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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4)화 (604/649)

Chapter 604 - 7. 질투는 나의 힘(104)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특히 전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지옥은 곧 삶이나 다름없었다. 피가 튀기고 비명이 난무하는 장소가 지옥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전투에서 규모의 크고 작음은 의미가 없었다. 단지 여인 셋이 맞붙기만 해도, 목숨을 건 싸움은 그 자체로 치열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그 셋이 대륙에 이름을 날릴 정도의 강자라면야.

이제 막 ‘대마법사’에 이른 엘시는 물론이고, 그와 손을 맞추고 있는 대마녀는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였다. 더불어 일방적으로 그 둘을 몰아붙이고 있는 여인은 또 어떤가.

수백 년 전에 대륙을 불태울 뻔한 전설적인 괴물이었다. 비록 5할의 힘밖에 내지 못한다지만, 그 자체로도 일국의 전력을 너끈히 무너트릴 만하리라.

이름하여 ‘흡혈귀’.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고귀한 자태의 여인은, 이를 악문 채 팔을 휘뒤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채찍처럼 뻗어 나온 핏빛의 궤적이 분열하며 날붙이를 이루었다.

대다수는 마력의 방패에 막혀 불꽃과 함께 스러질 운명이었다. 다만 흡혈귀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남은 한 손 위에 떠올라 있던 핏빛의 구체.

얼핏 보기에도 불길한 빛으로 일렁이던 혈액의 집약체는, 내던지자마자 광속의 궤적을 그렸다.

팡-!

소리마저 지워 버리는 강렬한 일격. 일대의 공간이 그 궤적을 따라 주욱 찢어지다가, 다시 맞물리며 굉음을 일으켰다. 결계의 내부가 온통 뒤흔들 정도의 위력.

이를 막아 낼 만한 여력이, 대마녀와 엘시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갈기갈기 찢긴 마력의 방패가 산산이 부숴지고, 급히 몸을 날렸으나 충격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두 여인의 자그마한 육신이 땅 위를 굴렀다.

벌써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군데군데 찢긴 옷, 선홍색으로 물든 타박상, 송골송골 맺힌 땀과 풀려 가는 동공의 초점까지.

한계에 달하기 직전에 보이는 모습이었다.

교전을 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흡혈귀는 그제야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풀었다.

이제 끝인가?

전투가 너무 길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도 너무 많았고, 그래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둘을 죽이는 것은 쉽다.

저항이 만만치 않다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였다. 혹은 저 둘의 견제를 정면돌파 하면서 손수 목을 따는 것도 즐겁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까닭.

흡혈귀의 눈이 흘깃 어디쯤을 향했다. 그곳에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채 엎어진 사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정녕 끝이란 말인가?

종전에도 의식을 잃었다가, 새로운 인격이 빙의했던 사내였다. 혹시 또 다른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칠죄성 ‘오만’.

하늘에 뜬 일곱 별 중 가장 찬란한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끝내 별똥별이 되고 말 비운의 존재였다.

대신 그 강함만큼은 진짜였지만.

흡혈귀는 아직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냉기를 느끼며,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었다.

“자, 이제 끝…….”

그렇게 슬슬 마무리를 지을까, 싶었던 찰나.

팍, 하고 땅에서 흙먼지가 치솟았다. 그야말로 먼지만 치솟는 수준의, 범위만 넓은 바람 마법.

물론 그 시전자가 대마녀였던 만큼 그 위력만큼은 어마무시했다. 일순 흡혈귀조차 어라, 하는 사이 살짝 몸이 떠올랐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작해야 한 치밖에 떠오르지 않은 흡혈귀의 몸은 별다른 착지 자세 없이도 안정적으로 땅에 내려앉았다. 도리어 시야가 가려졌다는 사실이 더욱 짜증날 따름이었다.

자욱하고 밀도 높은 흙먼지.

흡혈귀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으려던 그때.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흡혈귀의 몸이 멈칫 굳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폭음.

하늘에서 내리꽂힌 벼락이, 흙먼지를 태우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흡혈귀는 그 빛과 열의 폭풍 속에서 소리없이 혀를 찼다.

귀찮게시리.

광풍과 함께 연기가 찢어진다. 최후의 발악이 실패한 두 여인은, 땅에 엎어진 채 사나운 눈빛으로 흡혈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흡혈귀로서는 실소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재미있는 짓을 했네? 그래봐야, 내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바로 격의 차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절의 힘을 되찾은 흡혈귀와, 그렇지 못한 대마녀.

무슨 짓을 해도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새삼스레 그 사실을 깨달은 흡혈귀는, 비로소 비릿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그래, 저들에게 더는 수는 남아있지 않다.

짜릿한 쾌감이 꼬리뼈를 툭 치고 찌르르 올라온다. 흡혈귀는 눈을 감은 채 남몰래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내가 너를 내려다보는구나.

너는 무력하고, 나는 네 모든 것을 빼앗으면서.

흡혈귀의 눈앞에 오래 전의 풍광이 아른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홀로 구석에 남아 있던 그날, 골방에 처박혀 몰두하던 모든 연구 성과들이 종이 쪼가리로 전락한 그날, 가주와 가신들의 추대를 단상 아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던 그날!

