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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09)화 (609/649)

Chapter 609 - 7. 질투는 나의 힘(109)

이곳은, 어디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흡혈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납덩이처럼 굳은 근육을 억지로 움직였다.

후각, 미각, 촉각.

오감 중 세 가지가 망가져 있었다. 땅바닥을 기느라 입 안에 풀잎과 흙이 들어갔을 텐데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불어 코끝을 스치는 냄새조차 없었다.

죽음.

필멸자라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은 더는 제 몸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럼에도, 왜.

여인은 자꾸만 땅 위를 기는가. 추하다 싶을 만큼 간절하게, 손을 내뻗고 내뻗으면서.

흐릿한 시야에 빛이 내리쬔다.

벌써 아침이 되었나. 문득 여인은 제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날이 추웠다.

촉각은 망가졌지만, 귓가를 스치는 청량한 바람 소리가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풍요의 계절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랬지. 가을이 오면 여인은 영지로 나가 풍작을 자축하는 영지민들을 치하하곤 했다. 온갖 사람들이 들끓는 만큼 민심을 살피기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으니까.

더불어 외톨이를 자처하던 꼬마의 사회성을 길러 주기에도.

그때, 여인의 등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아이.

그 조그맣던 계집아이가, 어느덧 장성해서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저도 모르게 흐,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잘 컸구나.”

“유언은 그게 끝인가?”

차가운 말투.

공과 사를 확실히 끊어내는 성미였다. 정말이지, 훌륭하게 자라지 않았는가.

여인의 입에서 또 다시 큭큭,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언? 그래, 유언… 남겨야지. 내 사랑스러운 동생, 우리 가문의 차기 가주에게…….”

여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땅을 기었으나, 이동한 거리는 두어 걸음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여인의 하반신 일부는 까마득한 공간의 틈새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붕괴된 결계의 흔적.

허무로 가득한 공간이, 여인의 무덤이 될지도 몰랐다.

초점이 맞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위를 향했다. 그곳에는 세 남녀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대마녀, 이안, 그리고 이름 모를 꼬마 마법사.

헐떡이면서, 여인은 가쁜 숨을 토해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돌이켜 보니…….”

그동안 떠오르지 않던 추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나가기 싫다는 여동생의 손을 질질 끌고 시장에 나가던 기억.

그래, 그랬지.

“어리석게도 후회할 일이 그토록 많았구나.”

그 다음에는, 생일 케이크의 생크림을 볼에 묻히자 토라지던 여동생의 기억.

수백 년 동안 잊고 있던 추억이 뇌리를 파고든다.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장면들이었다.

단지 여인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절망뿐이라고.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그리고 첫 번째로 심장의 고리를 만들자, 여동생을 번쩍 안아 들며 축하했던 기억.

문득 사내가 던졌던 물음이 떠오른다.

‘그래서, 무얼?’

‘이제 무얼 되찾았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애정도 존경도, 사랑도.

‘대륙 최고의 기재’, ‘촉망 받는 마도사’, 혹은 ‘가솔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기 가주’라는 허명도.

더는 되찾을 수 없다. 여인은 대륙을 불태울 뻔한 괴물이었고, 그녀를 우러러 보아야 할 가솔들은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던가.

그랬구나.

애초에 여인의 소망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사랑을 찾아 헤맸으나, 정작 사랑을 져버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여인의 흐릿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흐흐, 하고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네가 이겼다… 메리엔.”

“오래 전부터 그랬어. 당신이 우리 가문을 모조리 암흑교단의 제물로 바쳤을 때부터.”

그 차가운 선언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인은 단지 힘없이 중얼거렸을 따름이었다.

“맞아, 그날부터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그토록 네게서 되찾고 싶었던 모든 것이… 후후, 우습구나.”

“죽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야. 남은 죄는, 지옥에 가서 속죄해.”

“하지만 메리엔.”

최후를 목전에 둔 여인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독히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가을이 다가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개하는 여름꽃처럼.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어. 딱 하나만…….”

그때였다.

“네 것을 빼앗아 갈게.”

빛이 사그라지던 여인의 눈동자에 최후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핏물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솟구쳤다.

그야말로 순식간.

여인의 망막이 마지막 사냥감을 포착했다.

이안 페르쿠스.

