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6 - 7. 질투는 나의 힘(106)
‘경계’는 불분명한 공간이다.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곳이었다. 말 그대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나 다름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창출되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다든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든가.
인과관계가 비틀린다든가.
심지어는 개념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경계’를 일견(一見)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그만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경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다루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미증유의 흐름에 휩쓸려 영영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면 몰라.
무(武)와 마도(魔道)의 끝을 보았다는 위대한 존재, ‘마스터’조차 ‘경계’가 일으키는 기현상을 모두 이해하기는 무리였다. 당장 ‘대마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낯선 기억들이 뒤섞인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처음으로 ‘이안 페르쿠스’라는 꼬맹이를 만났을 때부터?
혹은, 그가 대마녀의 온몸을 갉아먹던 통증을 가라앉힌 이후부터.
대마녀의 무의식 한 켠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여인이 하나 있었다. 마냥 생경하지만은 않은 감각이었다.
그 원인이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경계’의 영향이리라.
흡혈귀는 아카데미 한복판에 ‘경계’를 구현한 결계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통상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존재하지 않았을 기억이 뇌리를 파고들더라도.
감정이 멋대로 널을 뛰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애송이를 향한 묘한 친근감 또한, 이와 같이 예외적인 현상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을 테지.
다만 세상에 ‘어쩌다’ 같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조차 어떠한 개연성의 씨앗으로부터 탄생한다. 대마녀는 그 점이 늘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째야.”
짤막한 호명이었다.
어느샌가 멋대로 입에 들러붙었던 호칭이었다. 낯선 기억 속에서, 어느 사내를 부르던 말.
‘경계’ 너머에서 또 다른 미래가 침습하고 있었다.
비단 ‘대마녀’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 또한 ‘경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직전의 미쳐 날뛰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식’.
죽어 마땅한 이안의 몸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까닭,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풍경에 낯선 기억을 겹쳐 보고 있었다.
물론 마냥 단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정신이 점차 낯선 기억으로 덧칠될수록, 그 힘 또한 일취월장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이안의 목적은 그것이었을 테지.
제 몸을 바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흡혈귀를 압도하는 것.
자살 행위였다.
대마녀는 단박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경계’ 너머로부터 온 인격이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서 막아야 한다고.
대마녀는 기꺼이 내면의 목소리에 응해 주기로 했다.
“스승님…….”
힘없이 목소리를 읊는 사내의 눈동자는 탁하기만 했다. 제가 누군지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 그만큼이나 경계 너머의 기억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그 ‘오만’이란 자의 것이 아닐까.
저 ‘스승님’이라는 호칭 또한 그의 기억으로부터 발원하고 있을 터였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이안은, 이 세상의 ‘이안’보다 경계 너머의 ‘오만’에 가까운 상태였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끌어다 쓴 자의 전형적인 말로였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몸과 정신의 불균형을 견디다 못한 육체가 스스로 붕괴하겠지.
하지만 임시처방은 가능했다.
“……잘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경계 너머의 세계에서 대마녀와 사내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래서 이토록 가슴이 쓰리다. 음색에 옅은 습기가 밴 까닭 또한 마찬가지였다.
폭주의 주된 원인은, ‘오만’의 기억에 담긴 감정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지독한 원망을 가라앉혀 주면 된다. 다름 아닌, 경계 너머의 기억을 빌어서.
대마녀는 서서히 제 가슴을 가득 채워 나가는 감정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기억도, 추억도, 아픔도 낯선 화상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었다.
단 하나.
못내 거슬리던 점이 하나 있었다. 대마녀의 심상은 공고했고, 따라서 외부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토록 기억과 감정이 제멋대로 침투하는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 많이, 많이 노력했구나.”
거칠던 사내의 호흡이 서서히 정돈된다.
폭주하던 감정이 잦아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면 대마녀의 감정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불안정하기만 했다.
존재하지도 않던 과거를 헤매던 사내의 입에서 나지막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복수를, 복수를 해야 하는데…….”
무슨 소리일까.
이해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대마녀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을 얌전히 내버려 두었다.
그래, 이제는 알 만했다.
무려 마스터에 달한 대마녀의 정신이 이토록 불안정할 수 있었는지.
“네가 왜? 그까짓 건, 이미 내가 해놓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요.”
“너만 괜찮으면 됐다… 늘 말했잖느냐.”
그만큼 간절했던 것이다.
경계 너머의 ‘대마녀’가 지니고 있던 소망이, 그 무의식이 경계에 잔존하고 있다가 흘러 들어왔다.
왜 그토록이나 이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떠한 화상이 눈앞을 스친다.
여태껏 뇌리를 파고들던 낯선 기억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것이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면, 지금 심장을 쿡쿡 찌르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불타는 대수림.
그곳에서 여인이 손을 뻗어 사내의 눈물을 지우고 있었다.
울고 있는 그가 안타까워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경계를 넘어 온 ‘대마녀’의 기억은 사내와 재회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듯했다.
