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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16)화 (616/649)

Chapter 616 - 7.5 계절은 가을(5)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고귀한 용의 피를 이은 그녀는 야심만만한 모략꾼이었다. 마음을 읽는 눈을 타고나, 타인의 욕망을 조종하고 막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지략가.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났던 소녀였다.

실패 따위는 경험한 적이 없었고, 갖고 싶은 것을 놓쳐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오만한 성정을 갖출 수밖에.

물론 시엔은 이를 추호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만?

그것은 못난 자의 부덕에 불과했다. 남들과 달리 시엔은 특별한 존재였으며, 따라서 세상을 내려다 볼 자격 또한 충분했다.

용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언제나 주도면밀하게 판을 짜고, 이를 바탕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할 따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았던 제왕의 덕목 아니었던가.

용의 피를 각성한 시엔은 거침이 없었다.

그동안 죄책감에 빠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내를 쟁취할 뿐.

시엔은 이를 위한 원대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똑똑.

“유, 유르디나 선배?”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진정되지 않았다.

소녀는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문 뒤에서 대답이 돌아오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고막을 스치는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말소리는커녕 인기척조차 희미할 지경이었다. 시엔은 그 사실에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어, 어떡하지?’

지난 전투는 시엔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전력이 열세라도 승산이 전무하지는 않다는 점, 평생 숨을 죽이고 살아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 때로는 살을 내주어야 뼈를 취할 수 있다는 점 등등.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좋은 유산만을 남기지 않았다. 시엔은 재산과 함께 빚 또한 물려받았고, 이제 그 채무를 청산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리아의 어머니.

너무 흥분한 탓에, 시엔은 그만 소중한 동료의 어머니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더라도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여지가 충분한 행위였다.

심지어 상대는 사랑하는 사내가 각별히 아끼는 후배 중 하나.

도의적으로도, 미래를 위해서라도 갈등을 해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엔은 비굴하다시피 우는 낯을 한 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끝없이 사죄를 반복하면서.

“저, 사죄를 드리러 왔어요… 무, 물론 이런다고 해서 화가 풀리지는 않으시겠지만!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지만! 선배의 어머니를 죽인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쾅!

허나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그러한 소음뿐.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혹은, 목소리도 듣기 싫으니 썩 꺼지라는 뜻일까?

시엔이 자랑하던 ‘용의 눈’조차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리아는 보이지 않는 문 뒤에 있었으니까.

결국 시엔은 눈꼬리에 이슬을 머금은 채 헛된 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용의 눈’이 없으면, 자신의 눈치가 지독히도 없다는 사실을.

남은 수는 하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언을 구하는 것.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던가. 시엔은 그 길로 제 심복을 찾아갔다.

“아이린 경!”

쾅, 하고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 온 상관을 앞둔 여기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놀란 쪽은 비단 아이린만이 아니었다. 시엔 또한 아이린의 차림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수밖에 없었다.

앞치마.

평생 검만 들고 살아 온 여인치고는, 너무나 가정적인 복장이었다.

시엔은 얼떨떨한 낯빛으로 묻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 경, 뭐해요?”

“아, 저, 그…….”

근래 들어 부쩍 자신감이 떨어진 여기사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검 대신 식칼이 들려 있던 참이었다.

시엔의 의문이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아이린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백했다.

“시, 신부 수업이나 받아볼까 해서…….”

“……?”

시엔의 고개가 절로 갸웃 기울었다.

신부 수업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과 결혼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지 않았었나?

그러나 시엔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린의 장래 계획보다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있었던 탓이었다.

“저, 아이린 경… 물어볼 게 있는데요… 무, 물론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렇게 시엔은 친구의 이야기를 빙자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소중한 친구한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는데, 그 이후로 친구가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떻게든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러한 사연을 전해 들은 아이린은, 이내 침음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럴 때는, 공감이 중요하겠네요.”

“……공감?”

기대 이상으로 그럴듯한 해결 방안이었다. 시엔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나기 시작하자, 아이린은 조심스레 조언을 이어갔다.

“네, 공감. 대부분의 문제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되거든요. 그러니 자신과 상대방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친구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는 점만 밝혀도 마음이 많이 누그러질 거예요.”

