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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8)화 (608/649)

Chapter 608 - 7. 질투는 나의 힘(108)

차분하고 성숙한 음색이었다.

흡혈귀의 동공이 삽시간에 좁아진다.

“먼 옛날, 태초의 인류는 대자연을 보고 이 세상이 순환한다고 믿었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달이 차면 기울듯이. 세상 또한 창생과 멸망을 반복한다고 생각한 거야.”

“허튼 소리.”

헐떡이면서, 흡혈귀는 그리 덧붙였다.

떨리는 동공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 오감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

어느새 흡혈귀는 홀로 동떨어져 서 있었다. 끝없이 연장되며 멀어지는 풍경이 환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주위에는 누구도 없다.

오직 하나, 정면에 선 묘령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암청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떨어져 있었다. 심유한 빛을 품은 연녹색 눈동자와,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몸의 굴곡까지.

명백히 흡혈귀를 닮은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자매지간이었으니까.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흡혈귀가 발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딴 건 전설에 불과해……! 연구하면서 깨달았지. 원시 인류의 원초적 통찰이 반드시 진리의 편린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그럴지도.”

암청빛 머리카락의 여인, 대마녀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태초의 인류가 보았던 것은, 지상의 풍경뿐만이 아니야…….”

그러면서 대마녀는 서서히 손바닥을 뻗었다.

별빛이 그 위에서 춤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수십에서 수백, 끝내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숫자의 별빛들이.

회전하고, 순환하며, 하나의 구체를 만들고 있었다.

원(圓)과 구(球).

시작과 끝 없이 스스로 완결되는 도형.

‘세상’의 상징.

대마녀의 손가락이 오므려지며, 팔과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구체를 이루고 있는 별빛들의 회전은 점점 더 박차를 더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천공의 별들이 움직인다.

처음에는 눈치 채기 힘들 만큼 천천히, 은빛의 꼬리를 그리던 창공의 빛들은 이내 원을 이루었다.

흡혈귀가 허탈한 감상을 내뱉으며 뒷걸음질을 친 것은 그때였다.

“말, 도 안 되는…….”

고작해야 한낱 피조물이 짜 올린 술식이 아닌가.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천공의 천체가, 그에 비하면 먼지 한 톨조차 되지 않을 존재의 부름에 응해 움직이다니.

정작 그 이적(異跡)을 일으킨 장본인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대수림에 갇힌 뒤로, 매일 같이 밤하늘을 보며 고민했지. 과연 무엇이 세계의 본질에 가까운지… 이게 내 해답이야. 비록,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콰직, 콰직, 콰지지지직!

대마녀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을 계속하던 별빛들이 이내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하늘 위로 떠오르는 작은 태양.

“……그 흉내는 낼 수 있었지.”

천공에서 원을 그리던 별빛들이 하나둘씩 궤도를 좁히며 빛의 구체로 수렴한다.

수십, 수백, 수천.

그 안에 담은 별의 수효가 많아질수록 광구의 떨림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끝내는 구체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진동할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일개 필멸자가 짜 올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흡혈귀 또한 한때 마도에 몸 담았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대마녀의 술식이 지닌 위력 따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화를 주체할 수 없어진 흡혈귀는 비명을 내지르며 제 핏물을 흩뿌렸다.

“웃, 기지 말라고… 너 따위 도둑년한테, 너 따위 도둑년한테 또 다시……!”

대마녀의 나지막한 선언이 울려 퍼졌다.

“결(結).”

대마녀가 검지를 치켜들자, 미친듯이 떨리던 구체의 진동이 멎는다.

흡혈귀는 그때까지도 제 전력을 짜내던 중이었다. 핏발 선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면서.

“또 다시, 또 다시이이이이익!”

그것이 마지막.

대마녀의 검지가 내리그어지며, 최후의 한 음절이 토해진다.

“해(解).”

빛과, 별과, 달.

그리고 또 하나의 세계가, 창공을 가르며 내리꽂힌다.

하나의 세계를 으스러트리면서.

종말(終末)이었다.

**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 전에, 촉망받던 마도사가 하나 살고 있었다. 온 대륙을 통틀어도 그만한 동량을 찾기 힘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재능 있는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지지 못한 것이 없던 인생이었다.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인은 차기 가주로 낙점 받았다. 가솔들은 유능하고 아리따운 후계자를 사랑해 마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관심과 애정이 쏟아졌다. 비록 잘난 여인을 시샘하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그들은 시선을 던질 가치조차 없는 찌꺼기에 불과했다. 여인은 스스로의 재능을 믿었고, 세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썼으며, 훌륭한 가주가 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춘 여인이라도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

어린 시절부터 유독 울지도, 웃지도 않는 여동생이 여인은 못내 걱정이었다. 뚱한 낯빛과 세태에 통달한 듯한 눈빛은 얼핏 애늙은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모처럼 사랑스러운 외모를 타고났는데.

