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14)화 (614/649)

Chapter 614 - 7.5 계절은 가을(3)

아카데미는 ‘인류의 대장간’이라 불린다.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우수한 인적 자원으로 성장시킨다. 이들은 각국의 유력 인사가 되어 문명을 발전시키고, 인류의 미래가 될 동량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다만 진짜배기 원석을 가려내는 과정이 다소 잔혹할 뿐.

매년 성적을 평가해서, 일정 등수 이하의 학생들은 ‘유급’ 처리를 받아 낙향한다. 그러다 보니 아카데미의 고학년은 저학년에 비해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대신 그만큼 집중적인 지원을 받게 되지만.

내가 자리를 옮긴 장소도 고학년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중 하나였다. 마법학부나 연금학부의 고학년들은 각 학부의 건물 내부에 ‘공방’을 배정받게 되는데, 성적에 따라 그 시설이나 면적 또한 달라지곤 했다.

이곳은 엘시 선배의 공방.

비록 그 행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성적 자체는 늘 수위권을 다투던 엘시 선배였다. 더불어 가문의 재력 또한 충분하니 공방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접객을 위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는, 말이다.

나는 향긋한 다향(茶香)을 맡으며 말없이 찻물을 홀짝였다. 내 맞은편에는 고깔 모자를 쓴 귀여운 소녀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한껏 경계심을 불태우는 소년이 보였다.

이제 와서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를 필요도 없으리라.

공방의 주인이자 내 약혼자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또 다른 미래에서 온 내가 필요하다는 소리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정신을 잃어야 하고.”

“미래에서 흡혈귀의 희생자들을 구제할 방법을 연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엘시 선배의 정리에 의견을 덧붙이면서,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비록 그 해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지만, 최소한 몇 년에 걸친 연구 결과가 머릿속에 남아 있을 거예요. 스승님과 연구를 계속한다면…….”

“왜?”

단 한 마디.

짧지만 근원적인 반문이 던져졌다. 엘시 선배는 맞은편에서 차를 홀짝이면서, 뜻 모를 시선을 내게 던졌다.

“왜 그렇게 그 ‘희생자’들을 신경 쓰는데?”

“그야, 무고한 민간인들이고…….”

“그렇다고 헐레벌떡 달려와서 나를 찾아? 온몸에 붕대까지 둘둘 두르고서?”

엘시 선배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진다.

노골적으로 내 심중을 캐려는 기색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었을 텐데.

이것이 세월의 힘인가.

하지만 나 또한 걸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기에, 내 시선이 슬그머니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루핀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를 닮은 몰골이었다.

누나는 강아지, 남동생은 고양이라.

내가 쓸데없는 감상을 품은 사이 루핀의 분노가 이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깟, 쓸모없는 인간들 때문에 우리 누나를 때리겠다고?!”

“수십이나 되는 생명이야. 구할 수 있다면 구해야지.”

“웃기지 마! 어차피 또 여자잖아!”

그야말로 정곡.

무어라 반론을 펼치려던 내 입이 꾹 다물어졌다. 당연히 루핀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의분에 찬 소년의 손바닥이 책상을 내리쳤다.

탁탁.

여전히 힘이 강하지 못해서, ‘쾅쾅’이 아니라는 점이 다소 유감이었지만.

아무튼 루핀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야, 임마! 너 우리 누나랑 약혼한다며! 그럼 서로 알콩달콩 살다가, 어? 그러다 선 좀 넘어서 딸 둘에 아들 둘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이 개자식아!”

“우선 축복해 줘서 고맙고…….”

“축복 아니거든?! 이건 내 장대한 계획의 일부… 아니, 그보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왜 또 여자랑 엮어서 우리 누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냐고오!”

루핀은 이제 눈까지 까뒤집으며 내게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정작 그 주장 자체는 지극히 합리적인 지적이라,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내가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가 따로 있기는 했다.

루페시아 영애.

예전에 엠마를 괴롭힌 사건을 기점으로 인연이 닿은 여인이었다. 당연히 나와 깊은 교분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엠마였다.