“과연!”

아이린의 논리에 설득당한 시엔은 다시 한 번 발걸음을 옮겼다.

공통점을 바탕으로,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엔은 망설임 없이 그 조언을 실천에 옮겨 보기로 했다.

엣흠, 엣흠.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가다듬은 소녀의 입에서 위로의 말이 흘러 나왔다.

“유르디나 선배, 사실 선배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어요. 저도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었거든요… 다시 말해, 우리 둘 다 모친 없는 신세라고 할까요? 어때요, 선배. 모친 없는 사람끼리 서로 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콰앙!

그러자 이전보다 더욱 짜증스러운 소리가 되돌아왔고, 시엔은 또 다시 울상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 경, 무능해!

제 심복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면서.

*

시엔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야만 했다.

무려, ‘이안의 실제 옷가지로 만들어진 특제 한정판 인형’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이안이 입었던 옷은 귀했다. 아무리 시엔이라 하더라도 열과 성을 다해 만든 작품을 남에게 넘겨 주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예외적인 비상사태가 아닌가.

눈물을 머금고 희생을 감수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쓰러운 눈빛으로 인형을 소중히 쓰다듬은 후, 시엔은 조심스레 세리아의 방문 앞에 인형을 놔두었다.

“아, 아아! 이곳에 이안 경의 실제 옷가지로 만들어진 특별 한정판 인형이! 이, 이상하다아…….”

그러고 나서는 잠복.

시엔은 복도가 꺾이는 지점 뒤에 숨어, 숨을 죽인 채 세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부디 사냥감이 미끼를 물기를 기원하면서.

그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걸까.

그간 굳게 닫혀 있던 세리아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엔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숨기기 위해, 제 입을 틀어막고 몸을 숨겼다.

이제야 칩거를 깰 생각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세리아의 시선이 우두커니 멎었다. 절묘하게도 문이 열리는 각도를 빗겨 나간 인형을 향해서.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더듬거리기를 얼마쯤.

그렇게 인형을 향해 손을 뻗나 싶었을 찰나.

느닷없이 세리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마룻바닥을 박찼다. 창문이 열리고, 복도조차 통하지 않고 허공을 나는 신묘한 발놀림.

“어, 어라……?”

시엔은 당황한 나머지, 허겁지겁 달려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용의 눈’이 있어 추적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봐야 하늘을 날듯이 달리는 여인을 따라잡기는 무리였지만.

전력을 다해 내달려, 어느덧 숲의 공터 앞.

시엔은 급히 숨을 죽이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 멀리에서 보이고 있었다.

밤하늘의 달을 등진 자그마한 여인 하나가.

연녹색 동공에서 안광을 흩뿌리며, 심드렁한 낯빛으로 곰방대를 물고 있는 마녀.

최소한 시엔이 알기로, 그러한 행색을 할 만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대마녀’.

이제 시엔의 스승이 된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왔느냐.”

그 물음에, 세리아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피했다.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모습이었다.

소녀가 대마녀를 찾아온 까닭은 단순했다.

“조카야.”

소녀는, 여인의 마지막 남은 핏줄이었으니까.

부쩍 쌀쌀해진 바람이 소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안에 가리워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애처로운 빛을 한 채 떠올랐다.

겨울을 앞둔 계절.

어느 가을날, 소녀는 제 운명을 정하기로 했다.

*

며칠 후.

골방에 처박혀 있던 소녀의 눈동자가 오랜만의 광채를 발했다. 고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철야를 거듭한 여인의 낯빛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시체와 같은 몰골.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숨길 수 없는 환희로 빛나고 있었다.

“됐다……!”

미래에서 온 ‘엘시 라이넬라’는, 그렇게 외치다 이를 악물었다.

“……기다려라, 이안 페르쿠스.”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서.

몇날며칠 밤을 샌 보람이 있었고, 이제는 재회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미래에서 온 두 사형제가 만나기 하루 전.

흡혈귀로부터 감염된 이들을 살릴 수단이 발견되었다.

낙엽이 한껏 떨어지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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