“사제지간은 부모와 자식 같고, 사형제지간은 형제와 같다. 그러니 우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네가 제일 소중했던 거야.”
사내의 동공에 일던 떨림이 멈춘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둘째도… 우리가 설마 네 슬픔을 바랐겠느냐?”
침묵.
거칠던 숨소리가 가라앉고, 넘쳐흐르던 핏물이 줄어든다. 혈압이 안정되고 있다는 신호.
“이제 그만 잊어도 된다.”
“어떻게.”
“스승의 결심을 후회하게 만들 셈이냐?”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죽음을 잊지 못해 사내의 삶은 장례식이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승은 어떻게든 그 슬픔에 종지부를 찍어 주고 싶었다.
너를 위해 죽은 내 선택에 한 점의 후회 없노라고.
안개가 개이듯 텅 비어 있던 사내의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 온다. 마지막 순간에 언뜻 비친 금빛 동공은, 지독히도 피로한 눈을 하고 있어서.
“……여전하시군요.”
그 쓰디쓴 한 마디가 유독 가슴에 남았다.
이로써 끝.
비로소 경계 너머의 미련을 털어낸 대마녀의 정신이 일순 아찔해졌다. 그야 며칠 동안이나 인격과 감정을 뒤흔들어 놓던 기억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강렬한 소망의 영향일까.
어느덧 사내의 텅 빈 어깻죽지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경계’, 그 어느 곳보다 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장소.
경계 너머에서 온 ‘대마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이 또한 당시의 장면을 재현하고 싶었던 욕망의 부산물이리라.
어느 쪽이든 손해는 없었다.
이제야 사내는 죽을 위기에서 벗어났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이안은 이윽고 제정신을 되찾았으니까.
“……대마녀 님?”
죽기 직전에 살아난 주제에 얼떨떨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대마녀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자그마한 손이 딱, 하고 사내의 이마를 강타했다. 그래봐야 완력이 강한 편도 아니라, 강건한 기사의 육체에 유의미한 통증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안이 채 무어라 말하기도 전.
대마녀는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일어났느냐? 못난 놈,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데…….”
그리고 푹, 하고.
시간이 정지한다. 핏빛의 창이 여인의 자그마한 육신을 관통하고, 눈을 부릅뜬 대마녀의 몸이 투창의 진행 방향으로 꺾인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마력의 방패가 궤도를 틀어 다행이었다. 저 멀리에서 엘시가 급히 짜낸 방벽은, 심장이 꿰뚫리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광풍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대마녀의 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잔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날아간 여인의 빈 자리에는 핏자국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이안은 깜짝 놀라 더듬더듬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마녀를 향한 기습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윽고 부정형의 핏빛 해일이, 대마녀를 노리고 몰아친다.
고민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안은 잔류하는 기억의 판단에 따라, 다급히 검을 내리그었다.
콰직!
그러자 일대의 핏물이 갈라지며 운동량을 상실한다. 다만, 그때는 이미 핏빛 파도가 대마녀에게 닿기 직전.
잊고 있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푸흐, 아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이제는 너무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반신이 찢겨 나갔을 여인은, 어느덧 몸을 재생한 채 새파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멋대로 끝내고 그래? 아직, 우리는 청산해야 할 몫이 남아있잖아. 그렇지 않니, 꼬맹아?”
걸음을 내딛는 괴물의 몸이 비틀비틀 기운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상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안은 일순 미간을 좁히며,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이제야 막 정신을 차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토록 질긴 싸움을 예상했겠는가.
“자, 이제 끝을 내……!”
만일을 대비하고 있던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늘이 찢어진다.
아니, 사실 하늘이 찢어진 지는 꽤 오래 되었다. 뇌신의 분노가 쏟아져 내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쾅!
아물지 않은 상처 너머에서 전뇌의 폭풍이 내리꽂힌다. 그 후폭풍으로 터져 나간 지반이 사방으로 비산했지만, 이안이 이를 앞두고 넋을 놓은 시간은 없었다.
“뭐해?! 당장 달려어어엇!”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이안의 몸이 본능적으로 땅을 박찼다.
폭주는 끝났지만 당시의 기억은 아직 잔존하고 있었다.
육체마저 아문 사내의 독주는 무시무시했다. 전하의 폭포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여인의 몸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로.
우선은 해(結).
응집된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뇌전의 파도를 꿰뚫고 여인의 심장을 겨눈다.
탁, 하고 폭사된 검광이 심장 앞에서 멎는다. 전하에 감전돼 근육이 수축된 와중에도, 흡혈귀가 제 근육을 억지로 짜내어 막아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뇌신의 강림이 끝나고.
흡혈귀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웃었다.
“……조금 늦었네?”
그에 대한 이안의 대답은 간결했다.
“결(解).”
대마녀에게 배운 결과 해의 응용.
널리 퍼져 있던 오러가, 단숨에 응집돼 쏘아지면 어떻게 될까?
탕, 하고 응집된 오러가 폭발하며 한 줄기의 빛을 그린다.
흡혈귀의 몸뚱어리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