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5)화 (605/649)

Chapter 605 - 7. 질투는 나의 힘(105)

수많은 기억들이 뇌의 주름 사이사이로 침윤한다. 스며드는 화상들은 하나같이 이별과 관련되어 있었다.

‘원독(怨毒)’이라 했던가.

깊이 사무친 원한은 그야말로 독(毒)이나 다름없었다. 머리와 가슴을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이고, 불태우며, 나날이 증오와 살의는 더해져 간다.

이 모든 것이 사내의 감정이었다. 또한, 살아남은 자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목도해 왔던 사내였다.

비단 소중한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최소한 존엄조차 지키지 못하고, 일개 고깃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시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불합리하다.

사내는 그리 생각했을 터였다. 아니, 내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잃었을 때의 감정이 절절히 전해져 온다. 무너진 댐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강물처럼, 통각의 파도가 내 이성을 남김 없이 휩쓸어 간다.

그래, 돌이켜 보면 이랬던 적이 있었지.

미래에서 온 편지를 받은 이후였다. 때때로 나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까닭 모를 분노와 살의를 참기 힘들었고, 때로는 그 불꽃이 뇌리마저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전해 들은 적도 있었다.

‘동화율이 지나치게 높아진 탓이다.’

아마도 사내는 내가 자신의 해묵은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처음에는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받아들였던 해설이었으나, 마침내 나는 그 말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몇 년인지도 모를 세월 동안 벼려 온 칼날 같은 마음이었다. 뒤죽박죽 뒤섞인 기억 하나하나가 면도날이나 다름없었다.

뇌 혈관에 면도날을 들이붓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없다. 온 대륙을 통틀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직 하나, 그 모든 상처를 어떻게든 감내해야 했던 사내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사내의 기억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내가 다룰 수 있는 기술의 폭은 넓어지고 위력은 강해진다.

일시적인 폭주에 불과해도 좋았다. 그러다가 몸뚱어리가 걸레짝이 돼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해도 좋았다.

저 괴물을 죽일 수만 있다면!

한계까지 악물어진 이가 통증을 호소했다. 내장으로부터 솟구친 핏물이 구강 내부까지 쏟아져 나왔으나, 나는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문득 안도에 젖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눈물과 핏물로 촉촉해진 호소였다.

“드, 드디어 지켜냈다…….”

두 개의 화상이 망막 위로 겹친다.

불타는 대수림을 등진 채, 나무에 기대 눈물을 흘리는 소녀.

지반에 틀어박힌 채,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은발의 여인.

 

나와 사내의 기억을 나누는 경계선이 흐려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장면들의 혼재되어 수정체를 침습한다.

“……내, 소중한 사람.”

유성이 하늘과 땅을 잇는다.

은빛의 오러를 불꽃처럼 두른 육신이 중력가속도 이상의 힘을 받아 내리꽂혔다. 불의 꼬리가 이어지고, 흡혈귀가 손을 치켜들며 이내 격돌.

굉음, 터져 나가는 지반과 핏빛 마력의 파편이 아리따운 화음을 이룬다.

첫 번째는 경합.

다급히 핏빛 방패를 앞세운 흡혈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당혹감에 물든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고작 나 따위와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

마땅히 그래야 했다. 허공을 한 차례 박찬 내 몸이 다시 한 번 탄성을 받아 쏘아졌다.

캉, 캉, 캉!

착지하자마자 폭사되는 일곱 줄기의 검광, 절정에 이른 금사검(金獅劍)은 모든 저항을 봉쇄한다.

세 줄기는 휘둘러지는 완팔을 쳐낸다. 또 다른 세줄기는 남은 오른팔을 제압하고, 끝내 한 줄기는 왼쪽 어깨로.

카각, 하고 마치 금속이 마찰하는 듯한 소음과 함께 칼날이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꽂히기는 했지만, 얕았다. 흡혈귀의 발길질이 곧장 내 명치를 강타했다.

“끄윽……!”

컥, 하고 숨이 막히고 핏물이 올라왔으나 신음은 흘린 쪽은 도리어 흡혈귀뿐이었다.

명치를 강타당한 내 몸이 멋대로 여인의 다리를 끌어안듯 당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달 뒤집기의 응용, ‘나락 꽂기’.

몸을 뒤틀듯이 근육을 짜낸다.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오로지 육체의 힘만으로 여인의 몸뚱어리가 허공에 떠오르고, 또 다시 땅으로 내리꽂힌다.

우드득, 하고 다리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흡혈귀의 입에서 핏방울과 함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 건 설마……!”

쿠웅-!

투박한 땅울림과 솟구치는 흙먼지, 이미 움푹 들어간 대지 곳곳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물론 흡혈귀도 그동안 얌전히 있지는 않았다.

팍, 하고.

허무할 만큼 단순히 내 오른팔이 터져 나간다. 한 줌의 핏물로 화한 살점이 꽃처럼 흩날린다.

마치 불티처럼.

또 하나의 화상이 뇌리를 스친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암청빛 머리카락과 연녹색 눈동자, 나의 스승.

평소와 달리 성숙한 육신을 한 그녀를 앞두고 나는 무얼 했더라.

무릎을 꿇었었지.

“……첫째야.”

“죄, 죄송… 죄송합니다. 스승님.”

울면서, 손을 덜덜 떨고.