오로지 그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수백 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오면서.

이제 결실을 맺을 시간이었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었다.

탁, 하고 몸을 일으키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좌중의 시선이 서서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낯익은 사내 하나가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주인님!”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반긴 이는 바로 엘시였다.

이윽고 사내의 정체를 눈치 챈 흡혈귀의 눈동자에 경악과 낭패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몸을 일으킨 사내는, 무언가 이상했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비단 흡혈귀뿐만이 아니었다. 화색이 감돌던 대마녀와 엘시의 낯빛도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으니까.

비틀, 비틀.

망가진 육신이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몸짓은 흐느적하기만 해서, 사내가 제정신을 되찾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사내의 눈동자는 이러한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초점이 완전히 풀린 눈동자는, 그가 이성을 되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사내는 이따금씩 머리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끄으’하는 신음을 낼 뿐이었다.

또한 그 기세는 어떤가.

유심히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흡혈귀의 눈동자에 흐릿한 이채가 맺혔다. 이내 여인의 입가가 옅은 호선을 그린다.

“……아하.”

그 ‘꼬맹이’였구나.

칠죄성 ‘오만’은 그 존재감부터가 남다르다. 일대의 공기가 사내에 의해 꾹 눌러진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저 남자는 아니었다.

몸뚱어리마저 성치 못하다. 그나마 ‘오만’에 의해 재생 능력이 자극된 탓인지, 출혈은 멎었지만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현실이었다.

이래서야 상대할 가치도 없는데.

비틀거리던 사내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검극을 바로했다. 다름 아닌 흡혈귀를 향해서.

여인은 살풋 고혹적인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기특하네, 꼬마야… 그 꼴이 되어서 싸울 생각까지 하고? 하지… 마안?!”

바로 그때.

쾅, 하는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기둥처럼 솟구친다.

뒤늦게 땅을 박찬 자리에서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만신창이가 된 몸뚱어리로 낸 출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힘이었다.

흡혈귀조차 일순 당황해서 손을 들어 검을 막아낼 정도로.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내가 혼신을 다한 일격에도 여인의 팔은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고, 우월한 신장으로 찍어 누르고 있음에도 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최후의 발악인가?

흡혈귀가 그러한 판단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킬 무렵이었다.

쾅!

다시 한 번 검이 여인의 팔을 후려친다. 그 여파를 견뎌내지 못한 지반이 우득, 하고 여인의 발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그래봐야 유효타는 아니었다. 도리어 흡혈귀가 놀란 까닭은 따로 있었다.

‘위력이 더 강해졌어?’

말 그대로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의 육체는 모로 보나 한계점을 지나 있었다. 약물이나 주술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짜낼 수 있는 여력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바로 직전의 일격처럼.

하지만 그보다 더한 위력으로 연달아 검격을 가하다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태였다. 미간을 좁힌 흡혈귀의 시선이 멀거니 사내의 눈을 마주했을 찰나.

“……으, 아.”

여인은 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사내의 눈동자를.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간 탓이었다. 이만큼이나 강렬한 분노와 살의, 원독을 느껴 본 적이 언제였는지.

사실 돌이켜 볼 필요도 없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흡혈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지척에서 마주했던 ‘오만’의 눈.

그것이 가라앉은 휴화산이었다면, 이 남자는 활화산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쾅, 쾅, 쾅, 쾅!

비명을 닮은 함성이 터져 나오고, 사내의 검이 연달아 내리쳐진다.

그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여유롭기만 하던 흡혈귀의 몸이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더니, 끝내는 막대에 강타 당한 공처럼 하늘을 날았을 정도였다.

텅!

허공에 뜬 흡혈귀의 눈이 서서히 엘시를 향했다. 사내를 기절시키고, 이러한 상태로 일으켰으리라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

그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는 멍청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무, 슨…….”

더듬거리며, 두 음절.

그것이 한계였다. 어느덧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사내의 몸이 엄습한다. 실핏줄이 흰자위를 물들인 그 눈동자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검을 쥔 손이 주먹을 이룬 채 여인을 겨누고 있었다. 권(拳)이냐, 검(劍)이냐. 그조차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본능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순 정지한 세계가 사내의 손으로 수렴한다. 소용돌이 치며 모여드는 그 마력의 입자를 보고, 흡혈귀는 느릿한 시간 속에서 비명을 짜내야 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아아악!”

그리고 정적.

일권이 작렬하는 순간, 소음마저도 자취를 감춘다. 단지 넓은 파형을 그리는 충격파가 둔탁한 울림과 함께 퍼져 나갈 뿐.

붕산격(崩山擊).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산맥을 무너트렸다는 전설이, 이 자리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여인의 몸뚱어리는 하나의 빛줄기가 되어 대지에 내리꽂혔다. 지반이 으스러지며 파열음이 터져 나왔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토사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러면서 드높이 치솟는 흙기둥.

대지를 반파시키는 그 일격을 앞두고, 엘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마에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다만, 이안을 보자마자 뇌리에 스치는 단어가 있기는 했다.

‘폭주’.

무언가가 잘못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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