이 자는 위험하다.

모든 계획이 이 자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델피렘은, 암흑교단은 이 자 때문에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죽인다.

암흑교단이 열어 갈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피의 송곳이 넋을 놓은 사내의 목젖을 꿰뚫기 직전.

콰득, 하고.

여인은 일순 흐려지는 눈앞에 옅은 의문을 품고 말았다. 무서운 기세로 솟구치던 피의 송곳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짜낸 집중력이 흩어지는 동시에 멈춰 버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등 뒤를 향한다.

그곳에는, 솟구치는 핏물이 비치고 있었다. 아니.

여인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새하얀 치아가, 살의와 광증으로 들끓는 황금빛 눈동자가.

흡혈귀는 끝내 이를 으득, 하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탐, 욕……!”

“우리 오빠는 건들지 말랬잖아……?”

너덜너덜한 팔다리 대신 치아로 동료의 목숨줄을 끊으면서, 소녀는 속삭였다.

“……개년아.”

그것이 끝.

여인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소녀와 함께 그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결계의 잔흔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칠죄성 중 하나의 최후였다.

**

“흐으, 으극, 으끄으으으윽……!”

악물어진 잇새로 거친 숨이 새어 나온다.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공터, 새벽이 찾아왔으나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할 태양의 은혜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 한가운데 소녀가 엎어져 있었다.

한 줄로 묶어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황갈빛 눈동자.

본래 아리따웠을 그 외모는 흙투성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핏발이 잔뜩 선 흰자위일까.

또 얼마나 이를 강하게 악물었는지 턱이 덜덜 떨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포기를 모르고 몸부림을 쳤다. 팔다리가 모두 결박되어 있어 무용한 시도에 불과할 텐데도.

그 앞에는, 나른한 표정의 여인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괴롭니?”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나긋한 듯하면서도, 심지를 순식간에 파고드는 매혹적인 음색.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도대체 이 자는 ‘무엇’일까.

이름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엎어진 소녀, 셀린은 눈앞에 앉은 여인의 정체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라는 감상밖에 없었다. 굳이 덧붙이자면, 이 여자는 위험하다는 직감 정도?

그런데 보면 볼수록 묘했다.

마치 허깨비를 앞에 둔 듯한 기분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다.

조건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인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이, 일종의 방아쇠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

물론 셀린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망막과 고막을 파고드는 낯선 장면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셀린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환상들이었다.

사랑하는 소꿉친구가 성국의 성녀를 품에 안는다.

대륙에서 이름 난 꽃이자, 천신의 총애를 받는 처녀.

소꿉친구는 그 여인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단 한 번도, 셀린에게는 해준 적이 없는 말이었는데.

“흐으, 흐으, 흐으…….”

하지만 어찌 질투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는 무려 성국의 성녀였다. 몰락한 하급 귀족의 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외모도, 실력도, 신분도.

무엇 하나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것은 태생적인 한계였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그 외에도 수많은 장면들이 망막을 스치고 지나간다.

사랑하는 소꿉친구가 셀린 몰래 평민 계집과 입을 맞춘다.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여자와 약혼을 맺고, 남몰래 육체관계를 맺는 정부까지도 두고 있다는 사실들.

‘질투’가 인다. 그래, 그래야 할 때마다.

전투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던 셀린의 모습이 뇌리를 가득 채운다.

‘전위 주제에 가장 먼저 뚫려.’

무능하다.

‘의욕만 앞설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무능하다.

‘심지어 잘못된 계약을 맺어 나를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했지.”

무능하다 못해, 추레하다.

이제 셀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환각과 환청을 수도 없이 넘나드는 사이, 셀린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별할 능력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다만 두 손이 묶인 와중에도 팔을 두 귀에 딱 붙여 환청을 막아보려 할 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셀린의 팔은, 눈앞의 여인이 속삭이는 소리마저 틀어막지 못했으니까.

“어째서 괴롭지?”

평소와 달리, 다소 뻔한 물음이었다.

최소한 셀린이 울컥해서 멋대로 입을 놀릴 만큼은.

“당, 신들이… 멋대로… 환상을 보여 주니까……!”

“환상이 아닐 수도 있는데.”

“웃기, 지 마……!”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셀린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필사적인 목소리를 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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