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2 - 7.5 계절은 가을(1)
고요를 옷자락 삼은 아침이 아카데미를 찾아왔다.
그동안 오랜 전투로 시름하고 있던 곳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저주에 걸리거나, 피신을 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지만 아카데미는 어떻게든 일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영원할 듯하던 여름의 끝이었다.
지긋지긋한 폭염에서 벗어난 대지는 한껏 신선한 향내를 풍겼다. 수확을 앞둔 시기에만 맡을 수 있는 이 냄새는, 먼 옛날부터 유전자에 각인된 기쁨을 일깨우곤 했다.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의 낯빛에는 간만에 그늘이 엿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정체 모를 위협에 떨고 있던 시간을 보상 받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지만 어찌 흉터가 남지 않았겠는가.
아카데미가 되찾은 활기 속에는 남모를 슬픔이 어려 있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사건에 깊이 개입한 인물일수록 깊은 상흔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나라든지.
내 몸뚱어리는 성한 곳 하나 없을 만큼 상처투성이였다. 그동안 치료 마법을 남용한 탓에, 제국 황실이 지닌 치료제로도 내 육체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했다.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고 나서도 거동이 불편할 지경이었으니.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알싸한 통증이 관절을 덮쳤다. 본래라면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진통제나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신세였으나,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나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이들도 많았으니까.
나는 그중 한 명을 찾아온 참이었다.
똑똑.
“세리아?”
새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가 홀로 사는 여자 후배를 찾아오다니.
다소의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으나, 이곳에 나를 두고 수군거릴 존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위로해 준다면 모를까.
나는 모두를 대신해 의무를 다하러 온 상황이었다.
상처 받은 동료를 일상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책임.
고맙게도 세리아는 나를 존경하고 의지해 주던 사랑스러운 후배였다. 당연히 내가 나서면 얼굴이라도 보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 수밖에 없었지만, 오산이었다.
세리아의 상처가 깊어도 너무 깊었다.
두문불출하며 일체의 방문을 사절하고 있는 소녀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힌 듯했다. 그 증거가 바로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과, 그 앞에 붙은 글씨.
‘죄송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죄송하다는 걸까.
세리아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제 어머니의 핏줄을 이겨내지 못한 탓일 뿐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존재라도 탄생부터 죄악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스스로를 죄책감의 무덤에 파묻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지우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로 문을 재차 두드렸다.
똑똑.
“세리아? 괜찮아? 요즘 식사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좀…….”
“죄송해요.”
고작해야 한 마디였다.
피로와 자책에 젖은 그 힘없는 음색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후배의 목소리였다.
망망대해에서 섬을 발견한 선원처럼 내 가슴이 멋대로 언어를 토해냈다.
“세리아, 괜찮아? 그러지 말고 좀 나와 봐… 사정은 들었어. 하지만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우리 중에 너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그것이 끝.
이후에 아무리 말을 걸어도 세리아로부터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내심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답답한 마음에 문이 부서져라 손을 내리쳤다.
쾅쾅쾅!
그래도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내 머리가 끝내 툭, 하고 방문을 두드렸다. 목재의 냄새가 났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망할.”
셀린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세리아는 스스로를 감금했다.
쌀쌀해진 온도가 부쩍 시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계절은, 이제 가을.
모든 생명이 시련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
호사(好事)와 마(魔)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라 했던가.
비록 두 후배의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으나, 비극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그 둘이 예외적이라고 봐야겠지.
희소식은 넘치도록 많았다.
우선 첫 번째로, 대마녀.
“네가 ‘첫째’다.”
심드렁한 선언이었다.
느닷없는 호출에 불려 나온 나조차도 얼이 빠질 정도였다. 이곳은 아카데미의 본관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
대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모인 각국의 주요 인물이 자리한 장소였다. 수십에 달하는 권력자 앞에서 한 소리였으니, 최소한 농담은 아니리라.
나를 비롯한 좌중의 동공 위로 하나의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소리지?
그 해답을 찾아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둘째는 그 싸가지 없던 라이넬라의 꼬맹이, 마지막 하나는…….”