루페시아 영애는 엠마의 친한 친구 중 하나다.

본래 평민을 무시하던 고위 귀족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엠마와는 곧잘 어울려 다닌다고 들었다. 마음씨 고운 엠마는 친우에게 닥친 환란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겠지.

내가 이토록 다급히 엘시 선배를 찾아온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나와! 남자답게 일대일로 결투하자!”

“아니, 그러다 너 죽을 텐데…….”

“이게 무섭다고 딴 소리를!”

슬슬 루핀은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예전에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지금 나와 겨룬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이리라.

그렇게 내가 난감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하지, 뭐.”

엘시 선배가 차를 홀짝이며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와 함께 한창 그릇된 투지를 불태우던 루핀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두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엘시 선배는 태연히 제 추론을 덧붙여 나갔다.

“어차피 구하기는 해야 하잖아. 또, ‘여자’라고 한다면… 내가 모르는 사람은 아닐 테고. 듣기로 평민 계집이랑 다니는 영애가 하나 있다지?”

‘평민 계집’이라.

그 노골적인 어휘가 지목할 만한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실제로 정답이기도 했고.

나는 침묵 속에서 찻잔을 기울였다. 미안한 마음에 시선이 살짝 아래를 향한다.

“흐음, 뭐… 좋아. 첩을 용인하는 것도 아내의 역할이지.”

“아니, 누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사랑은 전쟁이라니까? 세상에 어느 남편이 첩을 살리겠다고 본처를 박대… 끄아아아악!”

화를 차마 가라앉히지 못한 루핀의 항변이 이어졌으나, 이는 엘시 선배의 전격 마법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철푸덕 엎어진 루핀의 근육이 파르르 경련한다. 아마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는 못하겠지.

나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처남이 될 사내를 일별했다.

다음 생에는 좀 더 강하게 태어나라.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우쭐한 낯빛으로 말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그 평민 계집에게는 빚이 있거든. 일종의 ‘동맹 관계’라고나 할까…….”

“동맹이라니요?”

“흐흥, 첩실이 본처에게 줄을 대는 건 당연한 이치지.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그 정도는 용인해 줄 수 있어.”

아무래도 엘시 선배는 나와의 약혼을 확약 받은 이후 마음의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최소한 나와의 관계에 있어 가장 앞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실은 아내도 하나 있고, 엠마와는 입을 맞춘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실로 궁금하긴 했으나, 지금 아쉬운 쪽은 나였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얌전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이제 ‘약혼자’니까. 그래, ‘약혼’… 흐헤.”

아무튼 엘시 선배만 행복하면 됐다 싶기도 했고.

그렇게 나는 헤실거리는 엘시 선배와 적당한 합의를 거쳐,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를 호출해 보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엘시 선배가 오들오들 떨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엘시 선배를 혼절시켰다.

결과적으로 말해, 계획은 성공이었다. 다소 걱정했으나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는 의외로 순순히 나타나 주었다. 아직 흡혈귀의 결계가 흐트린 ‘경계’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정작 골칫거리는 따로 있었다.

“……못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엘시 선배’의 첫 마디였다.

나는 울컥해서 설득을 시도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소녀의 손바닥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하라는 신호.

내가 머뭇거리자, 엘시 선배는 막힘없이 이유를 풀어냈다.

“야, 아무리 흡혈귀가 사라졌다지만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시키는 작업이 쉬운 줄 알아? 아무리 그 할망구가 있어도 몇 주 동안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판이라고. 내게 그만한 시간이 남아 있기는 해?”

“하지만, 민간인들이…….”

“흡혈귀를 쓰러트렸는데 고작 수십만 죽고 다친 것도 천운이야. 우리 냉정히 생각하자고.”

그러면서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엘시 선배의 결심은 굳건해 보였다. 어지간한 설득을 통하지도 않으리라.

그렇다면 내가 꺼낼 교섭 재료는 하나뿐이었다.

“……당신 사형.”

움찔.