무력하다. 뼈저리게 아픈 기억이 송곳처럼 심장을 찌른다.

“제가, 너무 늦어서… 사, 사매도. 스승님도…….”

나는 왜 눈물만 흘려야 하지?

분하다. 괴롭다. 심장이 뒤틀리고 폐부가 뜨겁다. 자애로운 스승의 미소가 더욱이 마음 아팠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인데.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어째서.

그럼에도 스승은 한 점의 원망도 없이 웃었다.

“……못난 대제자로구나.”

쾅!

강렬한 충격과 함께 시야가 현재로 되돌아 온다. 내 몸은 이미 의식과 무관하게 피와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흡혈귀가 내리꽂히자, 충격으로 퉁겨 나온 검을 왼팔이 붙잡아 다시 한 번 일격.

확실한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푹, 하고 살짝이나마 칼끝이 복부를 파고드는 느낌.

하지만 얕았다. 그보다 전에, 흡혈귀가 두 손으로 내 검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여인이 웃는다.

“아깝구나, 오른팔이 멀쩡했다면 또 몰랐을 텐데… 꼬맹아, 아니. 이제…….”

잡음.

온갖 기억들이 뒤섞이며 고막에 소음을 일으킨다.

“……라고 불러야 할까? 아주 순조롭게 각성 중이야.”

피와 악으로 가득 찬 폐부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짜인다.

“네, 네가…….”

내 소중한 사람을 죽였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무언가에 턱 막힌 듯이 언어가 정제되지 않았다. 핏물이 터져 나와 기도가 막혔는지도.

나는 단지 울분에 젖어 손도끼를 빼드는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검을 빼낼 틈은 없었다.

쾅!

망치와 정처럼, 손도끼가 검 손잡이를 내리치자 핏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흡혈귀의 입과, 내 잘려 나간 어깻죽지에서.

그러자 흡혈귀는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푸흐, 크흑… 끅끅… 나, 나를 죽이려고?”

그래.

나는 씹어뱉듯 속으로 읊조리며, 몇 번이고 손도끼로 검을 두드렸다.

쾅, 쾅, 쾅!

그럴 때마다 핏방울이 비산하고, 땅이 몇 치씩 패인다. 칼날이 여인의 두 손바닥을 베어 나가며 깊숙히 박힌다.’

어느덧 흡혈귀의 웃음 소리는 피를 토하는 소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아하, 크흐… 쿨럭, 크흑… 아하하! 이게, 이게 네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니… 케엑, 케… 아하하하학!”

나는 그 웃는 낯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쿵, 하고 전력을 다해 손도끼를 내리꽂았다. 한계 이상의 힘을 짜낸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손잡이를 지탱하지 못한다. 하늘로 튕겨 나가 핑그르르 도는 내 애병.

하지만 목적을 이루었다.

푸욱, 하고 칼날이 복부를 완전히 관통한다. 핏물을 분수처럼 내뿜는 여인의 어깨를, 내 손이 붙잡고 온힘을 짜내 던져 버린다.

소리는 없었다.

칼날이 복부부터 아랫죽지까지 관통하는, 흉악하고 잔혹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직 핏물이 비산하고, 여인의 몸뚱어리가 어딘가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

나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비틀, 하고 발을 헛딛자마자 몸뚱어리가 멋대로 무릎을 꿇는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불현듯 티끌과도 같은 이성이 자문했다.

왜 죽지 않지?

아무리 하이 익스퍼트라고 한들, 한계는 존재할 텐데. 나는 죽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절단 부위가 부글부글 끓는 감촉이 느껴질 정도였다. 환상통과는 별개의 감각.

아무래도 상관이 없긴 했다.

내 목표는, 저 괴물을 죽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얼 희생해도 좋았다.

내가 죽인다.

내가, 해야만 한다.

결의, 혹은 망집이 나를 지배하자 다시금 몸뚱어리가 땅을 딛고 섰다. 증오와 살의에 젖은 걸음이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땅을 박차고 쏘아지려던 찰나.

훅, 하고.

“……첫째야.”

따스한 온기와 함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자그마한 육신의, 가녀린 팔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간단히 뿌리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어라.

내 몸에서 멋대로 힘이 빠져 나갔다. 그대로 엎어지려던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팔.

그 음색에는 명백히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만, 그만하거라… 고, 고생… 고생이 많았구나.”

내 의식이 멀어진다.

이것은 내가 청산해야 할 몫이 아니었다.

대수림에서 울고 있던 사내.

그의 기억이 다시금 범람한다. 그러니 멋대로 입술을 놀리는 이도, 나는 아니었다.

“스승님…….”

사내는 스승의 인도에 따라 얌전히 그 무릎 위에 몸을 뉘였다.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사내의 낯가죽을 적셨다.

따스한 빗물처럼.

사내를 내려다보는 대마녀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음일까.

다소 혼란스러운 낯빛이었지만,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제어할 도리는 없어 보였다.

마치 나처럼.

그조차도 찰나에 불과했다.

본능일지도 몰랐다. 과거와 미래, 현재가 뒤섞이는 ‘경계’ 속에서 위대한 마도사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낯선 인격에 제 몸을 맡겨 보기로.

여인은 기억 속의 그날처럼 웃어 보였다.

“……그간 평안했느냐?”

느닷없는 사제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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