첫째, 둘째, 막내.
통상적으로 대마녀나 되는 인물이 그러한 호칭을 쓸 관계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가족이 남아 있다면 모르겠으나, 대마녀는 얼마 전 마지막 핏줄을 제 손으로 죽인 참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
바로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를 지칭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제지간(師弟之間).
당대의 마스터 중 하나가 비전을 전수할 상대를 친히 고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왈가왈부할 만큼 간이 큰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그중 한 명이 자리하던 중이었다.
“……잠깐!”
우렁찬 정회 요청이었다.
회색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인상 깊은 미중년이었다. 탈색된 체모는 사내의 나이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몸뚱어리는 청년과 비교해야 할 만큼 강건하기만 했다.
제국의 검공(劍公).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칼잡이이자, 제국 황실의 웃어른이 황제를 대신해 이곳에 참석한 것이다.
살짝 적대적이기까지 한 그 어투에 일순 대기가 얼어붙었다.
“할망구, 미쳤소?”
이를 으득으득 갈며 내뱉은 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국의 군대를 모조리 도륙할 수 있는 존재의 분노였다. 일대의 마력이 절로 그 의지에 응답하여 예기를 품기 시작할 무렵.
꿀꺽, 하고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하다.
예전이라면 몰라, 흡혈귀가 토벌 당한 이후 대마녀는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 비록 그 겉모습은 이전과 동일하게 어린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만일 두 마스터가 이곳에서 격돌한다면?
건물 한두 개는 우습게 무너져 내릴 터였다. 당연히 이곳에 모인 인물들의 목숨도 위태로워지겠지.
그러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공은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진작 말했을 텐데, 저 꼬맹이는 차후 내 뒤를 이어 제국의 수호자가……!”
바로 그때였다.
대마녀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이어진 것은.
“마지막 하나는, 황가의 꼬맹이로 하지… 그러니까, 이름이 ‘시엔’이었나?”
“……될 예정이지만, 이 기회에 인연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하하하!”
그야말로 순식간.
이어진 대마녀의 지명에, 검공의 분노는 봄볕 앞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 버렸다 과연 조카 손녀를 사랑하는 ‘바보’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좌중이 황당해 하는 사이, 검공은 내 등까지 팡팡 두드리며 격려를 아끼지 않기까지 했다.
“자, 자!. 비록 나보다는 못하지만, 어르신의 비전 또한 쓸모가 많으니 잘 배워두도록 해라. 혹시 아느냐? 나중에 두 마스터의 비전을 응용한 걸작이 나올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만 이처럼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대마녀가 이내 코웃음을 치며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따로 쓴다면 몰라, 두 비전을 하나로 합쳐? 그런 건 불가능해…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 테지. 만일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뇌가 터져 버리겠지만.”
별다른 악의 없이 꺼낸 말이었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이러한 면이 있었다. 스스로의 세계가 너무 확고하다 보니, 눈치 없이 제 의견을 밝히고 보는 것이다. 상대라고 해서 사회적 위신이 없지도 않을 텐데.
특히 검공은 제국의 마스터이자 황실의 큰어른이 아닌가.
얌전히 수긍만 할 리는 없었다.
검공은 섭섭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코웃음을 쳤다.
“……흥, 또 모르는 일 아니요.”
철 없는 두 어른의 자존심 싸움.
이대로 끝났다면 그렇게 명명될 법한 소소한 사건이었으나, 하필 검공의 맞상대가 대마녀라는 점이 문제였다.
마법사란 무엇인가?
앞서 설명했듯이,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으며 자존심 빼면 시체인 고집불통들이었다. 대마녀라고 해서 그 예외에 속할 리는 없었다.
결국 여인은 숨겨진 진실을 읊기에 이르렀다.
“쯧쯧, 억지 부리기는. 설마 며칠 계집아이가 돼 버렸고, 마음까지 그리 돼 버린 건… 꺄아악?! 이, 이게 미쳤나?!”
결과는 언제나와 같았다.
검공이 칼을 뽑아들었고, 비사(秘史)는 제국의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실로 평화로운 일상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