내가 던진 미끼에, 물고기로부터 곧바로 반응이 왔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해도 간절해지는 마음을 감출 길은 없었다.

이윽고 재차 가해지는 추가타.

“얼굴 한 번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협력만 해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야, 이… 나쁜 새끼야!”

이어지는 설득에 소녀가 돌려 준 답변은 색달랐다.

욕설과 함께, 하늘을 나는 찻잔.

나는 슬쩍 고개를 틀어 날아드는 잔을 피해냈다. 팍, 하고 땅 위에 엎질러진 찻물이 비참한 단말마를 내지른다.

“너, 자꾸 소녀의 여자의 순정을 가지고 놀래?! 지난번에도 만나게 해준다며!”

“실제로 만나셨잖습니까.”

“그, 그건! 그래, 그건……!”

그리고 침묵.

아픈 기억을 떠올린 엘시 선배가 눈에 띄도록 의기소침해졌다. 풀 죽은 여인의 어깨가 자연스레 내려앉고 있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다, 입술을 달싹이다, 그러기를 얼마쯤.

끝내 허세 부리기를 포기한 소녀의 입에서, 숨겨 두었던 진심이 새어 나왔다.

“……또 무시 당하면 어떡하지.”

그것이 여인이 품고 있던 진정한 두려움이었으리라.

첫사랑을 했고, 첫사랑을 위해 죽었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뒤에도 첫사랑을 찾아 헤매는.

어느 소녀의 지독한 순애보가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확신했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때 했던 말이 전부 진심은 아닐 거예요.”

소녀는 나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어, 어떻게 확신해……?”

그리고, 나 또한 소녀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 인간도 일단은 ‘저’니까요.”

그것이 이 이야기의 옳은 결말이었다.

무더위가 저물고 수확의 때가 온다.

가을은, 고생을 보답받는 계절이었다.

*

협상은 잘 마무리되었다.

미래에서 온 ‘엘시 선배’는 한동안 대마녀의 곁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기로 했다. 과연 ‘엘시 선배’가 언제까지 이 시간대에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선을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신께 기도하는 일뿐.

그렇게 내가 다소 홀가분한 기분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성 루시아께서 찾으십니다.”

느닷없이 찾아 온 사제의 전언을 듣고, 나는 황망한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한동안 성국에서 지내야 한다고…….”

“무슨 연유이신지 급히 아카데미 행을 결정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사제의 동공이 은근슬쩍 내 전신을 훑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내 몰골은, 누가 보아도 병자의 행색이었다.

미심쩍은 시선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너 때문 아니냐.’

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이 느껴졌다.

“아무튼, 많이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주제 넘는 조언일지 모르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어서 가서 마음을 달래 주는 편이 낫더군요.”

“하지만 제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가…….”

“성 루시아께서는 먼저 형제님의 방으로 향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충격적인 소식에, 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탓이었다.

“그, 그래도 됩니까? 성인으로서 순결을 지켜야 한다든가……!”

하지만 사제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함의를 눈치 챈, 나는 그만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알고 있구나.

어색한 공기에 절로 헛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 전언은 이제 끝입니다. 다만… 성 루시아께 전해 주시기를.”

사제는 떠나가면서, 나와 성녀의 관계를 눈치 챈 계기를 굳이 말해 주었다.

“부디, 오늘 밤은 ‘성흔’을 너무 남기지는 말아 달라고.”

‘키스 마크’.

단박에 사정을 짐작한 내 손바닥이 낯가죽을 덮었다. 그렇게 사제와 헤어진 뒤, 어느덧 걷고 걸어 내 발길은 방문 앞까지.

머뭇거리며 내 손이 문 손잡이를 향했다. 도대체,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손잡이를 잡아당기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벌컥 열려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16794227052099.jpg

내 아내가, 짐짓 화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안.”

숨 막힐 듯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여름과 함께 저물고, 시간은 이제 저녁.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애써 내뱉는 수밖에.

“……안녕, 여보.”

바가지를 긁힐 차례였다.

그 외에도, 뭐.

많은 일이 있겠지만.

가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