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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7)화 (607/649)

Chapter 607 - 7. 질투는 나의 힘(107)

이안은 헐떡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드디어 끝이다.

흡혈귀의 육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안이 웃지 못하는 까닭은, 제 머리를 꾹꾹 쥐어 짜대는 폭주의 잔향 탓이었다.

기억들이 범람한다.

본 인격이 잠들어 있던 동안, 미래에서 온 사내가 싸우던 장면들이 끝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전투를 가슴에 새기라는 듯이.

방금 전에도 무언가.

기억에 없던 기술을 썼던 것 같은데…….

그러나 이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총총거리며 달려오는 소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그리운 호칭이었다.

얼마만에 듣는 목소리인지,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신이 나 방방 뛰는 약혼자를 품에 껴안았다.

부드러운 무게감과 따스한 체온.

마치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엘시의 자그마한 몸집은 이안의 품에 너무나 알맞았다.

“……엘시 선배.”

“내가, 응? 내가 도움이 된 거지?!”

승리의 열기에 도취된 엘시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양, 엘시는 제 머리를 이안의 품에 마구잡이로 부볐다.

“응, 응?!”

“네, 네… 도움이 됐죠, 당연히. 그러니까 슬슬 결계를 나갈 방법이나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서 엘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이안의 손.

칭찬이 못내 기분 좋았는지, 엘시는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나가면 약혼할 거지?”

정작 그 내용은 그렇게까지 순수하지만은 않았지만.

각오하고 있던 바였기 때문에, 이안은 별달리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을 받았다.

“네, 당연히… 그런데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야죠.”

“그거라면 걱정 없어.”

이미 그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엘시는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핵이 필요하거든. 이 결계는 조금 특수해서, 외부의 핵과 내부의 핵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내부의 핵은 시전자가 맡게 돼 있어. 이제 시전자가 죽었으니, 자연스레 결계가 붕괴되겠지?”

“언제쯤에?”

“그야, 시전자가 사망하는 즉시…….”

막힘없이 이어지던 문답이 정지된다.

말끝을 흐리던 엘시는, 이내 미간을 좁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결계가 붕괴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하나뿐이리라.

팍, 하고 엘시의 몸을 걷어차는 이안의 발길질.

엘시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날아가는 사이, 이안의 다리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크으……!”

피가 역류하는 통증에 살기 어린 시선이 등 뒤를 향했다.

그마저도 잠시.

팍, 하고 다시 한 번 핏물이 뿜어져 나온다. 이번에는 이안의 온몸에서 피분수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사내는 한 웅큼 핏물을 토해내며 주저앉았다. 엎어진 사내의 목과 얼굴에서 한계까지 팽창된 혈관이 꿈틀거린다.

그야말로 삽시간.

저항할 틈도 없었다. 아니,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온몸의 혈액이 제멋대로 날뛴다. 심장과 뇌를 보호한 것조차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두려운 점은 따로 있었다.

이는 딱히 상대가 의도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

심장과 핏물이 북처럼 운율을 탄다. 그것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에 기뻐하는 열렬한 관중의 환호였다.

쿵, 하고 무형의 압력이 이안의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폐부가 신음을 흘린다. 끝내 온몸이 짓눌리는 통증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으극, 끄으으으……!”

핏발 선 눈동자가 압박감의 근원을 향한다. 이만한 존재감, 그저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 일대의 생사여탈권을 강탈하는 강자의 풍모.

단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성국의 수도 시엔델, 그곳의 드높은 산에 위치한 법정에서.

툭, 툭.

과도한 혈류를 이겨내지 못한 실핏줄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이를 현악기 삼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앉는다.

“……실로 오랜만이구나.”

평탄한 목소리였다.

감탄도 아니고, 조소도 아니었다.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일이 순리대로 진행되었다는 듯이.

전설 속의 마인은 끝없이 깊은 푸른 시선을 사내에게 던졌다.

“오랜 구속에서 풀려난 느낌을 아느냐, 이안 페르쿠스?”

“이, 걸 풀어 주면… 알 것 같은데……!”

“유감이구나, 아이야. 아직 나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거든.”

이만한 존재감, 이만큼 압도적인 전력 차.

이안은 순식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흡혈귀가 제 본체를 불러왔다.

한때 온 세상을 피로 물들였던 죄악의 육신을.

사뿐, 하고 흡혈귀가 걸음을 내딛자 이안의 머리가 다시금 땅에 처박힌다.

콱!

“계획대로, 는 아니었지. 본래라면 내 원한은 좀 더 느긋하고 확실하게 갚고 싶었는데 말이야…….”

