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5 - 7.5 계절은 가을(4)
뜨고 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해도, 달도, 삶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지나가면 태양의 시간은 차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계절은 이제 가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창 노을이 지고 있었을 테지만, 햇볕은 낙엽과 함께 저문 지 오래였다. 어둑해진 실내를 비추는 조명은 등불과 하품(下品)의 마력등뿐.
돌이켜 보니 초라한 세간살이였다.
그동안 하급 귀족으로 살아왔던 나였다. 당연히 사치를 부리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에야 금화는 넘치도록 많았으나, 늘 병실 신세를 지는 마당에 정작 내 방을 꾸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참이었다.
혹은 의욕이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사실 그렇지 않은가.
느닷없이 생활 수준이 높아져 봐야, 익숙해진 환경을 갑작스레 바꾸기는 애매했다. 심지어 나처럼 늘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수련에 더 투자하고 말지.
나로서는 지당한 판단이었다. 여태껏 나는 그 사실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었으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다소 후회가 들기도 했다.
설마 성녀가 내 방에 방문할 줄이야.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고 싶은 사내는 없었다. 이처럼 생활감이 적나라하게 묻어 나오는 공간을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낡은 찬장을 가득 채운 싸구려 위스키와, 곳곳에 널려 있는 빈 병들.
그동안 고뇌로 밤을 지새운 흔적이었다. 셀린과 세리아가 망가진 이후, 매일 밤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을 술로 잊어 버리려던 발악의 궤적이라고 할까.
성녀가 들고 온 포도주에 비하면 실로 초라한 풍경이었다.
정작 내 아내는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지만.
“꼴 좋네요.”
턱을 괴면서, 툭 하고 내던진 한 마디.
얼핏 보기에도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 시선을 살짝 돌리는 꼴이,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못내 걱정의 기색을 지우지 못한다는 점이 사랑스러웠지만 말이다.
나는 말없이 잔에 담긴 액체를 홀짝였다. 좋은 품질의 포도를 썼는지, 과연 포도 특유의 달큰한 향이 일품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하나.
포도주라면 마땅히 뒤따라야 할 씁쓸한 향이 올라오지 않았을 뿐.
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포도 주스?”
성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제 잔에 쪼르륵 포도주를 채웠다. 내 잔에 담긴 음료와는 달리, 제대로 된 알콜의 향이 풍기는 술이었다.
여인은 빈정대듯 내게 말했다.
“환자가 무슨 술이에요? 몸부터 챙길 생각을 해야지.”
“아니, 어차피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텐데…….”
“치료 잘 받아서 그 꼴이에요?”
할 말이 궁해진 나는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내 몰골이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온몸을 두르고 있는 새하얀 붕대만 보일 테니까.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토해내는 관절과 인대,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려 들면 핏물이 배어 나오는 상처까지.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는데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말하자면 깨진 도자기를 반창고로 이어붙인 수준이라고 할까.
까닭이야 뻔했다.
내 몸뚱어리가 한계에 달했다는 뜻이겠지.
이를 온전히 고칠 수 있는 인물은, 온 대륙을 통틀어도 단 둘밖에 없으리라.
성국의 성자와 성녀.
내 아내가 그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적이었다.
결국 내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맺히고 말았다.
“당신이 고쳐 주면 되잖아.”
“흥, 누가 고쳐 준다고.”
그러면서 베에, 하고 살짝 혀끝을 내미는 아내.
가슴이 파인 네글리제와 흐릿한 조명, 달콤한 주향이 이성을 뒤흔든다. 평소에도 고혹적이었지만, 오늘따라 내 아내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대로 덮칠까?
그럼 얌전히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은데.
술에 취한 성녀는 더욱 대담해졌고, 또 유치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인내심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나는 우선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그러려고 왔으면서…….”
“누가 그래요?”
새침 떨기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자꾸 내 상처 부위를 살피는 기색이 뻔히 보였다. 성국에서 잘 지내고 있던 성녀가 아카데미로 급히 돌아올 사유는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둔해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다만 성녀도 핑계거리가 전무하지는 않은 듯했다.
“아카데미는 업무 차 방문했을 뿐이에요. 얼마 후에 중요한 물건이 오기로 했거든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할 ‘중요한 물건’이라.
문득 떠오른 생각이 곧장 언어가 되어 성대를 치고 올라왔다.
“……하스터 가문의 금광?”
“알고 있었나 보군요.”
성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층 진중해진 낯빛에, 나는 그녀가 무거운 주제를 꺼내리라 짐작했다.
“이안, 이건 중대한 문제예요. 지금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많지 않았죠.”
“성녀님도 말입니까?”
“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나마 교황과 몇몇 추기경은 언질을 받긴 했다더군요. 제가 자세한 사정을 들은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하기야 그랬겠지.
만일 알고 있었다면, 진작 성녀가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을 터였다.
‘성녀’라는 지위는 얼굴마담에 가깝다. 비록 성녀가 상징성을 이용해 성국 정계의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하기는 했다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의 정점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기밀에 접근할 권한을 얻었으리라.
나는 씁쓸한 마음에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또 다시 혀끝을 달달한 액체가 스친다.
