 나를 닮았어.”

또 다시 한 걸음, 사내가 발을 내딛자 내 몸이 자연히 그만큼 물러선다.

일순 섬뜩한 감각이 말초신경을 훑고 지나갔다. 그만큼이나 사내의 감정은 그 유래와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었던 거야… 애송아.”

그때였다.

사내의 몸이 우뚝 멎고, 나를 포위하고 있던 살벌한 기운이 가라앉았다. 일순 진득하다 싶을 만큼 농밀했던 감정의 밀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이 끝.

사내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다시 뒤돌아 섰다. 더는 용건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다만 내가 원하던 한 마디는 끝내 들을 수 있었다.

“……가라.”

어디로, 라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얼마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사내가 등진 방향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돌아보자,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일렁이는 공간.

느닷없다 싶을 만큼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사내는 늘 그렇듯 메마른 음색으로 말했다.

“어차피 말려도 갈 생각이었을 테지… 소용없는 짓에 열과 성을 투자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저벅, 저벅.

그러면서 사내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에 걸터앉아 있던 바위를 향해서.

나는 일순 머뭇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주어야 할까 싶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혹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받아쳐 줄까?

둘 다 해답은 아니리라.

바깥에서는 목숨을 건 혈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시 바삐 달음박질을 쳐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내가 등을 돌렸을 찰나.

“하지만 명심해라.”

그 한 마디에, 내 시선이 이끌리듯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덧 바위 위에 걸터앉은 사내가 보이고 있었다.

그의 낯빛은 목소리만큼이나 담담하기만 하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미래는 이미 뒤틀렸다. 이제는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어.”

언제나 들어왔던 말이었다.

나는 그 불길한 경고를 뿌리치고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잔향처럼 사내의 목소리가 내 뒤를 따라붙다 흩어진다.

“이 또한 운명인가…….”

새하얗던 빛이 나를 감싸 안으며 수많은 색채로 찢어진다. 무수한 입자 하나하나가 기억과 감정의 파편이 되어 내 심장에 알알이 틀어박히고 있었다.

기억, 기억, 기억.

그 끝에서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하나였다.

아프다.

*

핏물이 비산하고, 두 여인이 지면 위를 구르는 전장 속.

눈을 감고 있던 사내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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