동정은 곧 흥미가 되었고, 흥미는 곧 애정이 되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다 욕해도 여인만큼은 여동생의 편이었다.

아무리 차가운 얼음도 온기 앞에서는 무력한 법.

처음에는 불퉁스럽기만 하던 여동생도 끝내 마음의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근황을 나누기도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도 전하기도 하던 어느 날.

여동생은 꼭꼭 숨겨 두었던 진심을 말해 주었다.

“나도, 언니처럼 될 수 있을까…….”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백한 소망이었다.

그날, 여인은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이 기뻤다. 무엇에도 의욕을 내지 않던 여동생이 처음으로 말해 준 목표였으니까.

여인이 수배한 가정교사가 도착한 건 그 다음날이었다.

귀족이 갖추어야 할 교양은 너무나도 많았다. 사회, 경제, 제왕학, 더불어 마도나 검술에 이르는 단련까지.

여동생은 놀랍도록 그 모든 지식을 빠르게 익혀 갔다. 가솔들은 가문에 또 하나의 수재가 났다며 놀라워했고, 그 재능을 미리 알아본 여인의 안목을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아가씨께서는 수백 년에 한 번 나올 천재입니다!”

“이미 제가 가르칠 수준이 아닙니다. 제국의 ‘대현자’를 찾아가시지요.”

“대륙 최고의 신성이 우리 가문에 났다!”

여인을 향하던 눈과 입이, 여동생의 몫이 된 것은.

“벌써 대마법사를 앞두고 있다죠? 아직 언니는 대마법사가 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

“몇 년만 지나면 현행 마도 체계를 수십 년은 발전시킬 동량이라더군요.”

“그렇다면 차기 가주는?”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그것이 대수림의 법칙 아닙니까.”

여인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자만과 허명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하나, 둘씩.

여인이 서 있던 자리에 여동생이 불려 가는 빈도가 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인의 몫이었을 찬란한 조명은 오직 여동생만을 비추고 있었다.

관심, 애정, 그리고 시샘과 질투까지도.

그 모든 것이 여동생의 독차지가 되었다. 차기 가주의 자리를 뺏기던 날, 여인은 깨닫고 말았다.

그토록 비웃었던 그늘 아래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으며, 관심을 기울일 가치도 없고, 빛나는 타인을 시샘하기나 하는 찌꺼기.

여인은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못내 밉고 싫은 제 자신이, 그리고 영원히 제 몫이라 생각했던 빛을 잃어 버린 스스로가.

그래서 골방에 틀어박혔다.

재능이 없다면 노력이면 된다.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연구 과제가 완성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주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여동생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지.

쥐새끼처럼 그늘에 숨어 질시의 시선이나 보내는 못난 언니가 아니라, 예전의 그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치던 언니로서!

하지만 단 몇 주만에.

“천재가 난제를 풀었다!”

여인이 수년 동안 몰두했던 연구 주제는 간단히 해결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여동생의 손에.

이것이, 재능.

여인은 절망하다 못해 전율했다. 재능이 부족하면 노력하면 된다고?

헛소리였다. 터무니 없는 재능 앞에서는, 그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는 모든 발버둥이 무의미했다.

그렇게 여인은 인생을 빼앗겼다.

대륙 최고의 기재이자 촉망받는 마도사, 가솔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기 가주.

그 빛나는 호칭들은 이제 여인이 아닌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니까.

태어나면서부터 하늘 위에 있던 존재였던 만큼, 그 낙차 또한 극적이었다. 여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고 점점 더 질투에 미쳐 갔다.

여동생의 활약이 들려올 때마다 책상에 머리를 처박으며 비명을 내질러야 할 정도로.

왜?

왜 너는 내게도 모든 것을 앗아 가는 거야?

그만큼 가져 가면 됐잖아.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모든 영광은 내 것이었어. 그런데 왜 하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네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인은, 붉은 눈을 지닌 손님을 받았다.

“되찾고 싶나?”

목적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여인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가만큼 힘을 준다는 여인의 말에 따라, 온 가솔의 영혼을 바쳤다.

‘질투’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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