왜 술이 아닌 거야.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셀린이 실종됐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씹어뱉듯 토해낸 목소리에, 성녀의 낯빛에 연민이 차올랐다. 슬쩍 술잔에 비친 내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프다.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아요. 이토록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는데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다니… 심지어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 마냥 하스터 가문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죠.”
“우연일 수도 있어요, 이안. 이끄는 자는 언제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해요.”
“과연 우연일까요?”
구겨진 음색의 틈새로 옅은 신음이 차오른다.
나는 괴로운 낯빛으로 토로를 이어갔다.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조금 더 주변을 둘러봤어야 했는데, 눈치 채고 보니 세리아도 셀린도 너무 힘들어 하고 있더군요.”
“이안.”
“제 탓입니다.”
느닷없는 고해성사였다.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오랜만에 그리웠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
나는 법정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읊조렸다.
“제가, 좀 더 잘했다면…….”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
“최고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그래야만 합니다.”
순식간에 오고 가는 문답.
그 끝에서, 성녀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따스한 손길이 내 두 손을 맞잡는다.
이윽고 나를 향하는 여인의 애처로운 눈빛.
성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가야 했으니까.
내 음색이 부쩍 피로해졌다.
“남들과 다르잖아요. 저는, 미래를 알고 있다고요…….”
어느덧 내 손은 옅은 떨림을 반복하고 있었다. 성녀가 내 손을 어루만지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떨고 있었으리라.
셀린을 잃어 버렸다.
이는 남 모를 공포가 되어 내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스터 부인께는 무어라 말씀드리지?
셀린을 딸 같이 여기던 아인스턴 부부께는? 우리 어머니는?
그리고 내 소중한 벗 레토한테는.
마치 쇠사슬이 심장을 칭칭 감아 조이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아프고 괴로워서, 더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셀린이 없다.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라, 나는 어린아이처럼 무력한 기분에 빠져들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했던,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이었다.
“이안, 모든 것을 당신 혼자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많은 사람을 구해냈어요, 자, 날 봐요.”
그제야 나는 시선을 성녀에게로 돌렸다. 그곳에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가 보이나요?”
“……내 아내.”
픽,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
성녀는 못내 그 호칭이 기분 좋았던지, 옅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원래는, 이름도 없던 고아였죠. ‘성녀’라는 이름표 하나를 달고 기고만장해서, 스스로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계집애…….”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그러던 어느 날, 멋진 기사님이 날 구해줬어요.”
이윽고 내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저 말없이 연분홍빛 동공을 응시했다.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나오는 색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이더군요. 말도 안 되는 이상론을 늘어놓질 않나, 세상을 구하겠다고 헛소리를 하지 않나. 심지어 여자관계도 복잡해서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는데.”
“아니, 그건…….”
난데없는 비난에 내가 슬쩍 울상을 지었을 무렵이었다.
톡, 하고 내 손을 감싸고 있던 여인의 검지가 입술에 맞닿는다. 이는 하나의 신호였다.
여인의 다리가 서서히 펴지고, 숨결이 섞일 거리까지 낯이 다가와, 입술이 마주치고.
따스하고 촉촉한 혀가 파고든다. 뒤섞이고, 서로를 탐하며 농밀한 관능을 즐기는 살덩이.
키스는 포도주보다도 달콤한 맛이 났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천천히 멀어지는 여인의 혀끝에서 은빛의 실이 늘어졌다. 하아, 하아, 하고 노골적으로 달구어진 숨결이 낯을 데운다.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나를 ‘나’로 만들어 준 사람이니까, 내가 ‘나’로서 처음 품은 감정이 당신을 향한 사랑이니까.”
그러면서 여인은 요염한 자세로 내 위에 올라탔다.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진다. 비비적대는 살결이 흥분을 부채질했다. 맞붙은 사타구니에서 습한 열기가 와 닿고 있었다.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면서, 여인은 속삭이듯 내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정녕 당신 탓인가요, 이안? 나를 이렇게 만든 걸 후회하나요?”
그럴 리가.
나는 옅은 숨결을 토해내며, 말없이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친다. 이미 일선을 넘은 사이에 거리낄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입술이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찰나.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서, 성녀를 멈춰 세웠다.
의아한 낯빛을 한 여인을 앞둔 내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서, 치료는 언제 해줄 생각입니까?”
그러자 성녀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황당하다는 낯빛을 했다가, 이내 입술을 삐쭉이며 새침한 얼굴로.
눈치 없는 사내를 향한 응징이 이어졌다.
팍, 하고 내 가슴팍을 두드리는 손바닥.
그것이 치명타였다.
나는 울컥, 하고 올라오는 핏물을 토해냈고, 벌어진 상처로 붕대에는 핏물이 배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부리고 있던 허세가 들통나는 순간이었다.
사실 내 몸뚱어리는 치료가 시급한 상태였다.
그것도 많이.
설마 내 부상이 이토록 심각할 줄 몰랐던 성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이, 이안? 괘, 괜찮아요? 꺄아아악! 어, 어떡해!”
그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울상을 짓기 시작하는 성녀.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읊조렸다.
“어서 치료나 해주세요…….”
결국 그날 밤은 종일 치료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아카데미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각한 손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