흡혈귀는 혀를 쯧, 하고 차면서 어두운 낯빛을 했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여인이 가까워질수록, 이안의 몸에 가해지는 압력은 점점 더 가중되고 있었다.

체내의 혈액이 날뛰는 강도도.

끝까지 비명을 터트리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계획이 너무 많이 틀어졌어. 소중한 동생도 잃고, 도둑년도 한참은 더 비웃어 줄 예정이었는데…….”

“도, 둑년……?”

“그래, 너희가 ‘대마녀’라고 부르는… 흥.”

무심코 옛 이야기를 꺼내려던 흡혈귀는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복수는 이루었다. 예상보다 허무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흡혈귀가 승리했다는 사실이었다.

대마녀는 죽었다. 흡혈귀는 살았고.

이보다 명백한 우열관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어느덧 이안의 지척까지 다가선 흡혈귀는, 서서히 자세를 낮추었다.

이안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너희들은 속고 있는 거야. 먼 옛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 여자가 이루어 낸 것 중 대부분은 내 것을 빼앗은 결과물에 불과하거든.”

“…..흐.”

옅은 조소.

흡혈귀는 딱히 그 웃음소리에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귀찮다는 듯이, 검지를 슬쩍 까딱였을 뿐.

팍!

목덜미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였다.

“흐으, 끄으으으……!”

“아프지? 어떠니, 혈액의 통제권을 모조리 뺏긴 기분은? 이게 내가 가진 권능이란다… 일대의 모든 피와 생명을 지배하지. 물론, 그 안에 담긴 마력까지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흡혈귀도 딱히 답변을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던 듯했지만.

“이 힘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바쳐야 했어. 내가 아끼던 가문과 가솔, 전부를… 어떠니, 아이야. 너도 나와 계약해서 이 힘을 가지고 싶지는 않니?”

사내는 은근한 유혹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또 하나의 의문을 내뱉었을 따름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힘을?”

“되찾고 싶었으니까.”

음산하고 끈덕진 고백이었다.

일순 끝을 알 수 없는 늪지대가 보일 정도로.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밀도가 얼마나 높은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리는 사내.

“무엇을?”

“전부!”

“그래서, 무얼?”

흡혈귀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반복되는 문답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들끓는 핏물을 입가에서 주르륵 흘리면서, 사내는 재차 물었다.

“이제 무얼 되찾았지?”

침묵.

여인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입술이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스산한 제안이 이어진다.

“……닥치고 대답이나 해. 그래서, 우리와 함께할 건가?”

이제는 사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흡혈귀는 그 고집스러운 태도에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 올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곳에 널 지켜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네가 지켜야 할 사람만 남아있을 뿐이지… 저 꼬마 아가씨, 너한테 소중한 사람……!”

“왜 없어?”

그 반문에 흡혈귀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실로 고집불통인 사내였다.

두 눈으로 목도하지 않았던가. 핏빛의 창에 몸이 꿰뚫리고, 그 후에는 핏빛의 파도로 확인사살까지 끝마치던 광경을.

마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마스터뿐이다.

‘대마녀’가 죽은 이상, 승부는 끝이었다. 흡혈귀가 이곳에 본체를 불러오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이곳에 더는 그녀를 견제할 만한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잔인한 현실을 재차 인식시키기 위해, 흡혈귀는 조소를 터트리며 손가락을 뻗었다.

대마녀의 시체가 위치하고 있을 곳으로.

“후후, 좋아. 끝까지 그러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잘 봐, 저 비참한 패배자의 말로를……!”

그러면서 시선을 돌리던 흡혈귀는, 어라.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새하얘진 뇌리를 파고드는 것은, 사내의 이죽이는 소리.

“잘 보라니? 어디를?”

“그러니까, 저기에… 분명……!”

흡혈귀는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없다.

어디에도 없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땅을 굴러야 마땅할 원수가.

화들짝 놀란 여인의 눈이 정처 없이 떠돈다. 전후좌우, 사방을 모두 살폈지만 흡혈귀가 원하던 장면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끝내 그 시선이 향한 곳은 하늘 위.

그곳에 어느덧 맑게 개인 밤하늘이 떠 있었다.

결계가 만든 가짜 따위가 아니리라. 어슴푸레 빛을 발하는 별들이 고도로 계산된 궤도로 운행하는, 한낱 피조물 따위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창조주의 걸작이 지상을 오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인의 의문은 길지 않았다.

“흐름과 순환.”

정적이 잠긴 대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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